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언니와 쇤네를 비롯한 여인들은 진주목사 나리의 명에 따라 아이들과 함께 관아로 들어갔어요.
밥과 물을 나르고, 얼마 안 남은 붕대를 감아주는 일은 오롯이 부인들에게 맡겨졌고요.
그러고 보면 언니도 부인이셨지만, 젊은 데다 당차셔서 저희들을 통솔하라는 명을 받으셨죠.
몇몇 젊고 예쁜 양반 댁 부인들도 관아에 들어갔고요.
혹시 경상우병사께서 언니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신 건 아닌가 싶네요.
하늘도 슬프셨는지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죠.
그런데 논개 언니가 쇤네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녹옥가락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거예요.
불현듯 쇤네에게 지시했죠.
가락지를 아홉 개 더 모으자고요.
쇤네는 언니와 돌아다니며 가락지를 모았어요.
다들 이젠 끝장이라는 생각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락지를 내놓더군요.
그 가락지들을 언니는 남은 손가락들에도 하나씩 끼웠어요.
쇤네는 언니가 실성을 하신 줄 알았죠.
곧 동문 쪽에서 굉음이 들리더니만 “와아!” 하는 함성과 왜말로 뭐라 뭐라 외쳐대는 소리, 비병소리 따위가 들리는 거예요.
그것이 점점 더 크게 들렸죠.
그럴수록 저희 가운데에서 울음소리가 커지고 지린내가 진동하더군요.
쇤네에게도 그 순간만큼 두려웠던 적이 전무후무하네요.
마침내 관아의 문이 부서지고 왜놈들이 우르르 들어왔어요.
왜놈들은 저희들을 관아 밖으로 끌어내어 물구덩이가 여기저기 생겨난 땅바닥에 꿇어앉히더군요.
한참 뒤 왜장들이 나타났죠.
그놈들 앞에 중년 조선인 사내가 쪼르르 나와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만, 곧 저희를 향해 몸을 돌리고 조선말로 외쳤어요.
“여러분, 기뻐하시오! 이 나리들께서는 이 성의 모든 생령(生靈)을 죽이라는 명을 받으셨소! 하지만 관대하게도 여러분만은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겠다고 하셨소! 그러니 얌전히 이분들의 계집이 되시구려!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 왕후 마마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리실 거요!”
쇤네는 이때 논개 언니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고개까지 푹 숙이고서 저 개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언니가 제게 이렇게 속삭이는 거예요.
“나리께서 어제 하신 말씀을 잊지 마! 넌 꼭 살아야 해, 홍련아!”
그러고서 언니는 고개를 들고 왜장들을 주시했어요.
마치 나무 위에 앉아서 끼니로 쓸 어수룩한 산짐승이라도 찾는 것 같은 한 마리 암표범처럼요.
곧 벌떡 일어나더니 나이 많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왜장을 향해 나긋나긋 걸어 나가더라고요.
마치 유혹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교태까지 부리면서요.
쇤네는 언니가 마침내 실성했구나 싶어 흐느꼈어요.
끝까지 용맹하게 싸우시다 장렬하게 전사하신 경상우병사가 떠올라 속으로 혀도 찼고요.
처음에는 살짝 놀랐던 왜장들도 곧 낄낄거리더라고요.
언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놈도 있었고, 언니가 점찍은 왜장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웃으면서 덕담 같은 걸 지껄이는 놈도 있었죠.
그 왜장 놈도 정말 기뻤는지 크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려 언니를 받아주더라고요.
언니는 그놈을 꼭 껴안더니 입을 맞추고 아양을 떨었어요.
그땐 정말 기가 막혀서 고개를 돌렸죠.
논개 언니는 그놈과 함께 춤까지 추면서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서로를 희롱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왜장들과 왜병들이 간격을 벌려주더니, 저희들까지 한쪽에 몰아세우며 널찍한 공간을 만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