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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1. 2024

논개

남강(南江)을 따라 흐르는 비애(悲哀)


논개 언니와 쇤네를 비롯한 여인들은 진주목사 나리의 명에 따라 아이들과 함께 관아로 들어갔어요.


밥과 물을 나르고, 얼마 안 남은 붕대를 감아주는 일은 오롯이 부인들에게 맡겨졌고요.


그러고 보면 언니도 부인이셨지만, 젊은 데다 당차셔서 저희들을 통솔하라는 명을 받으셨죠.


몇몇 젊고 예쁜 양반 댁 부인들도 관아에 들어갔고요.


혹시 경상우병사께서 언니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신 건 아닌가 싶네요.


하늘도 슬프셨는지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죠.


그런데 논개 언니가 쇤네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녹옥가락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거예요.

불현듯 쇤네에게 지시했죠.

가락지를 아홉 개 더 모으자고요.


쇤네는 언니와 돌아다니며 가락지를 모았어요.

다들 이젠 끝장이라는 생각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락지를 내놓더군요.

그 가락지들을 언니는 남은 손가락들에도 하나씩 끼웠어요.

쇤네는 언니가 실성을 하신 줄 알았죠.


곧 동문 쪽에서 굉음이 들리더니만 “와아!” 하는 함성과 왜말로 뭐라 뭐라 외쳐대는 소리, 비병소리 따위가 들리는 거예요.

그것이 점점 더 크게 들렸죠.


그럴수록 저희 가운데에서 울음소리가 커지고 지린내가 진동하더군요.

쇤네에게도 그 순간만큼 두려웠던 적이 전무후무하네요.


마침내 관아의 문이 부서지고 왜놈들이 우르르 들어왔어요.

왜놈들은 저희들을 관아 밖으로 끌어내어 물구덩이가 여기저기 생겨난 땅바닥에 꿇어앉히더군요.


한참 뒤 왜장들이 나타났죠.

그놈들 앞에 중년 조선인 사내가 쪼르르 나와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만, 곧 저희를 향해 몸을 돌리고 조선말로 외쳤어요.


“여러분, 기뻐하시오! 이 나리들께서는 이 성의 모든 생령(生靈)을 죽이라는 명을 받으셨소! 하지만 관대하게도 여러분만은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겠다고 하셨소! 그러니 얌전히 이분들의 계집이 되시구려!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 왕후 마마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리실 거요!”


쇤네는 이때 논개 언니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고개까지 푹 숙이고서 저 개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언니가 제게 이렇게 속삭이는 거예요.


“나리께서 어제 하신 말씀을 잊지 마! 넌 꼭 살아야 해, 홍련아!”


그러고서 언니는 고개를 들고 왜장들을 주시했어요.

마치 나무 위에 앉아서 끼니로 쓸 어수룩한 산짐승이라도 찾는 것 같은 한 마리 암표범처럼요.


곧 벌떡 일어나더니 나이 많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왜장을 향해 나긋나긋 걸어 나가더라고요.

 마치 유혹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교태까지 부리면서요.


쇤네는 언니가 마침내 실성했구나 싶어 흐느꼈어요.

끝까지 용맹하게 싸우시다 장렬하게 전사하신 경상우병사가 떠올라 속으로 혀도 찼고요.


처음에는 살짝 놀랐던 왜장들도 곧 낄낄거리더라고요.

언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놈도 있었고, 언니가 점찍은 왜장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웃으면서 덕담 같은 걸 지껄이는 놈도 있었죠.

그 왜장 놈도 정말 기뻤는지 크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려 언니를 받아주더라고요.


언니는 그놈을 꼭 껴안더니 입을 맞추고 아양을 떨었어요.

그땐 정말 기가 막혀서 고개를 돌렸죠.


논개 언니는 그놈과 함께 춤까지 추면서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서로를 희롱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왜장들과 왜병들이 간격을 벌려주더니, 저희들까지 한쪽에 몰아세우며 널찍한 공간을 만들더군요.

 둘이서 춤을 출 수 있게 해주려고요.

왜놈들은 낄낄거리고, 저희는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차거나 욕을 했어요.

쇤네도 자괴감과 절망감이 들더군요.


“저년은 경상우병사 영감의 첩이 아니던가! 천하고 천한 관기에 불과한데도 우병사 영감께서 그토록 아껴주셨는데, 저런 짓이나 하다니!”


“영감께서 당장 벌떡 일어나 저 두 연놈들을 찢어버리실 거야!”


양반 댁 부인들이 이렇게 외치며 분노를 터뜨리시더군요.


하지만 쇤네는 논개 언니가 그놈과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서 언니가 뭘 하시려는지 알아차렸어요!

 언니는 촉석루 바위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바위 아래에서는 남강이 넘실넘실 흐르는데…. 너무나 위험해서 애들은 못 가게 막고, 어른들도 밤에는 근처에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었어요.

그런 곳으로 언니가 왜장을 끌어안고 춤을 추며 접근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속으로는 ‘언니, 안 돼요!’라고 외쳤어요.

하지만 그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예요!

마치 누군가가 쇤네의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이에요.

곧 사내의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촉석루 쪽에서 들리더니, 왜놈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어요.


곧 왜병 한 무리가 촉석루 바위 근처 남강 강안으로 달음박질을 치고, 또 다른 무리는 장검을 빼들고서 저희를 죄다 관아로 몰아넣더라고요.

마치 요괴라도 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면서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떼어 내 어딘가로 끌고 가더라고요.

자기 아이들이 혹은 어린 동생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걸 보면서 몇몇 여인들은 창자가 끊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파하더니 결국 혼절하고 말았죠.


왜놈들의 말을 통역하던 중년 사내가 한밤중에 저희들을 찾아왔어요.


“저들 대장이 죽었소. 아까 대장을 유혹하던 그 미녀가 대장을 끌어안은 채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오. 대장은 갑주를 입은 데다 미녀가 열 손가락 모두에 가락지를 끼고서 깍지를 낀 바람에 풀려나지 못했소. 이렇듯 미녀가 무게추 역할을 했으니 대장은 익사하고 말았소."


이때  역관은  살짝   미소를  짓더이다.

허나  곧  한숨을  팍  내쉬고서  이리  말하더군요.


"지금 저자들은 화가 단단히 나 있소. 이제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일 아침에는 모두 이 건물 째로 재가 되든가, 혹은 뭐… 더 이상은 사내인 내 입으로는 말을 못하겠소.”


“그 대장… 지위가 높았나요?”


쇤네가 이렇게 물었죠.


날이 밝는 대로 죽거나 끔찍한 일을 당할 판에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혹시 논개 언니가 개죽음을 한 건 아닌가, 표적을 잘못 노렸나, 아마 그래서 물었던 것 같기는 해요.


역시나 사내도, 다른 여인들도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마치 오물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서 쇤네를 보더군요.


하지만 사내는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죠.




의암. 주변이 절벽이라 위험 경고 표지판이 있다. (작가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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