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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2. 2024

 카에데

남강(南江)을 따라 흐르는 비애(悲哀)

      



그 ‘무성황태후’에게 잘 보여 더 낫게 살려는 여자들은 쇤네를 조용하고 은근하게 괴롭혔답니다.


밥과 이부자리에 오물을 뿌리는 건 예사고…,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여자도 있었어요.


“그 몹쓸 관기 년이 대장 나리를 살해한 바람에 우리까지 몰살당할 뻔했지 뭐야! 그러고 보니 너도 그 실성한 관기가 대장 나리를 꽉 잡으려고 가락지를 모을 때 함께했잖아! 너도 공범이야! 공범도 벌을 받아야지!”


이국 땅, 더군다나 적도(敵徒)들의 땅에서 같은 나라 여인들에게 이런 모진 취급을 당하니까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서러웠어요.


하지만 목을 매거나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할 때마다 논개 언니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예, 나리.  저더러  꼭  살라던  말씀이요.

그래서 관뒀답니다.

바닥에 엎드리거나 쭈그려 앉은 채 엉엉 울면서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다른 지역으로 팔려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하던 때였어요.

 대마도가 끔찍했으니까요.


마침 오사카에서 포주들이 왔어요.

아름다운 조선 여인들이 대마도 유곽에 우글거린다는 소식을 들었다나요.

부끄럽게도 말이지요, 쇤네는 이 개똥밭보다 못한 대마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사카 포주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쇤네를 괴롭히던 여자들 몰래 한밤중에 가장 좋은 옷을 빤 다음, 옷이 마르는 동안 지키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답니다.

머리 모양도 왜인 사내들이 좋아하는,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꾸몄고요.

장신구 하나 살 재물이 없어서였기도 했지만요.


다행히 대마도 포주보다 나은 것도 못한 것도 없는 자가 쇤네를 사들였어요.

자기가 가진 재물로는 쇤네보다 나은 여자를 못 사겠다면서요.


그런데 자기가 무성황태후와 같다던 그 여자도 팔렸지 뭡니까.

자칭 무성황태후는 오사카에서도 알아준다는 아주 부유한 포주에게 팔렸어요.


오사카까지 가는 여로의 중간 지점인 하관(下関: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배를 타는데,

 무성황태후는 최고급 노란 비단으로 짠 기모노를 입고, 머리장식도 화려하더군요.

얼굴에 하얀 분도 잔뜩 발랐고요.

 왜란 전에 주워들었던 평양 기생들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왜인들은 이런 최고급 기생을 ‘다유(太夫)’라 부르더군요.

허어, 양반 댁 부인이…. 에구,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조선인 다유가 제 새 주인의 손을 잡고 배를 타려는데 난리가 났어요.


그 다유에게 잘 보이려고 쇤네를 괴롭혔던 계집들이 부두에 죄 엎드려 울부짖더라고요.

개돼지처럼 데굴데굴 굴러 대거나요.

가만 보아하니 다유의 새 주인이 다유만 사들이고 그 계집들은 안 사들인 겁니다.

 쓸모가 없다면서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마님! 요강 비우기도 잘할 수 있어요!”


“이 척박한 섬에서 어떻게 살라는 건가요? 책임져주신다고 했잖아요!”


“양반 댁 규수셨고 부인이셨던 분이 어찌 혼자만 살겠다며 내빼시나요?”


그랬더니 다유가 고개와 몸을 홱 돌리며 그 여자들에게 일갈하더군요.


“흥! 내가 언제 너희들더러 저 박색(薄色) 관기를 괴롭히라 지시하였더냐? 그저 저 관기의 실성한 언니 손에 대장 나리께서 돌아가셔서 애통하고, 그래서 저 박색 관기에게도 관대해질 수가 없다고 하였을 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저  계집들은  다유한테  울며불며  매달리려  했지요.

이를  쓰시마  포주들이  막았고요.

다유는  저  계집들을  보며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을  계속하데요.


"내가 이곳에서 딱히 말벗이 없어 너희와 한동안 말을 섞어줬더니, 그것만으로 내가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의 당여(黨與)가 된 줄 알았더냐? 내가 너희들의 살 길을 마련해주겠다고 언제 증서라도 썼더냐? 이제 알아서 잘 살아가거라!”


그러더니 쇤네를 향해서도 고개를 돌리고 이런 말을 하더이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보고 싶지 않구나!”


다유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제 주인의 손을 즐겁게 잡고 배에 올랐습니다.

가장 좋은 선실로 들어가더군요.

그 후 오랫동안 그 여인을 안 봤습니다.


쇤네도 옷가지 따위를 싼 보따리를 두 손으로 꼭 껴안고서 포주를 따라 배를 탔습니다.


쇤네는 대마도에 오기 전에 부산포에서 판옥선을 봤었어요.

우리 수군이 칠천도 앞바다에서 크게 패했을 때 왜군이 나포한 거라더군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오사카에서 온 배는 판옥선보다도 크더라고요.

당시 오사카 상인들은 멀리 남쪽 섬나라들에 사는 백성들과도 거래했기에 큰 배를 여러 척 갖고 있었다더군요.


하지만 쇤네와 포주가 자리를 잡은 선실은 볕도 들지 않고, 변소처럼 퀴퀴한 냄새까지 났어요.

일각(一刻: 15분)도 안지나 욕지기가 올라오기 일쑤였기에 잘 때만 거기 머물렀지요.

결국 하관을 거쳐 오사카에 닿을 때까지 갑판에 머문 때가 더 많았네요.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갑판에 마련한 선실 안에서는 종종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리더군요.

 가만히 들어보니 다유의 것이었어요.

그 여자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는구나 싶어서 쓴웃음이 나더군요.


그러고 보니 어느 선비님이 말씀하셨다죠.

사람이란 자기가 처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짐승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요.

게다가 쇤네더러 죽지 말라던 논개 언니의 말씀과, 살아남는 게 왜놈 우두머리에게 복수하는 거라던 경상우병사 나리의 말씀도 떠올랐어요.

그래서 이 지옥 같은 환경에 적응한 한 마리 짐승이 되어보자고 결심했죠.


오사카의 유곽에서 온 몸과 머리를 가꾸고 새 옷을 받았죠.

포주는 ‘역시 옷이 날개’라면서 쇤네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하지만 역시나 적국 본토에서 창기의 삶에 적응하기는 참 힘들었어요.

다행히 곧 의지할 사람을 하늘이, 어쩌면 논개 언니께서 보내주셨어요.

 ‘카에데’라는 소녀였죠.


예, 나리.

카에데는 왜녀였어요.

아비가 왜된장을 만들어 왜군에 납품하는 공장(工匠: 기술자)이었다죠.

헌데 관헌들에게 뇌물을 제때 바치지 않아서 납품 권한을 빼앗긴 거예요.

수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왜된장을 백성들에게라도 내다 팔아 처분하려는데, 그쪽 수요는 이미 다른 이들이 장악해서 파고들 틈이 없었다죠.

콩장수, 소금장수가 매일 무뢰배들을 달고 찾아와서 대금을 내놓으라고 을러대는데 어쩌겠어요?

결국 눈치 빠른 카에데가 유곽에 몸을 팔아 재물을 만든 거죠.

어쩐지 <심청가>가 떠올라 눈물이 나오더군요.




진주성 내에 전시된 대장군전을 장전한 총통들 (저자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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