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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2. 2024

어느 100세 노승의 이야기

불국사의 십자가

       


태조께서 이 고려를 세우신 지 20여 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경주 토호(土豪)의 자제이자 태종무열대왕(김춘추)의 자손이신 김연우 공께서는, 그해에 기인(其人)으로 뽑혀 태조를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공은 개경까지 가는 길에 해를 입지 않고 태조를 잘 모시도록 도와주십사 기원을 드리려고 불국사에 기도를 올리러 가셨다.


마침 한 노승과 방을 함께 쓰시게 되었다.

노승은 공이 보시기에도 족히 100세가 넘었을 듯했다.

노승은 전조의 폐주(廢主) 궁예와도 이야기를 나눴었으며, 태조께서 궁예의 장수이실 때 뵌 적이 있다고 했다.

이에 공께서 신기해하시며 태조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으시니, 노승이 대답했다.


“소승이 동자승일 때 보고 들은 걸 들려드리고자 하옵니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한 무렵에 이 땅으로 망명해왔으며, 저 석굴암을 지은 석공의 이야기지요.”


이 말에 공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셨다.


“석굴암이라면 김대성 공께서 생전에 지으신 곳 아니오? 석굴암을 완성하시고 꼼꼼하게 둘러보신 뒤 비로소 졸하셨다고 외가 어른들께서 말씀하셨소.”


공의 자당(어머님)께서는 김대성 공의 직계자손이셔서 공 또한 김대성 공의 일을 잘 아셨다.

아마 공께서는 노승이 당신을 조롱하거나 노망이 들었나 의심하신 것 같다.


이에 노승이 크게 웃으며 반문했다.


“공자(公子)께서는 김대성 공께서 직접 정과 망치를 들고 저 석굴암을 다 지으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제야 ‘아차!’ 싶으셨던 공께서는 노승에게 사과한 뒤 이야기를 청했다.


노승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소승이 그 석공 ‘안(安) 선생’을 처음 만난 해가… 아마 김대성 공께서 석굴암 공사에 착수하신 지 다섯째 해쯤이었을 겁니다.

당나라에 유학을 가셨던 부야 스님이 귀국하시면서 모셔왔지요.


집안 시조가 서역(西域) 출신이고, 대대로 석굴을 파서 암자를 만들거나 바위산 밑 수로를 관리했다더군요.


부야 스님도 당나라에 계실 때 석굴암 공사 소식과 김대성 공께서 솜씨 좋은 석공을 구하신다는 소식을 받으셨다고 하셨지요.

 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김대성 공께 석굴암 공사는 중요했으니까요.


그 해에 당나라는 서역인 역적 안록산이 난을 일으켜 혼란했습니다.

고구려인이지만 토번(티벳)을 정복한 공을 인정받아 대장군이 된 고선지라는 이마저 안록산과 모의했다는 모함으로 처형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정작 안록산도 황제의 애첩 양씨의 오라비이자 재상이던 간신의 미움을 사, 이에 황제께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거라는 소문도 돌았고요.

 뭐, 오늘날에는 안록산이 양씨의  출중한 미모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고도 하지만요, 하하하!


각설하고, 안록산 때매 본래 조상이 당나라 사람이 아닌 자들, 특히 서역인들은 당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사서 목숨마저 위태로웠습니다.

그나마 안 선생의 집안은 시조 때부터 대대로 당나라 집안들과 통혼했기에 대개 티가 나지 않았다고 했어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나라 원주민인가보다’ 했더랍니다.


허나 안 선생은 시조가 환생한 듯이 너무 눈에 띄었답니다.

소승이 보기에도 얼굴에서 서역인 티가 역력했고요.

그렇게 머리카락이 누런 사람은 소승이 10여 년 전에 벽란도에서 다시 보기 전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안 선생이 해를 입을까봐 조모께서 좌불안석이 되셨다지요.

그래서 그 댁 어른들은 안 선생을 신라로 보내기로 했다더군요.

신라원(新羅院)을 통해 부야 스님을 소개받았고요.


안 선생의 시조는 이 세상 서쪽 끝에 있다는 대진국(로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파사국(페르시아)과 충돌이 벌어졌을 때 시조는 포로가 되었다지요.

대진국 군대에 소집되기 전에 석공으로 일했던 시조는 파사국 동쪽의 제방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다더군요.

헌데 한 해도 못가 귀상국(쿠샨: 현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군대가 침입해 파사국 백성들을 잡아갈 때 그도 끌려갔답니다.

 그 뒤 귀상국 동북쪽의 고창(투르판)에 배치되었고, 거기서 암자를 만들고 수로를 관리하셨다고 했어요.


‘이제는 뿌리를 내릴 수 있겠거니’ 했더니만, 아- 웬걸요!

고창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의 호인(오랑캐)들이 침범해 주인이 수시로 바뀌더니만, 급기야 동쪽의 한나라 군대가 호인들과 싸우면서 고창까지 온 겁니다.

 이로써 고창은 한나라 땅이 되었고요.

시조는 한나라 고관을 찾아가 사정하여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관의 권유로 한나라에 귀화하면서 ‘편안할 안’ 자를 성으로 삼았고요.

그 연유를 안 선생의 집안 어른들은 대진국 왕을 한나라 때 ‘안돈왕(安敦王)’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그러셨다나요.

고관이 그걸 알고 붙여줬다고도 하고요.


안 선생이 당나라를 떠날 때 나이가 스물을 넘었다고 했지요.

안  선생의 처는 안록산이 난리를 일으키기 직전에 병으로 죽었고요.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이미 있었다지요.

두 어린 남매는 다행히 당나라 사람들과 닮아서 집안 어른들이 키우기로 했습니다.

아비를 따라가면 힘이 들 거라면서요.

 허나 아비가 영영 떠날 걸 알아차렸는지 난리가 났다더군요.

이에 집안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지요.


“어린 자식들마저 아비 때매 모진 삶을 살 순 없지 않느냐!”


그러면서 어서 떠나라고 하셨답니다.




페르시아에서  로마군  포로들이  지은  댐  겸  다리의  유적  https://en.m.wikipedia.org/wiki/Band-e_Kaisar



둔황의  석굴(막고굴)  https://www.mogaoku.net/Stories-of-Mogaoku/2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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