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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1. 2024

진주성 공방전

남강(南江)을 따라 흐르는 비애(悲哀)




10월 초에 왜놈들이 성을 포위하고 조총을 쏴대며 전투를 시작했답니다.


무수히 많은 군사들이 부상을 입고 성벽 아래로 실려 내려오거나,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렸습니다.


의원들께서 상처를 째고 철환이나 화살촉을 빼시면, 저희는 언니의 감독 하에 환부를 맑은 물과 깨끗한 수건으로 씻고 붕대를 감아드렸습니다.


소금물로 주먹밥을 뭉쳐 함지박에 담아 이고 성벽으로 올라가 군사들에게 먹이고요.


이고 올라간 물동이가 날아온 철환에 깨지면서 물을 뒤집어 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건 차라리 웃고 넘어갈 추억이죠.


성벽에 오를 때마다 사방에서 신음소리, 화약 터지는 소리, 철환이나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서 오줌도 몇 번 지렸으니까요.

성벽 위에서 밥과 물을 나르다가 죽은 여인들도 여럿이고요.


이렇듯 성안의 군민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니 왜놈들이 기가 막힌 꾀를 냈습니다.


노비로 팔려고 잡아둔 아이들더러 울부짖게 한 거죠. 어서 항복하라면서요.


성벽 너머에서 구슬피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결국 여러 여인들의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논개 언니가 비장하게 일갈하셨죠.


“속지 말거라! 저건 왜놈들의 간계다! 이 성이 함락당하면 여기 있는 아이들도 저 아이들처럼 모두 왜놈들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릴 것이다! 차라리 못들은 척하는 게 낫겠다! 그래야 우리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다음에는 훌쩍이는 여인들을 따로 격리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온갖 수가 안 통하자 왜군은 닷새 만에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진주목사께서 전사하셨죠.

왜놈들이 쏜 철환을 맞고 사경을 헤매시다가요.


불행 중 다행히 저희가 이겼다고 말씀드리니까 환히 웃으시면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진주목사께서 너무 잘 싸우셔서 왜놈들이 복수심을 불태웠던 모양입니다.


후일 저는 오사카에서, 아 그러니까 대판에서 왜인들이 진주목사를 ‘모쿠소’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인들은 언문 중 ㄴ 자나 O 자로 쓸 수 있는 소리 말고는 받침소리(終聲)를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牧使)’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니 ‘모쿠소’라 떠든 거죠.


더 우스운 게 뭔지 아십니까, 나리?


하아, 진주목사 나리를 요괴로 오해한 겁니다.


네,  ‘모쿠소 요괴’라고요!


심지어 이순신 장군도, 거북선도 요괴인 줄 알더군요.


이순신 장군은 ‘토세시’라 불렀는데, 이건 이순신 장군의 생전 직함인 통제사(統制使)를 의미합니다. 거북선은 ‘메구라부네(盲船)’라 불렀는데, ‘장님배’라는 뜻이죠. 아마 거북선의 사방이 막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신들이 거북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까, 안에 있는 조선군도 밖을 못 보리라 여겼나 봐요.


쇤네는 오사카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한 바 있어요.


곽재우 장군처럼 빨간 비단옷을 입은 부잣집 아이가 자기는 서쪽 바다를 지키는 대요괴 토세시라면서 머슴인 것 같은 아이에게 이렇게 외치데요.


“가랏, 메구라부네!”


그랬더니 나무로 만든 솥뚜껑을 등에 멘 머슴아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간 겁니다.


목검을 든 다른 아이들은 그런 머슴아이를 보고 크게 놀란 척하며 “토세시다! 메구라부네를 풀었다! 도망쳐라!”라고 외치면서 사방으로 달아나고요.


자기가 토세시라던 부잣집 아이는 그걸 보며 껄껄 웃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외치더라고요.


“난 이제껏 패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패할 일이 없을 무적의 상승장군(常勝將軍) 토세시다! 감히 서쪽 바다를 넘볼 생각 말거라! 으하하하하하하하!”


정말 기가 막혀서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만큼 이순신 장군이라든가 진주목사의 인상은 왜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것 같아요.

요괴의 모습으로요.


예, 당연히 ‘모쿠소 요괴’를 주인공으로 삼는 놀이도 있더군요.


왜인 광대들은 ‘가부키’라는 놀이를 큰 집에서 성대하게 공연합니다.

오사카에도 가부키 놀이를 보여주는 큰 집이 있었고요.


쇤네도 포주를 따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대개는 ‘용사’라는 작자가 모쿠소 요괴를 무찌르는 내용이었고요.


그런데 모쿠소 요괴의 아들이라는 요괴 소년이 독기를 내뿜는 개구리 요괴를 거느리고 일본을 침공하기도 하더군요.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다면서요.


그걸 보는 내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런 지경이니 왜군도 독이 바짝 올랐었나 봐요.


이듬해 6월 말에는 군대를 단단히 준비해 와서는 진주성을 겹겹이 포위하더군요.


처음 왔을 때보다 세 갑절은 많은 것 같았어요.


이번에는 9일간 싸웠고요.


경상우병사께서는 왜놈들이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겠다는 각오로 임한 것 같다시며 모두의 최후를 예감하셨어요.


그래서 새로 부임하신 진주목사(서예원 장군)와 논의해 마지막 주연을 여셨어요.


쇤네는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청을 들었고요.


군사들을 비롯한 사내들 모두에게 고하를 막론하고 술이 한 사발씩 돌아갔죠.

술을 단 한 방울도 왜놈들에게 넘겨줄 순 없다면서요.


연회 자리에서 나리들은 아무 말이 없으셨고, 쇤네를 비롯한 기생들은 어느새 훌쩍거리고 있었어요.


오직 논개 언니만이 눈을 부릅뜨고 계셨죠.


경상우병사께서는 이런 저희를 휘 둘러보시더니 일장 연설을 하셨답니다.


“우리 같은 사내들은 내일 모두 왜놈들 손에 죽을 것이오. 저 몽고의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칸)과 싸웠던 성들의 군민들이 그랬듯이 말이오. 왜놈들은 작년에 이 성을 함락시키려다가 큰 피해를 입어서 악이 받친 모양이니까요. 허나 놈들이 지난 1년간 보인 행태를 고려하면 젊은 여인들과 아이들은 죽이지 않을 것 같소. 노비로 팔 생각으로 말이오. 그러니…,”


경상우병사께서는 쇤네를 비롯한 기생들을 하나하나 보시더니만….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였느니라. 얼마나 비참한 수모를 당하며 살게 될지가 여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듯하구나. 그렇더라도 함부로 목숨을 끊지는 말거라.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남는 것 또한 저놈들에게, 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에게 복수하는 것과 다름이 없노라!”


그 말씀을 끝으로 주연이 끝났습니다.





진주성 내  디오라마 (저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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