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이슬은 그림자 마을의 잔해 위에 피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수십 년간 사이카슈의 은거지였던 곳이 이제는 버려진 무덤처럼 고요했다. 그림자 마을에 있던 모든 인원이 그리움을 뒤로한 채 소리 없이 이세(伊勢)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세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맞닿는, 전국의 균형이 뒤흔들릴 경계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발걸음은 마을의 추억만큼이나 무거웠지만, 발소리는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보다 작았다.
카츠류우는 사이카 마고이치와 핫토리 한조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며, 양 옆으로는 미카즈키와 마도카가 함께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소년의 짐이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 한 자루와, 심장에 박힌 복수심뿐.
카츠류우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물안개로 가려진 그림자 마을의 흔적조차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보낸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무심곡의 폭포 아래에서 쓰러진 수십 번의 수련, 미카즈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려 애썼던 순간들, 스승님들과의 모든 것이 이제 영원히 지나간 시간이 되어버렸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조롱이 귓가에 맴돌았고, 동생 고우의 신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돌려 오사카로 향하고 싶었지만, 소년의 앞에서 묵묵히 달리는 마고이치의 등이 그를 붙잡았다.
자신보다 더 큰 시련을 겪은 그 모습이 소년을 앞으로 이끌어 주고 있었다. 사이카슈의 수장으로서 수십 년 지켜온 마을을 버리고, 스즈키 시게히데의 배신으로 무너진 사이카성을 뒤로하며,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등이.
‘복수는 준비된 자의 것이다.’
언젠가 마고이치가 해주었던 말이 카츠류우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퍽
갑작스러운 타격에 카츠류우는 몸이 굳혀졌다. 미카즈키의 일권이 소년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쳤다.
“정신 놓지 마. 네 발소리가 멧돼지처럼 시끄러워.”
“알았어.”
카츠류우는 짧게 대답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을을 떠나는 것이 이렇게 마음을 어지럽힐 줄은 몰랐다. 발아래로 이어지는 산길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반대편에서 마도카가 재빠르게 다가와 카츠류우의 팔짱을 꼈다.
“쳇, 츠키는 너무 까칠하다니까. 힘내! 내가 끌어줄게.”
마도카는 쾌활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소년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소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카츠류우의 팔에 닿았고,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카즈키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소녀는 마치 사냥감을 빼앗긴 맹수처럼 마도카를 노려보는데, 산길을 달리면서도 그 시선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거 안 놔? 마도카, 너는 이가 닌자들이나 신경 써. 이 바보는 내가 끌고 갈 거니까.”
“후훗,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보다 훨씬 강한 사람한테. 안 그래? 시바타 도련님.”
마도카는 카츠류우의 팔을 더 깊숙이 잡아끌며 몸을 밀착한 채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는 단순한 장난기를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저…. 마도카. 난 괜찮아. 이러니까 달리기 더 불편해.”
소년은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자세는 그대로였고 얼굴은 많이 달아올라 있었다. 마도카는 키득거리며 소년의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퍽!
조금 전보다는 강한 일격이 카츠류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평소라면 피했을 공격이지만, 마도카에게 정신이 팔린 소년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멈춰 섰다.
“아오. 열받아 죽겠네. 왜 가까이 붙어있는 건데! 왜 빨개지는 건데!”
“가까이 붙으면 뭐 어때? 우리도 사람인데, 힘들 땐 서로 기대야지. 아니면 츠키, 너도 와. 같이 가자!”
마도카가 도발적으로 웃으며 카츠류우가 아닌 자신의 반대 팔을 내밀었다.
마도카를 보며 으르렁 거리던 미카즈키의 주먹이 섬전처럼 날아가려는 찰나, 마고이치가 나타나 꾸짖었다.
“둘 다 적당히 해. 일각이라도 더 빠르게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넵!”
“네….”
더 큰 주먹의 무서운 맛을 알고 있는 두 소녀는 군말 없이 마고이치의 명령을 따랐다. 마도카가 아쉽게 카츠류우의 팔을 놓아주자, 미카즈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두 사람에게 해방된 카츠류우는 다시 한번 마고이치에 대한 존경심을 가슴에 담았다. 저런 맹수 같은 소녀들을 단 한마디로 제압하다니. 역시 사이카슈의 수장이었다.
선두에 선 핫토리 한조가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행렬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며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세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지만, 그곳에는 사이카슈의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츠류우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 마을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배운 모든 것이 소년의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복수를 완성하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는 그날. 그때까지 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 다짐하며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사이카슈 일행은 산골짜기의 작은 옹달샘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핫토리 한조는 비교적 가벼운 차림으로 여정을 함께 하는 이가닌자들에게 주변의 경계를 명령한 뒤 자신도 주변을 살피러 떠났고, 사이카 마고이치는 가장 깊은 샘의 옆 바위에 앉아 소년을 가까이 불렀다.
“카츠류우. 이리 와서 앉거라.”
“예, 스승님.”
소년이 마고이치의 옆에 앉자, 마고이치는 맑은 수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속세에서 한참 벗어난 듯, 맑고 깊었다.
“시바타의 혈풍은 너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강해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너의 갈망이 비칠 것이야.”
“스승님…. 솔직히 저는 지금, 복수에 대한 갈망뿐인 것 같습니다.”
카츠류우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좌중을 앞도한 이시다 미츠나리의 조롱과, 고우의 신음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복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덧없는 고통의 수레바퀴일 뿐, 가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단순한 보복을 넘어선 큰 뜻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겠지.”
“제 목숨 다해서 누이들을 구하고, 적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제 가치는 충분합니다.”
“복수는 너의 삶을 이끄는 불꽃이 되어야지, 너의 삶은 태우는 화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복수가 끝난 후에도 누군가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너를 아끼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이들의 삶이. 복수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그럼 너를 필요로 하는 이들도 지금보다 많아질 것이다. 그때 네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네….”
“너의 아버지가 그토록 강했던 이유는 지킬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가문을, 신념을 지키기 위한 힘이었지. 단순히 원수를 죽이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카츠류우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동안 복수심이라는 족쇄에 매여 있었던 그의 마음은, 사실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혈풍은 이기는 힘이 아닌, 지키는 힘이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네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할 때, 비로소 혈풍은 너의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카츠류우는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마고이치는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일어섰다.
“그거면 됐다. 이제 일어나거라. 아직 갈 길이 멀다.”
두 사람의 대화가 깊어질 때, 한조는 미카즈키와 마도카를 상대로 혹독한 은신술 수련을 진행했다.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의 몸에 닿는 것.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숲의 중심부에서 세 사람이 이리저리 몸을 날려대며 서로의 뒤를 노렸다.
나무 사이로 그림자 같은 형체 두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미카즈키는 왼쪽 나무 뒤로, 마도카는 오른쪽 가지 위로 각자의 위치를 잡았다. 한조는 중앙에 서서 두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서 있었다.
“마도카, 네 웃음소리가 너무 크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웃을 거냐?”
“에이, 아버지! 숨길 수 없는 걸 어쩌라구요. 저는 웃는 게 진정하고 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츠키와 함께 수련하는데 어떻게 안 웃어요!”
마도카는 수련 중에도 쾌활하게 반항했다. 그 순간 한조가 움직였다.
-퍽!
공중으로 도약한 한조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나타나 마도카의 옆구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마도카는 나무 위에서 튕겨져 날아가 땅바닥을 굴렀다.
“마도카, 넌 벌써 세 번 죽었다.”
한조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마도카는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이를 갈았다.
“아악! 짜증 나.”
“미카즈키는 잘 숨었군. 좋아, 하지만 언제 나를 제거할 거지?”
수련이 시작된 이후로 미카즈키는 단 한차례도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소녀는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한조조차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월영술의 위력이었다.
미카즈키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한조의 사각지대로 이동했다. 소녀는 이미 그림자와 한 몸이 되어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빛조차 소녀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발자국은 남지 않았고, 숨 쉬는 공기마저 멈춘 듯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바로 그때였다. 마도카가 반대쪽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카츠류우 벌써 끝났어?”
미카즈키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으며 호흡이 흐트러졌다. 소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마도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퍽!
“꺄악!”
한조의 손날이 미카즈키의 목덜미를 정확히 내리쳤다. 소녀는 나무 뒤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감정이 요동치는구나 미카즈키. 주의하도록 해라.”
“으윽, 네….”
미카즈키는 목을 좌우로 비틀며 일어났다. 마도카의 거짓이란 것을 알았지만, 카츠류우라는 이름 하나에 그토록 완벽하던 집중이 무너진 것이다.
“숨어만 있더니 꼴좋네. 큭큭”
“아오… 열받네. 한조 아저씨. 저 마도카와 한번 붙어도 될까요?”
“너희 둘은, 감정 조절이란 것을 좀 하거라. 그렇게 감정이 다 드러나면 하급닌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한조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두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카즈키는 마도카를 노려보고 있었고, 마도카는 웃음기를 감추지 않고 미카즈키를 비웃고 있었다.
“음…. 아니면 둘이 한 쌍이 되어 합격(合擊)을 구사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한조의 말에 두 소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네? 저랑 얘랑요?”
“쟤가 나랑요?”
두 소녀의 목소리가 겹쳤다. 서로 손사례를 치며 이건 아니라는 듯 격하게 거부했지만, 한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카즈키, 너는 은신술은 뛰어나지만 기습의 순간을 놓친다. 마도카, 너는 대담하게 공격하지만 그만큼 기척을 숨기지 못해. 하지만 서로가 하나가 되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어떻겠느냐?”
두 소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한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표정에는 고민이 많았다. 한조는 두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은신술입니다.”
“일격필살의 암살술이요.”
두 소녀가 각자의 다른 답을 내놓자, 한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무의 완수다. 혼자서 할 수 없다면, 둘이서 하면 된다. 자존심 때문에 임무를 실패하는 닌자는,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거다.”
미카즈키와 마도카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하는 대로 수련을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연계기술을 연습하도록 하거라.”
한조가 돌아서서 걸어가려 할 때, 마도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진짜로 저희 둘이 짝이 되는 건가요?”
“동맹이 지속되는 한 그렇겠지. 너희 둘은 앞으로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
한조의 모습이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두 소녀는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친하고 오래된 친구였지만, 카츠류우가 사이에 껴버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미카즈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습이나 해볼까?”
“… 싫은데?”
“… 나도 싫어 근데 한조 아저씨 말씀이니까.”
“그래 뭐 아버지 말씀이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마도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 츠키.”
“어쩔 수 없네, 마도카.”
여전히 서로를 향한 경쟁심은 남아있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싹트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카츠류우 얘기로 날 흔들지 마.”
“도발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카츠류우는 네 것이 아니잖아. 나도 포기 못 해.”
“그래… 뭐, 일단은 약속.”
“약속.”
두 소녀는 짧게 웃음을 나눴다. 완벽한 화해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