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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5. 2024

잘못된 만남

 11월 30일 (금)


‘삐리리, 삐리리.’

현우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보세요?”

“현수야! 나야.”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잠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에 우리 금융 사무실에서 만났었잖아. 나 장동수라고, 그래도 모르겠어?”

“아, 동수.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고 요즘 어떻게 지내? 아직도 그 회사 다니고 있어?”

“아니.”

“그럼 내일 시간 괜찮지? 꼭 할 말이 있어. 예전에 우리 사무실 옆에 있던 다방으로 와.”

“응.”

현우는 오랜만에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근데 할 말이 뭘까?’

그는 동수와 그의 동생 동인을 만났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현우는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어느 날 선배의 사무실에 놀러 갔고, 그곳은 연체된 카드 금액을 대납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현우의 상황을 아는 선배는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일하라고 제안해 주었다. 사채 사무실이라 꺼림칙했지만,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업무는 김 이사가 관리했다.

신용카드는 원칙적으로 물건을 사는 데 사용해야 하지만, 돈이 급한 사람들은 현금을 융통하기 위해 허위 매출을 발생시키는 카드깡을 하게 된다. 대납으로 카드가 복구되더라도 수수료를 내고 돈을 쓰려면 다시 카드깡을 해야 한다. 보통 대납 수수료는 10%, 카드깡 수수료는 20%로, 총 30%의 높은 이자가 붙는다.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지만,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카드깡은 여신금융법 위반으로 불법이어서 다른 사무실에 의뢰했다.

현우가 사무실에 출근한 다음 날 카드 대납 건이 들어왔다. 그때 카드깡을 하러 간 곳이 동수의 사무실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낙후된 건물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 ‘한빛기획’이라는 간판이 붙은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다. 실내는 아담하고, 봉오리가 맺힌 화분이 눈에 띄었다.

“미래 금융에서 오셨군요? 어떤 차로 하실래요?”

“커피로요.”

“동인아, 커피 좀 시켜줘. 근데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일한 지 며칠 안 되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을요. 오히려 우리가 잘 보여야죠. 덕분에 편안히 돈을 버는 건 저희니까요. 하하하.”

동수는 과장된 웃음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차 주문을 마친 동인이 다가왔다.

“카드가 몇 장인가요? 오늘은 금액이 꽤 크네요.”

동인은 자리로 돌아가 카드 한도를 조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불러야 하죠? 저는 장 부장입니다.”

“강현우입니다.”

동수가 거리낌 없이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한빛기획 부장 장동수’라고 적혀 있었다. 현우는 그가 자기보다 서너 살은 위일 거라고 추측했다.

“현수 씨, 바둑 두세요? 몇 급 정도예요?"

“잘 못 둡니다. 아마 7, 8급…”

“저희와 비슷하네요. 동인아, 현수 씨 급수가 우리와 같으니 서로 한 판 겨뤄보는 게 어때?”

동수는 카드 체크기에 승인을 내고 있는 동인에게 말했다.

“좋지. 현수 씨, 괜찮죠?”

“아, 네.”

그런데 동수가 현우의 이름을 현수로 잘못 부르자 동인도 따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자기의 이름이 현우라고 말하려다 그냥 넘어갔다. 굳이 본명을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들과는 다른 부류라는 교만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 현우의 완전범죄에 도움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형, 은행에 가서 돈 좀 찾아와.”

“커피 오면 마시고 갈게.”

분명 동수가 형인 것 같은데, 동생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동수는 밀어놓았던 바둑판을 당기며 물었다.

“현수 씨가 보기에 이 판 어때요? 제가 좀 이겼죠?”

“그렇긴 한데… 지금부터 마무리가 중요할 것 같아요.”

겉보기에는 동수의 흑이 우세해 보였지만, 빈틈이 많아 불안한 형세였다.

그는 현우의 바둑평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듯 얼굴이 밝아졌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다방 아가씨가 폴짝 들어왔다. 매서운 날씨임에도 미니스커트에 보라색 립스틱을 짙게 바른 아가씨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불쾌한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났다. 아가씨는 동수에게 바짝 붙어 앙칼지게 말했다.

“동수 오빠, 나한테 배달 안 시키고 최 양만 부를 거야?”

“생사람 잡지 마라. 너는 주문할 때마다 없던데.”

“그런가? 어쨌든 나 안 부르면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지?”

“그래그래.”

아가씨는 맞은편에 있는 현우는 신경 쓰지 않고 동수의 사타구니를 툭툭 쳤다. 동수는 기분이 좋은 듯 그녀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느물거렸다.

“동수 오빠, 어제 여기서 한판 붙었다며? 최 양이 오빠들이 포커판을 싹 쓸었다고 하던데? 그 계집애가 팁을 많이 받았다고 얼마나 자랑하던지, 부러워서 혼났어. 다음엔 꼭 나를 불러야 해?”

“알았어. 동인이도 있으니까 서비스 죽여주는 아가씨와 같이 와.”

어느새 동수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넘어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현우는 낯선 광경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현수 씨도 있는데 창피하게.”

동인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김 양,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 글구 여기서 포카한다고 절대 말하지 마. 아니면 배달처 바꿀 거야. 명심해!”

“네….”

동인의 레이저 눈빛에 그녀는 모기 소리로 대답했다. 

“자, 찻값. 나머지는 사우나나 해.”

만 원권 다섯 장을 손에 쥔 아가씨는 신나서 엉덩이를 흔들며 나갔다.

“형, 빨리 은행 갔다 와야지. 올 때 김 사장에게 들러서 결재받는 거 잊지 말고.”

동수는 억지로 밀려 나가듯 문을 나섰다. ‘결재받는다’는 말로 미루어 직접 가맹점을 내고 카드깡을 하는 게 아니라 센터링만 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것 같았다.

“현수 씨, 이거 초면인데 쑥스럽네요. 자주 차를 시키고 편하게 지내다 보니 형이 장난으로 한 거예요.”

“개의치 마세요. 근데 장 부장님이 오려면 한참 걸리나요?”

“아마 1시간 정도요.”

시간은 어느새 5시를 지나고 있었다.

“형이 올 동안 바둑 한 판 두실래요?”

“그러죠.”

현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기꺼이 수락했다. 초중반에는 동인의 세력이 좋았지만, 종반으로 갈수록 현우의 실리가 앞섰다. 마지막에는 패가 걸려 서로의 한 수에 승패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바둑은 현우가 아슬아슬하게 몇 집을 이겼다.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도전할게요.”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동인은 근소한 차이로 진 것이 아쉬운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때 동수가 들어왔다. 그가 돈을 받고 일어설 때, 이번에는 동수가 대국을 신청했다. 바둑은 동수의 대마가 잡히면서 돌을 던져 그의 불계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동인아, 저녁도 됐는데 현수 씨와 함께 밥 먹으러 가는 건 어때? 우리를 상대하느라 수고했잖아.”

“그래. 현수 씨, 괜찮죠?”

현우는 사양하려다 한 끼를 때우자는 생각에 승낙했다.


그들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

“현수 씨는 어쩐지 이쪽 분야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고향은 어디고, 이전에는 뭐 하셨어요?”

동수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유통회사에서 일했는데 그 회사가 부도났어요.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미래 금융에서 일하려고요. 나이는 32살이고 고향은 서울이예요.”

“어, 동수 형하고 동갑이네요. 봐! 형은 나이에 비해 얼굴이 삭았다니까.”

“아냐 인마. 내가 정상이고 현수 씨가 동안인 거야. 그렇죠?”

“아마도요.”

“현수 씨가 그렇다니까, 네 눈이 사팔뜨기인 거야.”

두 사람은 옥신각신거렸다. 모두의 취기가 올랐을 때 갑자기 동수가 폭탄성 발언을 날렸다.

“현수 씨, 우리 나이가 같으니 친구하기로 해요. 왠지 현수 씨가 마음에 들고,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만난 것 같아요. 동인아, 지금부터 현수 씨를 형이라고 부르도록 해. 알겠지?”

동수는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좋아.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할게. 이제 저한테 말 놓고 동생처럼 대하세요, 현수 형.”

“이런 만남 흔치 않아!”

세 사람은 건배사를 외쳤다. 그날 현우는 동수와 친구가 되었고, 동인은 동생으로 맺어졌다.

그 이후로 그는 주말이나 카드 대납이 있을 때 동수의 사무실에서 자주 어울렸다.


두어 달이 지나 선배와 김 이사 사이에 언쟁이 생겼고, 곧 선배는 다른 사무실로 옮겼다. 이 사건으로 김 이사와의 관계가 어색해진 현우는 미래 금융을 떠났다. 어차피 임시직이라 아쉬움은 크지 않았지만, 다시 백수 신세가 된 것에 한숨이 나왔다.

며칠 후, 그는 다행히 수산물 가공업체에 취직했다. 그 회사는 신생 업체로, 대형마트에 자사 제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현우는 그곳에서 상품을 관리하며 영업에 최선을 다했지만, 1년이 지나도 매출이 오르지 않자 사장은 투자를 포기했다. 결국 회사는 해체되었고, 그는 마지막 월급을 받았다.

현우는 그 회사에 취직한 기념으로 그들에게 한턱을 냈지만,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회사가 경기도 외곽에 있어 숙소 생활을 했고, 거리도 멀었던 것이 이유였다. 사실 그보다는 일본어를 할 수 있으면 유사 제품이 출시되는 일본에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하면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런데 1년이 지나 갑자기 동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이력서를 쓰다가 문득 두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현수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들과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여겼기에 현수로 불리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이 문제로 적잖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 본명을 밝힌다면 그동안 속였다는 배신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와서 ‘실은 내 이름은 현수가 아니고 현우야’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내일부터 다시 가명을 사용하려니 미안함이 느껴지면서도 픽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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