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군을 포섭하다 - 2

by 이인철


“여보, 점심 먹고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해요.”

“나 약속이 있어.”

한가로운 일요일, 해외 출장 중인 친구를 핑계로 거실을 나서는데, 양푼에 비빈 밥을 입에 가득 물고 오물거리는 아내가 나를 바라본다. 무릎이 드러난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습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줌마의 품새다.

“언제 들어올 거야?”

“나가 봐야 알지.”

나는 시무룩한 아내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경마장으로 향했다. 그날도 경마장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자정까지 그렇게 놀면서 아내에게서 몇 번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고 배터리를 빼버렸다. 새벽 2시쯤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조용히 욕실로 가려는데,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친구들이랑 술 한잔 했어. 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혀서 약 좀 사 오라고 전화했는데….”

“아, 배터리가 떨어졌어. 병원 갔다 왔어?”

“아니.”

여러 번 혼자서 찔렀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병원에 갔어야지. 미련퉁이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이 작용했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따졌을 텐데, 그럴 힘도 없는 듯했다. 그저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내는 진료비가 아까워 이제 괜찮아졌다고 애써 웃었다. 그리고 검사를 받으라는 내 권유를 뿌리치고 병원을 나갔다.

다음 날 출근할 때, 아내가 이번 추석에 친정에 가고 싶다고 했다. 노발대발하실 엄마를 떠올리며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15년 동안 그렇게 이기적으로 대했으면 충분하지. 이제 자기는 당신 집으로 가고, 나는 우리 집으로 갈게.”

아내는 큰소리친 대로 추석에 친정으로 가 버렸다. 혼자 고향에 가니 엄마는 세상에 며느리가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며 나를 꾸짖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 없이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여보, 사실 나, 명절에 친정에 간 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정밀 검사를 받았어. 당신이 한 번만 전화했어도 알았을 텐데, 그렇게 해주길 바랐는데….”

아내의 병은 단순한 위염이 아니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지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내가 위암이라고? 이미 전이가 되어 손 쓸 수 없다고?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야 할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문을 열었을 때,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을 걸레질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 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하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는 아이들에게 공부와 건강에 대해 수없이 해온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더 이상 아내를 바라볼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여보,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 있는 곳에 가볼까?”

“코스모스?”

“그냥 가고 싶어. 거기서 꽃도 보고 당신과 함께 걷고 싶어….”

아내는 남은 시간 동안 비싼 물건을 사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대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꽃이 만개한 길을 같이 걷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 바쁘면 할 수 없고….”

“아니야, 가자.”

가을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비쳤다. 우리는 코스모스가 가득한 들판으로 갔다. 아내에게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걸었다.

“여보,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뭔데?”

“우리 적금 말고도 또 있어. 3년 동안 부은 거야. 통장은 싱크대 두 번째 서랍에 있어. 그리고 나 생명보험도 가입했어. 작년에 친구가 권유해서 들었는데, 잘한 것 같아. 꼭 확인해 줘….”

“당신, 도대체 왜 이래?”

“부탁 하나만 할게. 올해 적금 타면 우리 엄마께 300만 원 정도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아서 틀니를 해야 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는 도와줄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런 아내를 어떻게 떠나보내고 살아가야 할까?

아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요즘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것을 부쩍 좋아한다.

“여보, 15년 전 당신이 프러포즈할 때 했던 말 기억나?”

“내가 뭐라고 했지…?”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이 너무 닭살 같아서 싫다고 했잖아?”

“그랬나?”

“그전에도 그 후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거 알아? 가끔은 그 말이 듣고 싶기도 해.”

아내는 곧 잠이 들었다.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나도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보, 오늘 우리 장모님 뵈러 갈까?”

“….”

“장모님 틀니는 연말까지 미룰 필요 없이 지금 가서 해 드리자.”

“….”

“장모님이 내가 가면 좋아하실 텐데… 여보, 안 일어나면 안 간다! 여보? 여보…”

기뻐해야 할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었다. 이제 아내는 숨소리도, 웃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어젯밤 이 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후회한다고….

고개를 숙인 얼굴에서 눈물이 닭똥처럼 떨어졌다.


잠시 후 감정을 가다듬은 창고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재혼한 아내가 착해요. 자기 자식이 아닌 두 아이를 정성껏 키워주는 고마운 사람을 만났죠. 그래서 경마도 끊고 오로지 일에만 전념했어요.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질 즈음, 악마의 유혹이 들려왔어요.

‘그래, 소액으로 조금씩만 하자.’

이렇게 시작했지만 결국 그동안 피와 땀으로 모은 돈을 모두 잃게 되었죠. 그런데도 경마를 끊지 못하자 잦은 다툼이 생겼고, 아내는 참다못해 보름 전에 집을 나가 쉼터에 머물고 있어요.

저도 30대 초반에는 전도양양하고 거칠 것이 없었죠. 그런데 친구를 따라 경마장에 간 것이 악마의 늪에 빠지는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경마를 한 지 10년이 넘도록 가정과 친척의 경조사도 외면하고 오직 경마에만 몰두했죠. 일산의 35평 아파트와 좋은 직장도 잃었고, 심지어 카드와 은행 대출, 사채까지 끌어다 베팅했어요. 그러다 결국 신용불량자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되었죠.

그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본 결과, 경마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 같아요. 이제는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소중한 가족을 지키고 싶습니다. 내일 아내를 만나러 쉼터에 갈 예정입니다. 아내의 의지가 강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혼만은 피하려고요. 제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치우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경마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제 핸드폰 번호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인연일지도 모르겠네요.”

치우의 매너와 여유를 느낀 두 사람은 기꺼이 자기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이로써 그는 고 선생과 창고의 포섭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4화아군을 포섭하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