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어진 밤, 고요한 그림자 마을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며칠 전의 격렬했던 전투가 거짓말인 것처럼,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미카즈키는 곁에서 잠든 카츠류우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어린 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짊어진 무게는 소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평온했던 미카즈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기운. 살기는 아니었지만, 마치 얼음장 같은 냉기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었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쿠나이를 움켜쥐고 카츠류우를 깨웠다. 소년 역시 이미 몸을 일으켜 널브러져 있던 검을 찾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벌써 온 건가.”
카츠류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미카즈키는 전방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섬뜩한 기운을 눈치챈 건 둘 뿐만이 아니었다. 잠들어 있던 이들은 소리 없이 창가로 향했고, 저마다 무기를 움켜쥐고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그림자 마을에서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와 움직인 것은 하야토였다.
“어…. 냄새, 냄새가 나요! 한두 명이 아닌데, 동쪽 숲에서 소름 끼치는 냄새가. 허업, 서쪽에서도…. 이건 후쿠시마 군의 냄새! 아, 아니 북쪽에서도…!”
하야토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정확하지 않을 때마다 불안해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그의 후각이 감지한 냄새는 서로 다른 세 방향에서 풍겨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이었다. 마고이치의 지시에 따라 사이카슈 5인방도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동쪽 숲이었다. 달빛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칠흑의 닌자복을 입은 이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듯 나타났다. 마치 숲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순간, 사이카슈 5인방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움직임과 은신술, 이건 일반적인 닌자가 아니었다.
“이가 닌자로군.”
준시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은신술의 달인인 그가 느끼기에도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선두에 선 검은 그림자는 경계를 풀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이리저리 흔들며 적대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츠키! 모리마사 아저씨!”
“이 목소리는…. 마도카?”
마도카가 달려와 미카즈키를 덥석 껴안더니 이내 사이카 마고이치를 찾아 정중히 인사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그때는 나오마사 님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인사도 못 드렸어요.”
“그래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혹시 아비도 함께인가? 음흉한 기운이 수그러들지 않는군.”
마고이치는 마도카를 넘어 이가 닌자들의 무리를 살폈다. 그때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는 거구의 복면인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바람 소리도 내지 않고 그의 앞에 착지했다. 착지 순간, 주변의 낙엽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모리마사.”
“한조. 역시 그대였군.”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오랜 전우와의 재회. 하지만 서로 다른 진영의 복잡한 현실에 그들의 눈빛에는 반가움과 함께 경계심도 스며 있었다.
이들과 조금 떨어져 있던 카츠류우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미카즈키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저분은 핫토리 한조. 이가 닌자의 두령이셔. 아버지의 오래된 벗이기도 하고. 그리고 저 애는 한조님의 딸인 마도카야. 뭐… 나랑 비슷한 녀석이야. 유일한 내 친구이기도 하고. 이번 싸움에 저 사람들의 도움이 컸어.”
“이가…! 혹시 노부나가 님께서 저들의 마을을….”
“맞아. 이가 닌자 마을은 그때 모두 불타버렸지. 지금은 토쿠가와 가문에 협력하고 있어.”
“저 사람들도 날 원망할 테지?”
“네가 뭐라고 원망을 해. 요즘 안 맞았더니 옆구리가 심심한 거야 뭐야. 자책 좀 하지 마 제발.”
“맞아. 나는 나일뿐이야.”
미카즈키는 미소를 지으며 카츠류우의 손을 잡고 마고이치 옆으로 뛰어갔다.
“소개하지, 이 녀석이 시바타 가문의 생존자. 시바타 카츠류우다.”
“반갑구나 소년.”
짧지만 강인한 첫인사였다. 한조는 카츠류우가 말하려는 것을 막은 채 말을 이어갔다.
“모리마사. 그림자 마을의 위치가 노출된 이상 하시바 히데요시가 가만있지 않을 걸세. 일시적 동맹이긴 하나 이곳을 버리고 동쪽으로 거점을 옮기는 게 어떠한가?”
“새로운 거점이라….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 아직은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아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그때 하야토가 다시 외쳤다.
“역시…. 냄새가 하나가 아니었어. 마고이치님 북쪽이요! 북쪽에서 빠르게 다가옵니다. 향냄새가 나요!”
뒤늦게 기척을 느낀 사이카슈와 이가 닌자들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습격을 대비했다. 모두가 긴장하던 순간, 북쪽에서 익숙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우웅
깊고 웅혼한 호라가이 소리. 그것은 어떤 경고도, 위협도 아닌 친근한 소리였다.
“이 소리는….”
“네고로지의 승병들이군.”
“네고로슈가 왔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경계를 풀지 마!”
그림자 마을의 북쪽 경계에서 풀 숲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장엄한 광경이었다. 달빛 아래 형형색색의 가사를 걸친 승병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각자 손에는 나기나타(薙刀)와 테츠보(鐵棒)를 들고 있었는데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 있는 한 사내를 본 카츠류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이잔 님!’
일전에 오사카 성 축성 현장에서 만난 이노우에 세이잔이었다. 그는 카츠류우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가장 앞서있던 승병 하나가 사이카 마고이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마고이치님 오랜만입니다!”
“다이젠! 험한 길을 오느라 고생 많았다. 보다시피 이곳의 상태가 좋지 못하니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을 이해해 다오.”
“별말씀을요. 사이카슈의 은혜를 생각하면 저희가 큰 힘이 되어야 했는데 송구할 따름입니다.”
“한데,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이리 다급히 왔는가?”
“호쿠리쿠에서 온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 소개할게요. 삿사 가문의 전령입니다.”
네고로슈의 승병을 이끄는 네고로 다이젠은 옆에 있던 세이잔을 마고이치에게 소개했다.
“삿사 나리마사 님을 모시고 있는 이노우에 세이잔이라고 합니다. 마고이치님의 명성은 호쿠리쿠 지방 전역에 위용을 떨치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내가 사이카 마고이치요. 말했다시피 상황이 이러하니 먼 곳에서 온 객을 소홀히 대접하여 미안하오.”
“저야 말로, 밤늦게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시바의 영지를 관통하여 오다 보니 경황이 없었습니다.”
세이잔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군데군데 혈흔이 묻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이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우리는 모두 그자의 발아래 짓밟힐 것입니다.”
“허나 삿사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여 영광을 누리지 않소?”
“겉으로는 그렇긴 합니다만…. 실은, 삿사 나리마사 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앞으로 물심양면으로 사이카슈를 도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음…. 카츠류우 때문이겠군.”
“반은 그런 셈이지요. 호쿠리쿠 내에 시바타의 영향력은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세이잔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마고이치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을 이어갔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할 때가 왔습니다. 과거 오다 포위망처럼, 이번에는 하시바 가문의 숨통을 조여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마고이치와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한조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잔 님, 소개하겠소. 토쿠가와 가문의 핫토리 한조요.”
“예…? 이가 닌자를 이끄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소. 다시 한번 인사드리오. 삿사 가문의 의지는 잘 확인하였소. 조만간 나와 함께 주군을 뵙는 게 어떻겠소? 그 하시바 포위망, 불가능한 게 아닐 것이오.”
세이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하시바를 쳐부술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하야토가 소리쳤다.
“끄아악! 또, 또 와요! 서쪽. 이번엔 정말 많아요!”
“젠장, 땅까지 울리는 군…. 하시바 군이 벌써 출병한 건가.”
“네고로슈 여러분, 여기까지 와서 미안하게 됐소.”
“문제없습니다. 늘 그렇듯 함께 싸워야죠!”
사이카슈와 네고로슈, 그리고 이가 닌자들이 다시 한번 그림자 마을의 서쪽 경계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적의 규모가 너무 컸다.
니시아치와 사사에몬이 서쪽 숲의 선두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했고 료에몬은 나무 위로 올라가 두 자루의 칼을 뽑아 들고 하품을 길게 했다. 코우나이는 창고에 남아있던 모든 화약통을 들고 길목에 대기했고 준시로는 아예 기척을 지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을의 중심부에는 사이카 마고이치와 핫토리 한조, 네고로 다이젠과 이노우에 세이잔. 서로 다른 세력들이 뭉쳐 카츠류우를 둘러쌌다. 그들은 마고이치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 마을의 서쪽 숲으로 정체를 숨기지 않은 하시바 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이들은 다름 아닌,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패잔병들이었다. 길안내를 하기 위해 앞장선 듯했다. 그들의 갑주는 여기저기 손상되어 있었고 몇몇은 팔이 잘려나간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사이카슈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뒤로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군세가 따르고 있었다. 일천에 가까운 병력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며 질서정연하게 다가왔다. 이들은 후쿠시마의 패잔병들과는 달리 위엄 있고 패기 있는 모습이었다.
“저놈들, 내 칼에 썰린 놈들 같은데?”
사사에몬이 은신을 해제하고 나타나 일천의 병력 앞에 홀로 마주 섰다. 그와 눈이 마주친 패잔병들은 지나간 공포가 되살아 난 듯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명은 아예 기절해 버렸고, 다른 한 명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뒤, 일천의 무리들은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고 횡으로 벌리며 방어진형을 완성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들의 한가운데, 단정한 차림의 젊은 무사와 어리지만 곱고 단아한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 무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여기가 사이카슈의 본거지인가요? 아아아, 대단하군요 이 깊은 산속에, 마치 산성을 연상케 하는 건물의 배치라…. 흥미롭군요. 아? 사이카슈 여러분들만 있는 게 아니군요.”
젊은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천천히 마을 입구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치 모든 것을 투시하고 분석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는 건물의 배치, 방어 시설의 구조, 심지어 사람들의 표정까지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억하는 듯했다.
“호오, 누구죠? 명성이 자자한 사이카 마고이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그리고 그 유명한 시바타의 아이는 또 어디 있을까요?”
단정한 갑주 안에 화려한 치장을 한 젊은 무사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고 말투는 어딘가 괴기했지만,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과 광기가 스며 있었다.
서쪽의 경계를 뚫고 나오는 하시바의 군세는 공격 의사가 없었기에 마고이치는 젊은 무사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마고이치다. 자네는 어디의 누구인가?”
“아아아! 드디어 만나 뵙군요. 키이의 영웅! 영광입니다. 마고이치님.”
젊은 무사는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장난감을 마침내 손에 넣은 아이 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소년이…. 아아아!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죽었다고 알려진 시바타 가문의 혈육이 이렇게나 건강하고 용맹하게 자라나다니. 히데요시 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그는 카츠류우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뼉을 쳤다. 그 박수 소리마저 기괴하고 섬뜩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