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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을 물색하다 - 3

by 이인철

좁은 공간은 수십 명이 피우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군대 훈련소의 화생방 가스는 이곳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경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모니터에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3코너에 접어들자, 치우 앞에 있던 한 사내가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영세야~ 그렇게 말 타면 안 돼~! 아, 제기랄. 저, 저, 또 마이클 잭슨 춤추네.”

“마이클 잭슨?”

치우는 무심코 따라 했다. 그 순간, 쾅! 폭탄 배당이 터지며 사내는 마권을 던져버렸다. 옆에 있던 친구가 한마디 했다.

“야, 내가 그 말 땅 파다가 잭슨 춤출 거라 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빌리 진’ 춤 모르슈? 그 노래 부르다가 뒤로 가는 거.”

“푸하하하!”

치우가 웃음을 터뜨리자, 사내는 ‘열받아 죽겠는데 뭐야?’라는 표정으로 치우를 노려보았다. 오랜 노동 현장에 찌든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이를 무기로 압박하려는 시도였지만, 치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요?”

젊고 탄탄한 체격의 치우가 다가가자, 사내는 기가 죽어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털보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털보는 모니터에 집중하며 지나간 경주를 머릿속으로 되새기기 시작했다.

‘10번 말은 직선주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4번 말도 바깥쪽에서 맹렬히 레이스를 펼쳤다. 내 마번은 4-10이었다. 이 경주에 평소보다 많은 돈을 걸었고, 들어오기만 하면 며칠 동안 잃었던 돈을 몽땅 회복할 수 있다. 10번과 4번을 따라올 말은 없을 것 같았다. 내 마권은 맞았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는데, 4번 말 뒤에서 한 마리가 빠르게 쫓아왔다. 그래도 거리상 잡히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차이가 좁혀졌다. 결승점을 불과 10여 미터 앞두고 4번의 속도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쫓아온 말이 4번을 지나쳐 결승선을 통과했다.

‘다 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돈이 어떤 돈인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구걸한, 아니 반강제로 뜯은 돈인데, 이렇게 날리다니."

흡연실을 나가는 그를 따라 치우도 나왔다.

“이번 경주에 어느 말이 괜찮아 보이나요?”

“어? 아까 흡연실에서 그 흑기사?”

마쟁이라 그런지 역시 눈썰미가 좋았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수백 마리 경주마를 알아야 하니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번 경주는 당연히 2번과 11번이죠. 나머지는 다 당나귀예요.”

털보는 웬 먹이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왔냐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경주 결과는 예상과 달리 미적중이었다.

치우가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잔뜩 사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건넸다. 쑥스럽게 받은 털보는 마치 자기 것인 양 어울리는 무리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인상을 써야 할 사람이 오히려 대접을 하니 모두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털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초조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지금 내 머리에는 오늘 뛸 놈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경마가 공부해서 되는 거였다면 벌써 사법 고시를 패스했을 것이다. 지난주부터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래도 소싯적엔 한 구라를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주먹을 불끈 쥔 그는 3만 원씩 두 방으로 승부를 걸었다.

야구 모자의 시선은 자신이 베팅한 말들의 동선을 따라 바삐 움직였다. 그가 찍은 말들이 폭풍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그림대로 흘러간다. 이제 앞선 놈들이 슬슬 밀려야 하는데, 어? 안 서네? 꽝!

다리가 풀리며 한쪽으로 치우쳤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보니 서너 번 경주에 2, 3만 원을 베팅하면서 주머니는 얇아졌다.

그제야 밥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당에 붙어 있는 가격표가 왜 그렇게 비싸 보였는지… 결국 매점에서 김밥 한 줄과 공짜 어묵 국물 다섯 그릇을 마셨다. 이제 8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3마리 안에서 결판이 날 경주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웃으면서 귀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7, 5, 12. 이 세 마리 안에서 조합을 해야 한다. 선행마 7번에 승부수를 던졌다.

7-5, 7-12번에 복식 2만 원, 쌍식 2만 원을 베팅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고개를 돌리다가 말발굽 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 소리쳤다.

“달려~ 네가 머리야~ 더, 더, 좀 더!”

그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심장이 터질 듯하고, 몸이 불처럼 타오르며 하늘로 솟구칠 것만 같았다.

간신히 7-5가 들어왔다. 복식 6.8 배당, 쌍식 12.4 배당. 드디어 본전을 찾았다.

아~ 어찌하여 경마는 한 번을 주어도 이렇게 힘들게 준단 말인가! 경마란 놈이 정말 무서운 건 다 죽어 가는 이에게 살짝 키스를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망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버림받을 줄 알면서도 다가가게 된다.

털보는 중년 여자의 곁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두 사람이 가벼운 터치를 주고받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하긴 이 지점의 터줏대감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수도 있다.

“진숙 씨, 전 경주에 많이 갔던 것 아니에요? 분명히 들어올 말이었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아요. 별로 안 샀어요.”

여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속내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떤 말이 좋게 보이나요?”

“글쎄요….”

“저는 그 말이 그 말 같아서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경마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요일 마지막 경주에서 모든 이들이 한 방을 노리고 있다. 잃었던 돈을 만회하려는 심리로 뭉텅이 베팅을 하며, 저배당은 아예 무시하고 고배당에 집중한다. 저배당에 적중해도 어차피 본전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털보는 이런 상황에서 더욱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직전 경주에서 입상해야 했던 말이 졸전을 펼쳤고, 이번 경주에는 그 소속 마방의 말이 출전해 승부를 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오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베팅을 했다. 구매표에 마번을 적고, 여자에게 슬며시 보여주었다.

“4-9로 가세요. 4는 인정이고 9예요.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요.”

여자는 빙긋 웃으며 발매기로 향했다.

말들이 출발하자, 4번 말이 기습적으로 선두로 나섰다. 4번은 혼자서 도망가며 뒷말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결승점이 가까워지자 2열의 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때, 후미에서 9번 말이 힘차게 올라오더니 앞말들을 단숨에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두 사람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불안했나 봐요?”

“조금 그랬어요. 진숙 씨가 저를 따라와서 부담이 되긴 했어요.”

여자가 고마움을 표현하며 살짝 손을 잡았고, 그 손에서 땀이 흥건하게 느껴졌다. 긴장했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아~ 언제까지 이 롤러코스터 같은 게임을 계속해야 할까?’

“오늘 성적은 어땠어요?”

“이번 경주를 맞춰서 다행히 반 본전은 했어요. 이게 다 털보 아저씨 덕분이에요.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할래요?”

“괜찮아요. 다음에 대승하면 그때 먹을게요.”

털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리 쪽으로 갔다.

치우 앞자리에서는 중후한 중년 남성과 여인이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믿어 줘~ 이번엔 정말이야~ 응?”

남자가 애교 섞인 비음으로 애원했지만,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더욱 애처롭게 매달렸다.

“자기야~ 한 번만 부탁해. 진짜 마지막이야.”

여자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몇 차례 거친 숨을 내쉬고 나서 그녀는 입을 열였다.

“내가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으려 했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눈썹을 치켜세운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뜯긴 돈이 얼마인지 알고 있어? 휴∼ 경마장에서 만나 내 손에 20만 원을 쥐어줬을 때, 된 놈이다 싶었지. 그 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 이후로! 마주 소스 300만 원, 조 교사 소스 400만 원, 기수 친형 소스 500만 원, 마사회 직원에게 노출되면 큰일 나는 소스 700만 원, 다리가 퉁퉁 부불어가며 커피 판 돈 300만 원. 또 꽁씹 준 거 대충 계산해서 4천만 원. 이제는 몸이든 뭐든 다 팔아야 할 판이야.”

“음, 음…”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영아, 정말 미안해. 나 같은 놈 만나서. 흑, 흑…”

그는 주위를 의식한 듯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한 여자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남자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에게 조금만 시간을 줘. 내가 꼭 네 빚 다 갚아줄게.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올게. 너, 나 알지? 결심하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인 거.”

“오빠, 그럼 내가 미안해지잖아. 이제라도 경마를 끊으면 돼.”

“아냐, 아냐. 그렇게 되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거야. 곧 돈 구해서 연락할 테니 오빠만 믿어. 너 돈 있지? 우리 나가서 밥이라도 먹자.”

여자는 그의 할리우드 연기에 빠져 배시시 웃으며 일어섰다.

“한 편의 신파극이네. 저놈은 찾아오는 여자마다 스토리가 달라. 참 재주도 좋아.”

옆에 있던 노인은 괘씸하면서도 부러워하며 혀를 내둘렀다.

“저 남자의 연기는 아카데미 수상감인데요? 저는 카바레에만 제비가 있는 줄 알았는데, 경마장에서도 날아다니네요.”

치우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그는 털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경마에 대한 지식도 배울 겸 저녁을 함께 하실래요?”

“저야 무조건 콜이죠. 물론 당신이 사는 거죠?”

“당연하죠.”

털보는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저, 친한 동생과 같이 가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털보는 야구 모자를 쓴 사내와 무리를 불렀다. 그들은 떼거지로 몰려왔다. 순간 치우는 당황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이들이 필요할 것이니 미리 인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려 12명으로, 모두 초라한 차림에 지친 표정이었다.

계단은 한꺼번에 나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머니가 털린 이들의 한숨과 욕설은 경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다.

다음 목요일까지 경마가 휴장이라 일요일 마지막 경주에서는 대부분 남은 돈을 전부 베팅한다. 그만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가게 된다. 거의 모두 베팅했지만, 창구에서 배당금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평소에 한 푼도 없는 경마꾼들도 경마일이면 어디서든 돈을 마련해 오는 법이다. 경마장에 와서도 여러 곳에 전화를 걸어 돈을 구하는 능숙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조금 전 치우가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소변을 보는데 뒤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다름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할머니를 쳤어. 그 할머니가 넘어지면서 많이 다쳐서 병원에 왔는데, 빨리 합의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퇴원할 때까지 치료비를 부담해야 하고 결국 합의를 해야 하니 이중으로 돈이 들어가잖아. 그래서 내가 형편이 어렵다고 간청해서 겨우 합의를 했어. 상대방이 500만 원을 요구했는데, 내가 빌고 빌어서 300만 원에 끝냈어. 이번 달 안에 꼭 줄 테니, 얼마라도 빌려 줄 수 없을까? 부탁해.”

지금 이 남자는 억지와 거짓말로 베팅할 돈을 구하고 있다. 밖은 경마 방송 소리로 인해 발각될 수 있어 조용한 화장실을 찾은 것이다.

자식을 팔아서라도 베팅하려는 남자는 처음부터 돈을 갚을 방법이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팅이 성공하는 것뿐이다. 만약 그 계획이 실패한다면 친구의 빚 독촉에 시달리며 변명을 늘어놓다가 원수 사이가 될 것이다.

그의 자식은 앞으로 수없이 다치고 사고를 당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 자식은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와 피해자 역할을 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가 ‘늑대가 나타났다’고 여러 번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에, 진짜 위급한 상황에서는 마을 사람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양치기 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경마장의 슬픈 풍경 중 하나이며, 경마는 정말로 비참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괴물인 것 같다.

치우는 그 남자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한 후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경마꾼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최대한 가져오려 한다. 그래서 장외발매소 주변의 고급 음식점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점에서 김밥, 컵라면, 빵 등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심지어 굶는 경우도 많았다.

밖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렴한 음식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그 돈으로 베팅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지점만 보아도 1층에 위치한 횟집은 문을 닫았지만, 3천 원대의 허름한 국밥집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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