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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0. 2024

당창(唐瘡: 매독) 걸린 여인

남강(南江)을 따라 흐르는 비애(悲哀)


여(余)가 영창대군 관련 건으로 폐주(廢主: 광해군)의 미움을 사 부산포에서 귀양살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여를 관리하던 부산첨사도 여의 억울함을 헤아렸기에 여가 사비를 들여 부산포 일대를 유람하는 걸 허했다. 여의 처도 왜란 때 불타고 선대왕(선조) 치세 말기에 재건 후 또 화재가 난 범어사를 보수하는 승려들에게 시주하러 부산포에 내려왔다.


처가 범어사의 주지를 만나 시주하고 여가 얼른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원을 올리던 때였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절의 경내를 둘러보던 여의 눈에 한 여인이 띄었다.


여인은 눈과 손을 제외한 온 몸을 삼베로 싸고 있었다. 손을 잘 보니 종기 같은 걸로 덮여있었고, 눈 주변도 잘 보니 그러했다.

혹시 문둥병자가 아닌가 싶어 겁을 내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늙은 승려가 여에게 알려주었다.


“저 여인은 불쌍하게도 왜국에 끌려가 당창(唐瘡: 매독)에 걸렸습니다.”


“왜국에 끌려갔다니? 임진·정유년의 왜란을 말씀하시오?”


“그렇습니다, 나리. 왜국 대판(大阪: 오사카)의 유곽으로 끌려갔다가 당창에 걸려서 포주에게 버려졌다죠. 대판 일대를 떠돌며 유리걸식(流離乞食)을 하던 중 다행히 선대왕의 명을 받들어 탐적사(探賊使)로 가셨던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께서 구출해오셨습니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살았죠. 그러고 보니 만력 33년(1605년) 봄에 있었던 일이군요. 나무아미타불!”


여는 그 승려와 함께 그녀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더럽다 여겨 본전(本殿)에는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불공을 올렸다. 그녀가 불공을 마치고 뒤로 돌았다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놀랐다.

승려가 안심시키며 여를 소개하니, 여인은 여에게 인사하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저기…, 보살님은 왜놈들에게 끌려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소?”


여는 왜란 때 서해안의 한 섬에 살았기에 왜군을 피할 수 있었다. 할아버님의 친우(親友) 중 왜국 사정에 밝은 분이 계셨던 덕분이다. 그분은 율곡(이이) 선생과도 교분이 있으셨으며, 왜란 중에는 선대왕을 호종하셨다.


그런 분께서 할아버님께 전쟁에 대비하라고 권하셨다고 한다. 왜국에 통신사로 다녀오신 분께서 왜국 우두머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과 행동이 무례하고 수상했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이에 할아버님께서는 가산을 정리하신 다음 온 식솔들을 이끌고 그 섬으로 이사하셨다. 만약 통제공 영감(이순신 장군)께서 왜군이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걸 막지 못하셨다면 여의 가족이 지내던 곳도 왜놈들이 범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여는 왜란 때 참담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송구하여 애써 그들의 이야기를 청취한다.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왜란 내내 사대부의 의무를 행하지 못했던 여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여겨서다.


여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제 이름은 홍련(紅蓮)입니다.


왜란이 일어난 임진년에서 서너 해 전쯤이었던 것 같네요.


그때 진주의 관기(官妓)가 되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비가 계모를 들였는데, 그 여자가 절 팔았습니다.


아비는 밥만 축내던 딸내미 덕분에 술 마시고 노름하는 데 쓸 재물이 생겼다며 좋아했고요.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다양한 예능을 배우며 언니 기생들을 수발했죠.


드디어 쇤네더러 수청을 들라고 행수가 말한 다음 날 왜놈들이 경상도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죠. 임진년 봄이었군요.


왜놈들은 임금님을 잡겠다며 한양으로 급히 북상하느라 진주는 거들떠도 안 봤습니다.


덕분에 임진년 늦가을까지는 탈이 없었죠.


그러거나 말거나 진주목사(김시민 장군)께서는 관민들을 독려해 싸울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허용된 사치품은 오직 시간뿐이라고도 하셨죠.


군사들과 관민들이 성을 수리하고 보강하며, 대장간들에서는 연일 무기를 만드느라 모루에 올려놓은 철물을 망치로 두들겨대는 소리가 밤에도 울렸습니다.


관아에서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변소라든가 마루 밑을 뒤져 분토(糞土)를 모으고 고아 화약을 만들었고요. 덕분에 악취가 온 성을 채웠지만, 화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니까 아이들조차 불평하지 않았답니다.


진주목사께서는 왜놈들이 쓰던 신무기인 조총과 비슷한 무기도 만들어 우리 군사들을 무장시키셨고요. 철물이 부족해 조총을 많이 못 만들었지만, 군사들이 한두 번씩은 쏴보게 하셨기에 성벽 위에서는 날마다 화약 터지는 소리가 울렸죠.


여인들 중에도 몸이 다부지고 건장한 이들은 군복을 입고 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걸 멀리서 보면 여자란 걸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저희 같은 나약한 계집들은 그저 병사들에게 밥을 해주고, 군복과 이불을 빨아주고, 아이들과 함께 깨끗한 천을 손질해 붕대를 만드는 일 따위를 했습니다.


연회 같은 게 없으니 수청을 들어야 할 일도 없었죠.


예, 연륜 있던 여인들이 이런 일을 지휘했죠.


그중에 논개 언니가 계셨습니다.


언니도 관기셨지만 경상우병사(최경회 장군)께서 머리를 얹어주셔서 소실(小室)이 되셨죠.


경상우병사께서 진주목사를 도우시니, 언니도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으신 겁니다.


경상우병사께서 언니를 애지중지하시니 양반 부인들께서도 언니께 함부로 못하시더군요.


그래서 언니는 저희 관기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셨습니다.


나리께서도 옛 월나라 여인 서시를 아시지요?


역시 아시는군요.


아, 스님께선 모르셨습니까?


서시는 월나라 임금님의 밀명을 받고 오나라 왕 부차를 타락시키기 위해 공녀로 바쳐졌다 합니다. 부차가 월나라를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었거든요. 월나라 임금님의 계획대로 부차는 타락하고 오나라는 월나라에 망했죠.


서시는 종종 가슴이 아파 길 한복판에서 찡그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일대의 사내들이 더욱 아름다워진 서시를 보겠다며 앞 다퉈 거리로 뛰쳐나왔다죠. 심지어 사내들이 너무 몰려 성벽이 무너지기까지 했다나요.

이에 다른 여인들도 서시를 본받아 찡그리고 다녔더니, 사내들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을 했다죠.


논개 언니의 아름다움은 서시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진주성 내 경절사 (저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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