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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2. 2024

거지 여인

남강(南江)을 따라 흐르는 비애(悲哀)

        



쇤네와 만났을 때 카에데는 우리 나이로 열두세 살밖에 안된 아이였어요.

카에데의 뜻이 ‘단풍나무’라고 알려주면서 쇤네에게 붙임성 있게 굴더군요.


쇤네더러 ‘홍련’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에 ‘붉은 연꽃’이라고 대답해줬더니, 왜말로는 ‘구렌(ぐれん)’이라고 읽는다더라고요.

저는 그냥 ‘홍련’이라 불러 달라 했어요.

 저도 ‘단풍나무’라고 부르지 않겠다면서요.


함께 지내면서 카에데는 쇤네에게서 조선말도 배웠어요.

예를 들면 ‘언니’ 같은 거요.

그러니까 카에데는 저를 ‘언니’라 부르기 시작했죠.


카에데가 영리해서 조선말을 상당히 익혔을 때쯤 포주가 기막힌 생각을 했어요.

쇤네와 카에데를 양반 댁 부인과 아씨로 꾸민 거죠.

조선에서 잡아왔다는 귀부인과 아씨를 품어보려는 머저리들이 줄을 서니까 포주는 크게 기뻐하더군요.

카에데도 날마다 예쁜 조선옷을 입고 장신구를 착용하니 좋다고 했고요.

쇤네는 그러려니 했어요.

적국에 적응한  한  마리  짐승이 되었으니까요.


쇤네는 대마도에 머물 때 태조대왕 시절에 끌려왔던 이의 자손이라는 여인에게서 자궁 안쪽을 망가뜨려 임신을 막는 약을 구해 먹었어요.

왜남(倭男)의 아이, 더군다나 아비를 모르고 살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카에데는 그 어린 나이에 덜컥 임신을 했어요.

카에데 같은 어린아이를 좋다고 찾는 왜남들이 추잡했지만, 임신한 카에데더러 계속 사내를 받게 하는 포주는 더욱 역겨웠죠.


더군다나 포주는 풍신수길의 아들과 덕천 씨(德川 氏: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왜국 전체를 놓고 일전을 벌이던 ‘세키가하라’라는 곳에서 왜병들을 상대로 장사하겠다면서 저희를 거기까지 끌고 갔어요.


전투가 포주의 예상보다 급속히 전개되어 장사를 할 수 없었지만, 쇤네는 아주 좋은 걸 봤어요. 산 중턱에서요.

진주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학살한 우키타 히데이에 그놈이 궤주하는 걸 본 겁니다!

아비 덕에 왜군을 잘 알던 카에데가 우키타의 깃발을 알려줬거든요.


하지만 전투에서 울린 화포의 굉음에 놀란 카에데는 조산(早産)을 했고, 세키가하라에서 아기와 죽었어요.

카에데 모자를 묻어주고 쇤네가 우울해하던 어느 날, 웬 장님 여자가 유곽에 구걸하러 왔어요.


마침 찬밥이 있어 동냥그릇에 담아주는데, 웬걸! 바로 그 다유였어요!

일부러 다른 조선 여인인 척하고서 어쩌다 장님이 됐냐고 물었죠.

대마도에 남겼던 수하 중 하나가 기어코 찾아와 진한 잿물을 자기 눈에 뿌렸다더군요.

포주와 가부키를 보고 나올 때에요.

다유가 제 권속(眷屬)들에게 남긴 배신감이 얼마나 큰 원한이 되었는가 싶어서 몸서리를 쳤죠.


이때 다유도 쇤네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밥을 줘서 고맙다고만 하고서 냉큼 사라지더군요.

<아리랑> 같은 걸 흥얼거리는 등 살짝 실성한 것 같기도 했어요.

아마 난데없이 장님이 된 데 놀라 실성을 했으니 포주에게서 버림을 받았겠죠.


그 일을 계기로 ‘이제 내가 잃을 건 오직 목숨뿐이다’라고 여긴 쇤네는 수많은 왜남들을 타락시키려고 노력했어요.

서시가 부차왕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죠.


수많은 왜남들이 쇤네와 교접하기 위해 포주에게 재물을 바치고, 쇤네에게도 따로 선물을 바치더군요.

덕분에 다유처럼은 아니어도 조선에서 관기로 살 때보다 더 잘 먹고 살았죠.

그러다 당창에 걸려 유곽에서 쫓겨났어요.

머저리들에게서 받아뒀던 선물로 1년 정도를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송운대사를 뵈었죠.






홍련 보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얼마 뒤 홍련 보살의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여는 범어사의 승려들과 함께 그녀의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몇 년 뒤 유골을 수습해두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여는, 처와 함께 상경하다가 진주성에 들렀다.

 여가 처와 함께 촉석루에 서서 남강을 내려다볼 때 마침 비가 구슬피 내리고 있었다.

여는 홍련 보살이 승려들에게 남겼던 유언대로 유골이 담긴 단지를 남강에 던졌다.

왜놈들이 논개 부인의 시신을 처분했으리라 여겨지는 남강에 말이다.

처가 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흐느끼고 있었다.






진주성 내 경절사 입구 (저자 직접 촬영)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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