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웅진 Aug 19. 2024

오유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임오관은 소반(小盤: 작은 탁자) 위에 펼쳐둔 목활자들을 오른팔을 휘저어 싹 밀어버렸다.


목활자들이 다다미 바닥에 후드득 쏟아졌다.


“임자! 임자! 내가 멍청했어, 임자!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으흐흑!”


소반에 머리를 박고서 통곡하는 임오관을 눈처럼 흰 명주 기모노를 입은 오유키가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지켜봤다.


임오관은 진정했는지 울음을 그쳤다.


오유키는 무릎걸음으로 조용히 다가와 목활자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어서 옻칠한 흑갈색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쇼군과의 면담이 있던 그날 밤 임오관에게 술시중을 들었던 오유키는 첩자이기도 한 쿠노이치(くノ一: 여성 닌자)답게 대화 내용을 열심히 귀에 담은 것 같았다.

임오관이 보기에는 그랬다.

상당히 총명한 아이니까.

그래서 이 목활자가 무엇에 쓰는지도 잘 아는 눈치였다.


‘허허, 나와 시노부 사이에 딸이 있었다면, 딱 오유키만 했을 텐데….’


쇼군은 한 달 전 술자리가 파한 직후 오유키를 후처로 삼으라고 임오관에게 내려줬다.


하지만 임오관은 오유키가 이 늙은이의 어린 색시 노릇이나 한다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당하는 걸 원치 않았다. 세 번이나 혼인한 사내가 되는 것도 싫었다.


임오관과 시노부는 금슬도 좋았다. 옛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마을 노인들이라든가 이웃집 험담하기 좋아하는 아낙들도 시노부가 예전의 두 서방들과 살 때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고 했었다.


‘하긴 다른 인쇄공들도 그렇고,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굽는 도공들도 일본인 마누라와 죽지 못해 산다고들 하니…. 난 복 받은 놈이니까. 그러니 시노부 마음에 대못을 박을 순 없지. 나도 마누라 죽으니까 새장가를 들었다고 꿈에 나타나 원망할지도 모르고. 뭐, 시노부가 그런 속 좁은 여자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오유키를 이 집에 데려온 날 밤 꿈에 시노부가 나타났었다.


귀신이 된 시노부는 임오관이 목활자들을 펼쳐두고 점검하던 소반을 만지작거리며 은근히 이렇게 조곤조곤 말했었다.


‘서방님은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색골이 아니잖아요!’


‘으응, 내가 언제 오유키를 후처로 삼는다 했던가, 이 사람아?’


임오관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시노부가 그 소반을 들어 제 머리를 때릴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래서 임오관은 오유키를 수양딸처럼 대하기로 했다.


“너도 얼른 좋은 사내를 만나서 이 늙은이 곁을 떠나야 할 터인데….”


임오관이 아비처럼 하는 말에 오유키는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리를 곁에서 모시는 게 소녀의 임무입니다.”


오유키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임오관은 ‘제가 하는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통보로 알아들었다.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 내내 감옥 아닌 감옥에서 감시와 제약을 당하고 살아왔기에 마음이 비뚤어진 탓이었다.


‘하긴 한번 도망을 치다 잡혔으니…. 이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거나 신세를 망쳤다지. 그러고 보니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내 맘대로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전부터구나. 자기들이 시킨 일을 일부러 엉터리로 하거나, 하라는 건 아니하고 엉뚱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칼 찬 자가 늘 붙어있었으니…. 어느 구석에든 밀정들이 숨어있고. 하지만 이제는 내게 시키는 일도 없고, 내가 뭘 하든 관심도 가지지 않지.’


임오관은 에도성에서 변소에 갈 때에도 뒤에서 칼을 찬 끄나풀이 따라다니던 게 생각나 몸서리쳤다. 더군다나 이후에 만약 조선으로 귀국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쇼군이 하명한 임무, 즉 임오관을 감시하고 못 도망가게 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오유키는 형장에서 목이 잘릴 것이다.


두 나라 조정 사이에는 분란이 벌어질 것이다. 분명 조선 조정에서는 쇼군한테 조선에서 잡아간 공장(工匠: 기술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송환하라고 들들 볶지 않겠는가.

그런 지경에 이르면 오유키의 일가붙이들도 연좌당하면서 날벼락을 맞으리라. 그뿐이겠는가!


쇼군은 임오관의 처조카들이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기독교인)들과는 연을 완전히 끊었다’는 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리시탄이 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이는 처조카들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공방에서 음란한 책이나 찍어내 먹고 산다고 임오관이 둘러댄 이유였다.


그러나 임오관이 또 쇼군을 실망시킨다면 분노한 쇼군은 처조카들도 믿지 못해 그들이 기리시탄이라는 자백을 고문까지 해서 받아낼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기리시탄들을 적발할 때마다 그랬듯이 아주 잔혹하게 죽이겠지!


그런 비극이 발생한다면 저승에 있는 시노부가 얼마나 속이 터지겠는가! 소중한 남동생의 아이들이라서 제 자식처럼 키운 아이들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러니 오유키를 위해서라도, 처조카들을 위해서라도 얌전히 살자!’


두 팔을 등 뒤로 뻗고 허리를 펴면서 쉬는데 오유키가 술이 담긴 대접을 올렸다.


술은 향이 좋고 투명한 사케였다. 쇼군이 엊그제 인편으로 하사한 어주(御酒)였다. 임오관의 용태가 나날이 안 좋아진다는 보고를 오유키에게서 받았더라나. 조선에 막대한 은을 지불하고 수입한 인삼까지 넣어 만든 ‘약주’니까 임오관 혼자서만 마시라고 했다.


‘하긴 내 나이가 이제 곧 팔순이니,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겠구나.’


대접을 단숨에 말끔히 비운 임오관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서 미소 짓는 오유키에게 말했다.


“오유키! 이 늙은이가 죽으면 화장을 한 뒤에 뼛가루를 쓰시마로 가져가서 부산포 쪽으로 뿌려주렴.”


“부산포 쪽으로 말입니까?”


오유키는 방금 들은 지시를 재확인하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서 되물었다.


임오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조선 땅을 다시 밟고 싶으니까.’


임오관은 오유키가 쇼군을 곁에서 모시던 쿠노이치 노릇을 할 정도로 똑똑하니까 이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여겼다. 자칫 ‘나 또 도망갈 거다!’라고 말하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오관은 슬그머니 일어나 툇마루에 나가 앉았다.


이 집을 사들인 뒤 서북쪽을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든 툇마루였다.


지혜로운 시노부는 서방이 왜 서북쪽을 향해 툇마루를 짓는지를 짐작했는지 ‘왜 돈까지 들여 쓸데없는 짓을 하나요?’ 같은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해가 슨푸성의 천수각(天守閣: 일본식 성에서 탑이나 전망대 역할을 하는 누각)을 향해 뉘엿뉘엿 저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임오관의 입에서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침이 요즘 심해지긴 했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금세 멈추지를 않았다. 문득 황궁 안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다고 쇼군이 말했던 <직지심체요절>이 보고 싶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빼앗아간 그 책을 말이다.


‘제발…, <직지심체요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래, 조선에 두고 온 처자식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고향산천만이라도 영영 다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직지심체요절>만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나브로 심하게 기침을 하는 임오관을 오유키가 뒤에서 무릎을 꿇고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슨푸성의 천수각 https://ko.wikipedia.org/wiki/%EC%8A%A8%ED%91%B8%EC%84%B1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전 16화 임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