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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의원(太醫院)의 전의보(典醫補)

단편 추리소설

by 장웅진 Feb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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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장 같은 분들이 이태왕이라 부르는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소.


외숙부께서 태의원(太醫院, 1894년에 내의원을 개편한 기관)의 전의보(典醫補)가 되신 덕이었지.


소장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조선에서는 친척 중 누군가가 출세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몰려와 부양해줄 건 기본이고, 재물이나 자리까지 부탁한다오.


경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여화공 나혜석을 보시오.

나혜석이도 서방이 외교관으로 크게 출세하자, 시댁 친척들에게 그런 곤욕을 겪고서 이혼했다고 들었소.


서방에게 큰 흠이 있어 헤어져도 오히려 여인 쪽에 흉이 남는 게 이 조선의 실정이잖소.

그걸 무릅쓰고 이혼이란 걸 감행했으니, 그 시달림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내 경우는 좀 달랐소.

외숙부께서는 당신 누님이시던 내 어머님을 애지중지하셨고, 그래서 내 어머님의 말씀이라면 마치 황후 폐하의 말씀처럼 따랐다오.

오죽했으면 외숙부가 어릴 적에 동네 어른들이 저러다 지 누나 시집 갈 때 뭔 난리를 칠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었다 하오.


그래서 내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이 마대산이에게 번듯한 밥줄 하나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셨을 때, 외숙부께서는 꼭 그렇겠노라고 약속하셨소.


외숙부께서 숭례문 밖 약방에서 10여 년간 보필한 어른이 누구 덕인지는 몰라도 태의원의 전의가 되었지.

그 덕에 외숙부도 전의보가 되셨소.


 외숙부께서는 나 또한 태의원의 주사로 특채될 수 있게 손을 써주셨소.


자, 고구마가 나왔구려. 어서 드시구려. 황토에서 자라 알이 실하다오.

뭐, 높으신 분들은 천황 페하께서 내지 제일의 학자들을 모으시고, 그 양반들이 아주 좋은 종자만 고르고 골라 씨고구마를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베푼 거라고 하시더군요.

자기가 농사지은 쌀 한 톨 먹어보지 못하는 가엾은 조선인들을 천황 폐하께서 안타까이 여기셔서 말이오.


나야 조선 촌것이라 저 말이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고, 아무튼 많이 드시오.


아, 이 시원한 동치미도 잡수시면서 내 얘기를 들으시오.


사건은 황제 폐하 탄신일 다음 날 벌어졌소.


그런데 소장, 혹시 ‘코오피’를 아시오?


역시 내지 토박이라 잘 아시는구려.


뭐, 경성의 모단뽀인가 하는 건달들이 창경원 원숭이가 사람 흉내 내듯 양인 흉내 내려고 마신다는 소리도 들었소.

 그래서 요즘 경성에는 밥집과 술집을 합한 수효보다 코오피 파는 집 수효가 더 많다고 하오만, 그게 사실이오?


뭐, 소장께서도 모르신다니 어쩔 수 없구려.

사토 영감 나리의 장남께서 총독부에 계신다니, 그편으로 알아보리다.


어, 사래 걸리셨소?

왜 갑자기 켁켁거리시오?

그러게 동치미 좀 드시라니까요.


아무튼 ‘광무(光武)’라는 연호가 막 쓰이던 때 조선 땅에서 코오피를, 그러니까 ‘가배다(珈琲茶)’니 ‘양탕국’이니 하던 그걸 마셨던 이는 문자 그대로 극소수였지.


그렇소.

 황제 폐하를 비롯해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종종 맛볼 수 있던 별미 중의 별미였다오.

 오늘날 조선 땅의 흰 쌀밥처럼 말이오.


허허, 그래요, 그때도 그랬어요.

 만조백관들이 당일까지 걱정했지만, 황제 폐하의 탄신일 행사가 무탈하게 진행된 뒤였지요.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그날 어전에 모인 신하들이며 비빈들에게 코오피를 한 잔씩 하사하셨소.


그런데 다들 마시자마자 쓰러지고 토하고, 큰 난리가 난 겁니다!


그렇소, 소장.

누군가가 코오피에 독을 탄 거요.

불행 중 다행히 황제 폐하께서는 평소에 코오피를 즐기셔서 향과 맛이 다른 걸 알아차리셨소.

그래서 바로 뱉고서 외치셨지.


“독이다!”


허나 황태자 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미 한 모금 이상씩 삼킨 뒤였소!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야 물론 대궐이 뒤집어지리만치 난리가 났지요.


그때 난 태의원에 있었소.

약재 구입 대금 지불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지.


외숙부도 나를 감독하며 그날 막 들어온 약재를 일일이 검사하고 계셨다오.


그런데 대전에서 다급히 전의를 부르니, 외숙부도 그자와 함께 뛰쳐나가셨지.


 남아 있던 우린 별 일은 아닐 거라고, 높으신 분들끼리 또 서양에서 들여온 기름진 걸 드시다가 급체하신 모양이라고 농지거리를 했다오.


그렇소, 소장.

외숙부께서는 반나절 뒤에나 돌아오셨소.


 그전에 궐내에 소문이 좍 퍼졌다오.

 황제 폐하와 황태자 하께서 식중독에 걸리셨다느니, 누군가가 음식에 독을 탔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무탈하시지만 황태자 하께서는 흉한 일을 당하셨다느니, 또 그 반대의 얘기며 심지어 두 분 다 붕어하셨다는 흉한 얘기까지 말이오.


그래요, 온갖 잡소리들이 떠돌아다닌 거야!


뭐, 난리가 나면 늘 그런 거 아니겠소.


아랫것들이야 소식을 바로 듣지 못하니까요.


게다가 남 얘기하는 것만큼 재미난 게 또 어딨소?


아, 물론 나는 음식 때문에 탈이 났다는 건 믿지 않았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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