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때여, 언제 오세요?”
“밤 열한 시는 넘을 것 같은데?”
“네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뚝 끊은 사람은 옥자였다. 나와는 초등, 아니 유치원 때부터 동창이다. 친구인데도 내게 존대하는 이유가 있다. 옥자는 대화할 때 그 상황을 재현하거나 연기하는 버릇이 있다. 옥자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 장례식장에 있는 옥자는, 7년 전에도, 4년 전에도 이렇게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7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떠난 엄마를 보지 못해 넋을 놓고 있었다.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지인들에게 연락해야 하지 않아?”
엄마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남편의 재촉에 정오가 지나서야 연락했다. 장례식장에서 받은 문자를 열세 명의 지인에게 보냈다. 문자를 전송하자마자 여러 통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부고장 전달부탁을 해야 했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선남, 에구
전화가 아닌 문자가 왔다. 수신 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단 두 마디로 감정이 전해지는 사람, 옥자였다.
점심 무렵이 되자 장례식장에 조문객이 몰려왔다. 나에게 문자를 받은 열세 명의 지인들이었다. 처음 도착한 지인이 물었다.
“어찌하다가 돌아가신 거야?”
“엄마가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도 눈이 안 보인다고 하셨어요. 가족들도 못 알아보고 서울 병원에 갔더니 급성 종양이라고 하더라고요. 급하게 수술도 하셨는데…….”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또 다른 조문객이 왔다.
“영정사진을 봤는데 어머님이 젊으시던데?”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말이 쌓일수록 두통이 시작됐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의 말소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통이 심해져 빈소 옆방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장소에 순간 당황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와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오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선남!”
옥자였다. 놀라운 건 이름도 얼굴도 선명하지 않은 동창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다.
“여기 밥 세 그릇이요. 여기는 컵라면 하나 달라네요.”
“컵라면?”
내가 되묻자 옥자가 직원 흉내를 내며 말했다.
“라면은 저기 있습니다.”
옥자가 가리킨 곳에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창들은 어릴 적 젊었던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집에 놀러 갔을 때 엄마가 해주던 계란 프라이 이야기였다. 맛소금 대신 굵은소금을 쏵쏵 뿌리던 엄마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지금도 계란 프라이에는 굵은소금을 넣어 먹는다고 덧붙였다.
옆 동네 동창이 말했다.
“저번날에 엄마 뵈었어. 나 보시더니 너는 자주 안 온다고 하시더라.”
“너는 눈치 없이 그런 말을 왜 혀. 고만 집에 가야 쓰겄는디.”
옥자가 말을 끊었다.
“그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혔지.”
사과를 받았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새벽녘, 큰집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동생이 상복 상의를 벗어던졌다.
“에잇, 씨! 우리 엄니가 왜 선산에 못 들어가냐고!”
언니들과 여동생이 일제히 일어났다. 큰집 오빠는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도 뒤따라 나갔다. 나는 남인 것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례식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깬 건 옥자였다.
“쟈가 귀남이어서 엄마한테 애틋해요.”
옥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딸만 넷을 낳은 엄마에게 남동생은 한을 풀어준 존재였다.
마지막 날까지 옥자는 동창들의 자리를 안내하고 밥을 챙겼다. 장례식장 직원처럼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4년 전 아버지 장례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엄마 옆 선산에 모신 뒤, 남동생이 말했다.
“옥자 누나는 이제 친누나 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