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는 대로변에 있는 건물의 기원 입간판을 올려다보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제 장외 발매소에서 만난 남자가 한 사내와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치우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 다시 바둑에 집중했다. 그의 기발한 수에 치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자는 몇 집을 이겼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네요. 다음에 다시 두죠.”
내기 바둑이었던지, 사내는 5만 원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우는 남자의 실력이 뛰어난데도 일부러 근소한 차이로 이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미끼 바둑이었다.
기원을 나서며 남자가 대중식당으로 가자고 했지만, 치우는 억지로 그를 한정식집으로 이끌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남자의 자리에 방석을 깔고, 종업원에게 주문과 함께 팁을 건넸다. 남자는 예상치 못한 금액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치우는 팁을 줄 만한 장소에서는 항상 먼저 주는 편이었다. 어차피 줄 거라면 처음에 주는 것이 대접받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제가 자식뻘 되는데 말씀을 놓으시지요. 어르신께서 그러시니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남자는 나이로 보아 충분히 말을 놓을 수 있음에도 여전히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초면인데… 그럼 이제부터는 말을 놓겠네.”
치우의 예의 바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경계심을 풀었다. 술이 몇 잔 돌자,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마철영, 나이는 65세, 경마장에서 일명 마 박사로 통한다고 했다.
“젊은이가 경마에서 돈을 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지옥행 열차라고 했던 거 기억하나?”
치우는 ‘사실은 그게 아닌데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부터 그의 인생여정을 듣고, 그를 맛작업 파트너로 선택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치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과거에 대해 물었다. 서로의 과거를 나누면 친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함께 목욕을 한 후 동지애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마 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굴곡진 삶의 첫 장을 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유지였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바둑을 접했을 때, 그 매력에 푹 빠졌어. 그래서 법대를 희망하시는 부친과 갈등이 생겼지. 아버지께서 명문 경기고에 가면 바둑을 허락하겠다고 하셔서 열심히 공부해 합격했어. 고향에서는 잔치가 열렸고 부친도 매우 기뻐하셨지. 그 당시 경기고에 입학하는 것은 곧 서울대에 가는 것과 같았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떨렸다. 서울로 유학 와 다시 바둑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한·일 친선 학생 바둑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다고 한다. 이때 동기생들이 조훈현, 서봉수 등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서울대 법대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선배를 따라 경마장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경마의 스릴과 쾌감은 바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고.
그때부터 자신의 머리를 믿고 바둑 공부하듯이 경마에 파고드니 점차 적중하게 되었고, 결국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별한 후 재혼하셨지. 근데 내가 경마에 미쳐 있을 때 부친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새어머니는 여리신 분이라, 외아들인 내 말을 무조건 믿으셨지.”
그 후 마 박사는 물려받은 재산을 마음대로 주물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시작했지만, 본전을 만회하려다 보니 베팅이 점점 커졌고 결국 그 많은 재산도 몇 년을 못 가 모두 날려버렸다고 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어떤 놈인지 아는가? 아내가 딸을 낳을 때도 경마장을 지키고 있었던 산증인이었지. 참으로 한심했어….”
치우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른 말을 돌렸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한때 나는 예전의 바둑 실력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기 바둑을 두었어. 어떤 날은 몇억을 벌기도 했지만, 그 돈은 전부 경마에 들어갔지. 이제는 그런 일도 얼굴이 알려져서 힘들어.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승률도 떨어져서 전주들이 나를 부르지 않아.”
치우는 사채업 전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내기 바둑에도 전주가 있다는 말에 놀랐다.
“바둑에도 전주가 있나요?”
“한 판에 몇천만 원 이상의 내기 바둑은 대부분 뒤에 전주들이 있어. 나 같은 선수를 고용해서 상대와 대결하는 거지.”
“이기면 어떻게 되고, 지면 어떤가요?”
“이기면 보통 전주가 8, 선수는 2로 나눠. 만약 지면 선수는 책임이 없지만, 다음에 전주가 나를 쓰지 않아. 여기서도 프로의 생존 법칙이 적용되니까. 거액이 걸리다 보니 사기 바둑도 빈번하고 위험한 사고가 따르곤 해.”
“사기 바둑이라니요?”
“예전에는 급수를 속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두었지. 근데 지금은 첨단 장비를 이용해 사기 바둑을 두는 경우가 많아. 나 같은 늙은이의 머리로는 사기꾼을 따라갈 수가 없어.”
“첨단 장비라니요?”
“선수의 몸에 기계를 장착하고 단추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이를 통해 다른 장소에 있는 고수가 모니터에 비친 바둑판을 보면서 훈수를 해주지. 선수는 귓속의 특수 이어폰으로 고수의 조언을 들으며 두는 거야. 이런 사기 바둑에서는 상대방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월등한 고수와 싸우는 건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 이렇게 진화한 내기 바둑에서 나 같은 퇴물은 은퇴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지금은 동네에서 푼돈 내기 바둑으로 용돈을 벌고, 딴 돈으로 경마장에서 말밥을 주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
마 박사의 얼굴은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치우는 그의 왼쪽 손가락 움직임이 어색한 것을 보고 자주 눈길이 갔다.
“이제야 눈치챘나 보군. 이건 의수야. 과거에 사기 바둑의 유혹에 빠져 손가락을 잃었지. 사기꾼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게 되었어. 하지만 누굴 원망하겠어? 모두 나의 자업자득이니까.”
그는 부끄러운 듯 손을 탁자 아래로 슬그머니 내리고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내기 바둑에서 수없이 이겼지만, 경마만큼 이기기 힘든 도박은 없는 것 같아. 변수가 너무 많거든. 물론 지금은 돈도 없지만 경마를 취미로 하다 보니 매번 본전이야.”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젊은 시절 경마와 내기 바둑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지. 그로 인해 집안을 돌보지 못해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어. 고생만 한 아내는 치매로 요양병원에 있고, 일찍 남편을 잃은 딸은 파출부로 어렵게 살고 있어. 죄책감 때문에 한참 동안 못 본 지 오래야.”
마 박사는 눈물을 훔쳤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치우가 본론을 꺼냈다.
“마 박사님, 혹시 마떼기에 대해 잘 아세요?”
“마떼기라… 경마를 오래 한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지. 나도 한때 거기서 큰 손해를 봤어. 경마장은 한 경주에 상한가가 있지만, 그곳은 무제한이야. 그래서 꾼들은 불법인 걸 알면서도 마떼기장으로 몰리는 거지. 본장에서도 은연중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본장에서 어떻게 하는데요?”
“직접 말 상태 등을 보고 전화로 구매해.”
치우는 과천 경마장에 갔을 때 건달인 듯한 남자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중 한 남자가 흰색 셔츠 속으로 드러난 문신이 섬뜩해 보이는 젊은 사내에게 말했다.
“거기 상환선 얼마냐?”
“형님, 1억입니다.”
“전화해서 5구좌 상한선 때려!”
젊은 사내는 어디론가 정신없이 전화를 걸었다.
마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모습이 마떼기 같았다. 이어 그의 입에서 마떼기에 대한 실상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작업에서 경험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 드디어 치우가 최종 선택의 질문을 던졌다.
“마 박사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내 꿈은 치매에 걸린 아내의 요양비와 단칸방에 사는 딸에게 작은 연립주택이라도 마련할 돈을 주는 거야.”
치우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보람 있는 작업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작업인데?”
경마장에서 처음 만난 사이에 갑작스러운 제안에 마 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한 달만 작업하시면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왜 필요한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마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인데?”
치우는 이 맛작업을 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경청하던 마 박사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런 명분이라면 하겠네.”
“이 작업에는 고 선생과 창고라는 분이 함께할 겁니다. 마 박사님의 배당금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만약 누설하신다면 이 계약은 무효가 됩니다.”
마 박사는 그의 일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치우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연놈들은 제 가슴에 피멍을 남기고 심장에 비수를 꽂은 자들입니다.”
마 박사는 시장에 들러 순대와 소주를 사서 씩씩한 걸음으로 반지하방에 들어섰다. 축축한 벽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이 상황이 꿈인가 싶어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프다. 이건 분명 꿈이 아니다.
“하늘에서 마지막으로 아내와 딸에게 속죄하라고 천사를 보낸 것이 틀림없어. 그래, 맛작업이 잘 되든 안 되든 난 손해날 게 없으니 무조건 베팅하는 거야!”
설탕을 탄 듯 이런 맛있는 술맛은 난생처음이었다. 곧 그는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