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 달빛 아래의 재회

by 기억흡수

“저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이 땅의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사이카슈와 시바타의 혈육에게 히데요시 님의 관대한 은덕을 전하러 왔답니다.”


젊은 무사가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의 명성은 이미 전국에 알려질 때로 알려져 있었다. 하시바 가문의 신성, 이시다 미츠나리. 시바타 가문을 무너트린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뛰어난 무용을 자랑한 칠본창이 혜성처럼 등장했다면, 미츠나리는 뒤에서 조용히, 정보의 교란과 보급의 운용으로 승리를 거머쥐게 만들며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적을 죽이는 것보다 적을 굴복시키고 조롱하는 것을 더 즐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미츠나리가 가볍게 손짓하자 그의 곁에 있던 소녀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온 마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소녀의 맑은 두 눈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 카츠류우와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카츠류우… 오빠….”


낮고 가녀린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절망이 섞여 있었다.

카츠류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소녀를 향해 몸이 기울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오이치의 세 딸 중 막내인 고우(江)였다.


“고우!”


카츠류우는 무의식 적으로 그녀에게 뛰어가려 했지만 료에몬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이봐, 꼬맹이. 함부로 움직이지 마.”


미츠나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크게 번졌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마치 한 편의 가부키를 보듯 즐기고 있었다.


“아아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가족의 상봉은 이렇게 아련하지요. 안심하세요. 고우 님은 물론이고, 차차 님과 하츠 님도 히데요시 님의 보호 아래에 아주아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답니다. 매일을 눈이 휘둥그레질 산해진미를 드시며, 봉황과 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철옹성 같은 성 안에서 편안히 지내신답니다.”


미츠나리의 말은 상냥했고 행동은 우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즐기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녀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특히, 여기 계신 고우 님은…. 아!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셨는지요. 역시 제육천마왕의 피는 다르군요. 곧 좋은 분과 혼례를 올리실 예정이랍니다.”


미츠나리의 말에 카츠류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원하지 않는 정략결혼. 더 이상 고우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우는 카츠류우에게 미소 지으려 했지만,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이내 그녀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이카슈 여러분, 이 여린 소녀의 눈물이 보이시나요? 이 맑고 순수한 소녀의 얼굴에 미소를 찾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츠나리의 미소는 점점 더 기괴하고 비뚤어져가고 있었다. 그는 고우의 눈물을 닦아주는 척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우는 몸을 움츠렸지만 피할 수 없었다.

카츠류우를 억누르던 료에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봐,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본론을 말해.”


미츠나리가 또다시 손뼉을 한 번 치자, 그의 뒤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철포를 들어 올렸다. 달빛에 반사된 수천의 철포가 사이카슈와 그들의 동료들에게 겨누어졌다.


“여러분! 모두 무릎을 꿇고 히데요시 님께 충성을 맹세하세요. 사이카슈에게는 키이 전역의 지배권을 드리며, 시바타의 아이에게는 시바타 가문의 모든 것을 되돌려줄 것입니다. 영지도, 가신들도, 그리고… 가족들도 말입니다.”


그는 고우의 어깨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소녀가 아픔을 견디며 작게 신음했지만, 미츠나리는 개의치 않았다.


“아아아~ 이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겠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에요.”

“거부한다면?”


마고이치의 차가운 대답에 미츠나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흐으음, 그럼 죽음… 뿐이겠지요.”


미츠나리가 고우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소녀의 하얀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이 닿자, 고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모습을 본 카츠류우는 료에몬을 뿌리치고 튀어나갔지만, 이번에는 니시아치와 사사에몬이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건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비극이겠군요. 사랑하는 동생을 눈앞에서 잃는 슬픔, 자신의 나약함! 그리고 절망과 후회!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적인 결말이군요.”


그는 진짜로 타인의 비극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듯했다.


“여러분, 제안은 이번 한 번뿐이랍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테니 나흘 안에 오사카성으로 기별하세요. 그리고….”


미츠나리가 카츠류우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시바타의 마지막 남은 아이야,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선택 하나에 이 아름다운 소녀들의 운명이 달려있답니다. 과연 당신은… 또다시 가족을 잃을 건가요? 후후훗.”


미츠나리가 웃으며 돌아서자 하시바의 군세도 일제히 뒤돌아섰다. 차마 발 길을 돌리지 못한 고우는 카츠류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홀로 서있는 고우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녀의 작은 어깨는 떨리고 있었고,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모습이 더욱 카츠류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카츠류우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양팔을 결박당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고우도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순간, 미츠나리가 손을 들어 고우를 낚아챘다.


“작별의 시간이군요.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요.”


그때 고우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카츠류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빠, 절대 오지 마. 절대.’


카츠류우는 단호하게 뒤돌아서는 고우를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지만, 그녀에게 위해가 될까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미츠나리의 손에 이끌린 고우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때,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달빛에 반짝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미츠나리의 괴기스러운 웃음소리만이 그림자마을의 밤공기를 가르며 메아리쳤다.




그의 웃음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카츠류우는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빛 아래, 고우가 서 있던 그 자리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는데,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젠장, …젠장할!”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며 당장이라도 미츠나리의 뒤를 쫓아 그 교활한 목을 베고, 고우를 되찾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려낸 사악한 계략의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눈앞에 있던 동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무력감에 무너지기 직전, 미카즈키가 조용히 다가와 카츠류우의 팔을 잡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녀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달빛 아래서 흔들리는 소년의 눈빛을 마주할 뿐이었다. 팔을 붙잡은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이 카츠류우의 분노와 아픔을 조금씩 달래주는 듯했다.

카츠류우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이나 무력감이 아니었다.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반드시 복수를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미츠나리가 떠난 후, 그림자 마을의 밤은 더 깊은 침묵에 잠겼다. 마고이치, 한조, 다이젠, 세이잔 네 세력의 대표들을 비추던 달빛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상황은 급박하게 바뀌었고 더 이상 키이의 깊은 산속에 숨어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사이카 마고이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가 왔군.”


그는 한조와 다이젠, 그리고 세이잔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다이젠, 자네는 네고로지로 돌아가도록 하게. 훗날 우리가 하시바에 맞서 토쿠가와에 힘을 실어줄 때 네고로슈의 철포가 큰 힘이 되어야 할 것이야. 그때를 위해 힘을 비축하게.”

“스님들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한조님을 따라 하마마츠 성으로 가겠습니다. 삿사 나리마사 님의 의지를 이에야스 님께 전하고, 양 가문의 일시적 동맹을 논해야겠지요. 카츠류우 도련님을 전폭 지지한다는 것도 함께 전하겠습니다.”


세이잔의 말을 들은 한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마고이치는 그림자 마을을 수비하던 뒤돌아서 사이카슈 전 인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그림자 마을은 버린다.”


이 말에 모두가 놀랐지만, 마고이치의 결단은 단호했다.


“한조,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동쪽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에 이가의 힘을 보태주게.”

“물론이다.”


사이카슈와 네고로슈, 이가 닌자와 삿사 가문의 대표자들은 해가 뜰 때까지 하시바 포위망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연합은 곧 전국을 뒤흔들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될 터였다.




거물들이 결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자리를 뜬 후, 중앙 광장에는 카츠류우, 미카즈키, 그리고 핫토리 마도카 단 세 사람만 남아있었다. 그림자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소년의 가슴속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항상 옆을 지켜주던 미카즈키 덕분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 이제 우리 셋뿐이네.”


마도카가 먼저 입을 열며 카츠류우 쪽으로 나긋하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눈빛엔 단순히 호기심을 넘어선 짙은 흥미가 가득했다. 그녀는 카츠류우의 날카로운 턱선을 훑어보듯 응시했다.


“….”


그 순간 미카즈키는 말없이 카츠류우의 팔을 확 붙들어 당겼다. 마치 반짝이는 보물을 숨기려는 고양이 같았다.


“뭐야 이거? 츠키, 아니지?”

“뭐, 뭐가? 당연히 아니지! 오늘은 늦었어. 이제 다 헤어지자. 피곤해”

“기다려. 친구가 오랜만에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마도카가 당당하게 다가와 카츠류우의 다른 쪽 팔을 거리낌 없이 덥석 잡았다.


“천하의 미카즈키를 이 꼴로 만든 게 바로 너구나? 시바타의 도련님.”


마도카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카츠류우를 흘끗 바라봤다.

미카즈키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헛소리하지 마, 마도카! 우린 사이카슈니까….”

“후후, 그런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잖아? 카츠류우, 네가 정말 복수를 이루고 싶다면, 우리에게 와. 토쿠가와는 사이카슈보다 훨씬 빠르게 너의 복수를 이루어 줄 수 있어.”

“그만해! 카츠류우는…. 여기가 집이야.”


불확실한 말 끝에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 눈빛은 확고했다.

마도카는 잠시 침묵하더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흥. 역시 맞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 또 처음 보네.”


두 소녀 사이에서 팔이 잡힌 채로 있던 카츠류우는 식은땀이 흘렀다. 강력한 두 명의 닌자 사이에 낀 소년은 벗어날 수 없었다.


“저…. 잠깐, 나도 할 말이….”


그러나 두 소녀는 소년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서로를 향해 살기 가득한 눈빛을 쏘아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도카, 그 손 안 떼? 예전에 맞았던 거 잊었나 봐?”

“무슨 말이야 츠키? 최근에는 네가 졌던 거 같은데?”

“아오… 씨. 오늘 결판내자 일로와!”

“후후, 이러니까 진짜 더 뺏고 싶네.”


마도카는 계속 도발적으로 속삭였다.


“장난 아니야, 마도카.”


미카즈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알아, 나도 그래서 더 끌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두 소녀의 손길이 점점 강해지며, 카츠류우의 두 팔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겨졌다.


“아악, 내 팔. 쫌! 둘 다 진정하라고!”


소년의 처절한 외침에 두 소녀가 동시에 그를 보며 전혀 다른 방식의 웃음을 지었다. 미카즈키는 안도감 섞인 활기찬 웃음을, 마도카는 흥미와 질투심이 뒤섞인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머지않은 미래에 펼쳐질 피와 원한의 전장 한가운데서, 시바타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지켜낼 두 소녀의 운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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