제16화 : 사신, 그리고 적귀

by 기억흡수

온몸의 피가 역류하여 머리로 쏠리고, 근육이란 근육은 전부 갈기갈기 찢어지는 끔찍한 고통이 카츠류우를 덮쳤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경이로운 감각은 온데간데없었다. 귓가에는 터져 나오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내가…. 뭘 한 거지…?’


흐릿한 시야 속으로, 붉게 물든 세상이 들어왔다. 소년의 주변에는 온전한 시신이라고는 한 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리가 잘리고, 사지가 찢기고, 몸이 두 동강 난 후쿠시마의 정예병들이 기괴한 형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자신이 휘두른 칼날이 만들어 낸 지옥의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아직 어린 소년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카츠류우, 정신 차려!”


절박한 목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가 뭉개져 들리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다. 누군가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필사적으로 부축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미카즈키인걸 느낄 수 있었다.


“카츠류우! 정신 차려! 제발!”


소녀의 얼굴이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안도와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카츠류우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고 몸은 태산에 짓눌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 내가 지켜 냈구나….’


그 안도감이 마지막 남은 의식의 끈을 놓게 만들었다. 눈이 감긴 카츠류우는 몸이 축 늘어지며 미카즈키의 품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본진에서, 전장을 뒤흔드는 깊고 음산한 호라가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듣더라도 총력전의 서막을 알리는 듯한 매서운 소리였다.


“중앙 광장이다! 놈들의 전력이 중앙에 모여있다!”

“시바타의 생존자를 찾았다! 놈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영락전 백 관이다!”


산개하여 마을 곳곳을 압박하던 후쿠시마의 병사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그들의 칼끝은 단 한 사람, 의식을 잃은 시바타 카츠류우를 향하고 있었다. 수천의 살기가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어 광장을 향해 쇄도했다.

미카즈키는 이를 악물며 카츠류우를 등 뒤로 숨겼다. 소녀의 작은 등은 세상을 다 짊어진 듯 무거워 보였지만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소녀의 옆으로, 겁에 질려 온몸을 떨고 있는 하야토가 단도를 고쳐 쥐었다.


“나, 나도 도망 안 가.”

“잘 생각했어, 하야토! 여기서 도망가면 내가 죽기 전에 너 하나는 꼭 길동무로 삼을 줄 알아!”


미카즈키가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마을의 다른 닌자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이 움직이지 못하는 카츠류우를 중심으로 둥글게 방어진을 구축했다. 그들의 눈에는 죽음의 공포보다 동료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더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는군! 알아서들 중앙으로 모여 주니 말이야. 자, 어디부터 썰어줄까?!”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료에몬의 쌍검을 튕겨내며 포효했다.

료에몬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일곱 무사, 시즈카타케 칠본창 중 으뜸이라 불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무위는 소문 이상이었다. 산을 부수는 듯한 그의 창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뼈가 흔들리고 내장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료에몬님을 지원해라!”


사이카슈 닌자 둘이 좌우에서 협공했지만, 마사노리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잔챙이들은 꺼져!”


-콰드득!


창을 쥔 손을 교차하지도 않은 채, 창대를 휘둘러 하나의 머리를 박살 내고, 그대로 궤적을 틀어 다른 하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네놈도 저 시바타의 애송이를 지키면서 내 창을 감당하겠느냐!”


마사노리의 창이 더욱 빠르고 맹렬하게 료에몬을 압박했다. 료에몬은 카츠류우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아내며 아슬아슬하게 대응했지만,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니시아치는 눈 위로 얕은 상처가 생겨 피가 흘렀고, 사사에몬은 가슴의 갑주가 쪼개져 나갔다. 준비한 구슬과 함정을 모두 소진한 코우나이는 전방에서 싸우다 팔뚝에 화살이 박혔고, 준시로의 은밀함은 뻥 뚫린 공터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수천의 인파가 몰린 그림자 마을의 광장은 비명과 괴성, 철포와 폭발 소리가 뒤섞여 모두의 귀를 멀게 만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는 피와 살점이 튀고, 생명이 사라지며 기괴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사이카슈의 방어선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앞에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 순간. 광장의 남쪽, 후쿠시마 군의 후미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왜!”

“저, 적이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시선 끝에는 숲의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가 미친 듯이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검은 강물이 범람하듯, 후쿠시마 군의 방어선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달려왔다. 선두에 선 한 사람의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과도 같았다.

그는 뛰면서도 철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지휘관처럼 보이는 이들을 정확히 저격했고, 그의 곁에서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소녀는 양손에 하나씩 쿠나이를 거머쥐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모리마사 아저씨! 드디어 길이 열렸어요!”

“가자. 한 놈도 살려두지 마!”


사이카 마고이치와 핫토리 마도카가 이끄는 이가 닌자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시선이 집중된 그림자 마을의 중앙 광장이었다.


“이가의 원한을 받아라!”

“츠키! 어디 있어!”


이가 닌자들의 수리검이 날아와 후쿠시마 병사들의 이마에 적중했다. 앞선 닌자의 사슬낫이 발목을 휘감아 넘어뜨리면 뒤에 있던 닌자가 도약하여 넘어진 병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마고이치는 철포를 등에 고쳐 메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칼이 스쳐간 자리에는 온전한 시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두두두두두!


땅이 진동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진동이 동쪽에서부터 밀려오자, 남쪽의 난전에 집중되었던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동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핏빛처럼 붉은 군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젊은 맹장의 지휘 아래, 일천에 달하는 붉은 기마들이 마치 이무기를 연상하듯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움직이며 후쿠시마 군의 측면을 찢어발겼다.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갑주와 찢겨나간 시체들만이 나뒹굴었다.


“전열을 유지하라! 창을 들어!”


후쿠시마 군의 지휘관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 속에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선두에 선 기병들은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적의 창진으로 뛰어들었다. 창에 몸이 꿰뚫리는 순간에도, 그들은 고삐를 놓지 않고 다음 돌격로를 열었다. 죽음으로 길을 여는 무모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전술이었다.


“저 미친놈들…. 도대체 누구냐! 이 산에서 무슨 기마가…!”


기마대의 선두, 날렵한 붉은 말 위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전부 때려 부수는 젊은 장수가 있었다. 그의 투구에는 금빛으로 된 오니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고, 그의 붉은 갑주는 주변의 피를 빨아 머금은 듯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이 전장! 토쿠가와의 이름으로 접수한다!”

“저 놈은?!”


토쿠가와 가문의 사천왕 중 한 사람. 적귀, 이이 나오마사였다. 그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붉은 기마 군단은 거대한 칼날처럼 방향을 틀어 전장의 중심인 중앙 광장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쪽에서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마고이치와 이가 닌자들이 광장으로 합류했다.


“다행이야. 늦지 않았군….”

“츠키! 무사해서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했다고!”

“어? 마도카. 네가 여길 왜….”

“안부는 다음이야. 집중해!”


사이카슈의 대장, 사이카 마고이치의 등장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닌자들은 재빨리 전열을 가다듬고, 부상당한 카츠류우를 보호하며 방어선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


“토쿠가와…. 저들이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마도카, 너는 아이들과 함께 후방으로 빠져라. 나머지는 내 뒤로 붙어! 적장을 친다.”


마고이치의 외침에 사이카슈와 이가 닌자들이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향해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이이 나오마사 역시 피로 물든 창을 휘두르며 모두가 모여드는 중앙으로 질주했다.


“그림자들을 방해하지 마, 우리의 목표는 오직 적장의 목이다!”


토쿠가와의 붉은 기마대와 사이카슈의 검은 그림자. 목적은 달랐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적귀의 질주가 후쿠시마 군을 횡으로 가르자 그림자들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도륙하였다. 단 한 번도 함께 싸워보지 않고도 이루어낸 완벽한 연계였다.


“이런, 이런. 이제야 제대로 놀아줄 수 있겠군.”


아이들의 안전이 확보되고 사이카슈의 공세로 전환되는 것을 확인한 료에몬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까지의 나른함과 장난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두 눈에는 오직 서늘한 살기만이 번뜩였다.


“칠본창의 필두라고?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이…! 개 같은…!”


료에몬의 몸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놀란 마사노리가 무의식 적으로 창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나타난 료에몬의 이도류가 십자를 그리며 마사노리의 등갑을 갈랐다.


“크악!”


비명을 지르며 돌아선 마사노리의 창이 맹렬하게 파고들었지만, 료에몬은 딱 아슬한 정도로만 피하며 다시 마사노리의 어깨를 베었다. 지켜야 할 것이 사라진 료에몬은 그야말로 한 마리 맹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당혹감에 물들었다. 사방에서는 사이카슈와 토쿠가와 군이 숨통을 조여왔고, 눈앞에서는 족쇄가 풀린 료에몬이 쉴 틈 없이 급소를 노려왔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으아아아! 퇴각. 퇴각이다! 이 치욕은 반드시…!”


살아남은 호위무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전장에서 이탈했다.

후쿠시마 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피와 시체로 가득한 그리자 마을의 광장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사이카슈의 검은 그림자들과 토쿠가와의 붉은 기마대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무겁게 대치하고 있었다.

붉은 말 위에 앉은 이이 나오마사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마고이치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전쟁터를 굴러온 노련한 무사라 생각했으나 그의 투구 아래로 보이는 젊은 얼굴이었다. 표정에는 전장의 열기가 아닌, 얼음장 같은 냉기를 품고 있었다.


“당신이 사이카 마고이치 인가?”


적의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결코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마고이치는 피 묻은 칼을 아래로 내리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대가 적귀로군. 신세는 반드시 갚겠네.”


이이 나오마사는 대답 대신, 피로 얼룩진 창끝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바닥에 나뒹구는 후쿠시마 가문의 깃발을 지나쳤다. 지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던 사이카 마고이치의 얼굴을 스쳐간 뒤, 미카즈키의 품에 안겨있는 카츠류우를 향해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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