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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9. 2024

임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하지만 임오관 공 덕분에 지금은 저희 일본인들도 같은 책을 한 번에 수백 권씩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임오관 공 덕분에 조만간 스승님(강항)의 가르침은 물론 옛 중원의 성현들 말씀이 일본의 모든 사무라이들에게 보급될 거고요. 그날이 오면 이 일본에서도 칼을 숭배하는 자들은 저 조선 북방의 반조쿠와 같은 자들로 여겨지리라고 소생은 믿습니다. 그 말인 즉, 일본이 비로소 평화로워지는 겁니다!”


후지와라는 얼굴에 화색을 띄고 두 눈을 빛내면서 임오관을 향해 말했다.


“이렇듯 임오관 공께서는 고귀하신 분들을 비롯한 만인(萬人: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파리의 목숨과 같았던 전란의 시대를 이렇듯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소생은 일본 민초들을 대표하여 임오관 공께 감사를 드립니다.”


후지와라가 임오관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하자 강항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공이 이토록 크지만, 그걸 조선에 알릴 수 없다는 게 아쉽구먼.”


“스승님, 어쩌면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일? 그게 뭐겠는가, 후지와라 군?”


강항이 놀라서 묻자 얼굴에 근심을 드러낸 후지와라가 서글프게 대답했다.


“임오관 공께서 가르치신 금속활자와 인쇄술 덕분에 저희 일본에서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이 크게 융성한다면 훗날 이런 일도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들은 자기 조상들이 칼부림 밖에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와 비슷한 이유로 크게 출세한 자들은 대개 제 조상들의 신분이 천했다는 사실을 감추거나 속이곤 하지요. 저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말입니다.”


목소리를 죽이고서 마지막 발언을 하는 후지와라를 보면서 강항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스승이 제 생각을 인정해줘서 기뻤던 후지와라는 힘을 주어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금속활자와 인쇄술을 일본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 양 하거나, 대국(大國)인 명나라에서 배워온 것인 양 할 겁니다. 아주 먼 훗날 그런 자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스승님!”


후지와라의 주장에 강항도 잠시 고민하더니 체념한 투로 말했다.


“일리가 있네, 후지와라 군. 허나 어쩔 수 없잖은가?”


강항은 오른손을 들어 임오관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조선 조정에 이런 사실을 알린다면 조선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이 사람의 처자식과 일가붙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겠지. 나아가 이 일본 땅에 남은 다른 인쇄공들이라든가… 아리타 등지에서 자기를 굽는 도공들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질 걸세. 감히 임금과 나라에 등을 돌리고 왜구들과 결탁했다고 모함하는 자들마저 분명히 있을 게야.”


후지와라도 납득했다는 듯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항의 주장은 이어졌다.


“후지와라 군이 말한 ‘왜곡’은 먼 훗날 힘을 가진 누군가들의 사악한 의도에 따라 일어날 게 아닌가. 물론 저 하시바처럼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운과 때를 잘 만나 귀해진 자가 제 천한 조상들을 포장하는 일이야 늘 있었지. 그자들은 재물로 혹은 권력으로, 심지어 거짓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선동해 이를 관철시키지. 나는 우리가 이를 걱정하고 대비한들 소용이 없을 거라고 보네. 그자들이 그런 짓을 할 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테니까! 그러니… 먼 훗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거짓된 주장을 파훼(破毁: 박살내기)하고, 진실을 찾아내어 밝은 곳에 드러내는 건 그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싶구먼.”


“물론입니다, 스승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위에서 혹은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거짓을 받아들일지, 의구심을 품고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진실을 찾고 확인해 세상에 드러낼지는 후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지요.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때쯤엔 저희는 이미 흙이 되었을 테고요. 그리고 본 소제(小弟)의 생각입니다만, 진실은 언젠가 스스로를 밝은 빛 아래에 드러내기 마련이라 봅니다, 스승님! 어떤 식으로든 말이지요.”


“나도 자네의 생각에 공감하네, 후지와라 군.”     






이 두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이런 한담이나 듣고 있던 임오관은, 일본 땅에서 높으신 분처럼 대우를 받으며 시노부와 천년만년 살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무려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임오관은 ‘경계인(境界人)’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우쳤다.


‘일본인들과 살았어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고, 조선인으로 죽고 싶어도 너무 늦어버린 자! 바로 나 같은 사람이 경계인이지.’


임오관은 오늘도 쇼군과 그의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들에게 일부를 털어놨던 지난 40여 년 세월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목활자 깎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에서 살았던 햇수보다 일본에서 살아온 햇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입 안이 썼다.


“하, 해, 히, 호…. ‘후’를 깎을 차례구나.”


네모나게 깍은 작은 나무토막과 조각칼을 집어든 임오관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대뜸 앞서 만든 활자들을 뒤적거려 몇 개 꺼내더니 소반 위에 펼쳐서 단어 두 개를 만들어냈다.


‘여보’와 ‘임자’였다.


임오관의 마음이 40여 년 전의 제 집으로 돌아갔다.     






“여보! 그까짓 활자가 처자식보다 중요하단 말이오? 아, 툭하면 당신이 매타작 당하게 해서 당신 볼기가 남아나지 않게 만든 물건이잖아요!”


임오관의 아내가 방 바로 앞 툇마루에서 임오관의 바지자락을 잡고 울부짖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던 비를 홀딱 맞다 보니 이런 임오관의 아내는 흡사 무덤 속에서 막 튀어나온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는 금속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임오관의 마음속에 뚜렷이 박혔다.


“당연히 중요하지, 임자! 활자랑 활판이 우리 네 식구 먹여 살리잖아!”


비에 젖어 미끄러운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임오관이 야단치듯 외쳤다.


“하지만 나라님께서도 저 많은 금은보화며 쌀이며 다 놔두시고 몸 하나만 달랑 챙겨 도망가셨다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어서 도망가요! 목숨이라도 건져두면 어떻게든 되겠죠!”


어느새 지들 어미를 따라 나온 두 자그마한 아들과 딸도 어미를 따라서 울고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이 쌍둥이 남매마저 비를 맞으며 앙앙 우는 모습을 보면서 임오관의 마음도 찢어졌다. 하지만 마음을 힘껏 잡고 애써 일갈했다.


“아, 임자! 그래서 우리 네 식구 다 굶어 죽을 일 밖에 더 남아? 그럴 바엔 왜놈들 칼에 죽는 게 덜 고통스럽겠구먼!”


“여보….”


임오관이 신경질을 팍 내자 아내는 기가 팍 죽었다.


자기가 아내에게 야박했다고 여긴 건지 임오관의 말투가 조곤조곤해졌다.


“아, 임자도 생각을 좀 해봐. 나리들 말씀이 이랬단 말이야! 아, 왜놈들 별거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 저놈들 목적이야 약탈인 거고, 약탈 끝날 때쯤 우리 군대가 공격하면 으레 ‘나 잡아봐라!’ 하면서 도망가는 놈들이라고 하셨단 말이야! 그 말인 즉, 빠르면 올 겨울엔 이 난리가 끝날 거란 말이야! 그때 가서 우리 네 식구가 뭘 먹고 살겠어?”


이 물음에 아내는 대답이 궁한지 임오관을 뚱하니 쳐다봤다.


“임자, 난 말이야… 무려 전조(前朝: 고려) 말부터 대대로 활자 만들고 인쇄하는 집에서 태어났잖아. 그래서 호미나 괭이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어! 내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럽지만…, 난 밭이랑에 어떻게 곡식을 심는지도 모르겠고, 내 눈앞의 풀이 잡초인지 곡초(穀草)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니 어느 인심 좋으신 분이 내게 논밭 몇 마지기 냉큼 주시더라도 제대로 농사를 지을 자신이 없단 말이야!”


“그럼 배우면….”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나이에 농사짓는 걸 처음부터 배우라고?”


임오관의 역정에 아내는 그저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임오관도 자기가 너무했다고 여겼는지 누그러진 말투로 애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임자, 활자랑 활판을 우물에 퐁당 하고 담가서 감추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고작 그런 거란 말이야.”


이 말을 들은 아내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내려다가 바로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했다.


“여보, 저 무식한 왜놈들 눈에는 활자든 활판이든 그저 쇳덩이로 밖에 더 보이겠어요? 대궐이며 나리들 댁에는 금은이며 비단이 지천이니, 그런 더 귀한 거 챙기느라 바빠서 거들떠도 안 보겠지요! 그러니 우리랑 어서 가요!”


“아, 닥쳐!”


임오관이 화를 빡 냈다.


원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겁에 질린 두 남매도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임오관은 한숨을 팍 쉬고서 다시 조곤조곤 말했다.


“저 북쪽 고양군(현재의 고양시)으로 가. 거기 고모랑 고모부께서 사시잖아. 당신도 애들이랑…, 철이랑 순이랑 인사드리러 몇 번 가봤잖아! 기억하지?”


“네에, 알았어요. 빨리 따라와요.”


어쩔 수 없어서 다 포기했다는 투로 아내가 말했다.


임오관은 아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시원하게 대구했다.


“늦어도 열흘 뒤엔 말이지…, 우린 다시 함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철이랑 순이랑 데리고 먼저 고양군에 가 있어! 무슨 일 생기면 고모랑 고모부께서 시키시는 대로 해.”

임오관이 싸리를 엮어 만든 대문을 나서면서 했던 이 말이 아내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해준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무려 40여 년이나 속절없이 흘러갔다.




조센 세조 때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 유물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70105/83927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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