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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유혹

by 이인철 Aug 04. 2024

12월 3일 (월)


약속한 2층 커피숍은 사방이 통유리로 둘러싸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10분 정도 지나자 둥근 베레모를 쓴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그의 콧수염은 비스마르크처럼 팔자 모양으로, 언뜻 화가나 철학자를 연상케 했다.

“어디 줘 봐?”

그가 CD를 보자 눈이 커졌다.

“이 CD 당일 자 발행인데 오늘 터졌다고? 이런 건 처음 보네. 어떻게 된 거야?”

“사실 저도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았어요.”

“누구? 이 사람들?”

“아니요. 형들, 인사하세요.”

“조화백입니다. 아쉽게도 화가는 아니죠. 하하하.”

그는 우렁찬 목소리와 유머가 돋보이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 CD를 사는 업자가 있을지 모르겠네. 최소한 열흘은 지나야 오리발을 내밀 수 있을 텐데. 동인아, 너도 알잖아? 사고 수표 처리하는 거. 쉽지는 않겠지만 될 수도 있어!”

그는 걱정하면서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화백 형님, 수고비는 충분히 생각해 드릴게요. 절반이 힘들면 그 이하라도 해 보세요.”

동인의 음성은 사정 조로 바뀌었다.

“나야 많이 받으면 좋지. 그만큼 커미션도 비례할 테니까. 헤헤….”

그는 헤벌쭉거리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유 사장, 나 화백이야. K은행 사고 CD인데 1억짜리 다섯 장이야. 근데 문제는 당일 자 발행인데 오늘 터졌어. 30%까지 가능하겠어? …힘들다고?”

그는 어두운 낮빛으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10%도 안 될까? …이건 돌릴 수가 없다고? 그래, 다음에 봐.”

그의 통화에 세 사람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아예 매입을 안 한다고? 알았어.”

그는 포기한 듯 힘없이 휴대폰을 떨구었다. 갈증이 나는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울상으로 변했다. 현우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아마 그도 자신처럼 행운의 로또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기분일 것이다.

“이 CD는 어렵겠어. 잘 됐으면 좋았을 텐데, 무척 아쉽구먼.”

“할 수 없지요. 형님, 수고하셨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하시죠.”

“아냐. 작업이 성공했으면 몰라도… 동인아, 부담을 갖지 말고 연락해. 그럼, 두 분도 다음에 봅시다.”

사내는 힘없이 걸어 나갔다. 현우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본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헛고생한 거야?”

동수가 맥빠진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현수 형, 이제 사실대로 말할게요.”

동인은 주변을 살폈다. 손님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들 가까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 같이 작업하지 않을래요?”

“왜 하필 나야?”

“형은 비인간적인 일을 인간답게 처리하는 재주가 있잖아요.”

“어째 말속에 뼈가 있네.”

“농담이에요.”

“현수야, 그건 욕이 아니라 칭찬이야.”

“군소리 그만하고 뭔지 알아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오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진작 묻고 싶었는데 겨우 참았어. 먼저 너희가 하는 일을 털어놔 봐.”

“우리, 비자금 세탁하는 거 아니에요. 형한테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그럼, 뭔데? 빨리 말해 봐.”

“사실은….”

그의 재촉에 동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였다. 이때 동수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민첩하게 지갑을 꺼내는 흉내를 냈다. 순간 현우는 그 모습이 소매치기를 나타내는 행동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채업자를 등치는 거야. 한마디로 그 사람들의 돈을 슈킹하는 거지.”

“사기를 친다는 거야? 그거 위험할 텐데…”

“아까 너도 차 안에서 들었지만, 그들이 하는 잔고증명은 불법이라 절대 신고를 못 해. 그러니 안심해도 돼.”

동수는 마치 자신이 재판장으로 판결하듯 정의를 내렸다.

“그건 동수 형 말이 맞아요. 저들이 하는 잔고증명의 돈은 대부분 전주들 것이에요. 명동 전주들 중에는 우리나라 지하 경제를 움직이는 큰손들이 많거든요. 전주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잔고 업자를 내세워 돈놀이를 하지요. 만에 사고가 터져 신고를 하면 잔고 업자는 불법으로, 전주들은 세금 포탈로 처벌을 받게 돼요. 근데 잔고 업자가 슈킹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전주로부터 자금줄이 끊겨요. 이 업계가 생각보다 좁거든요. 그래서 도리어 자기들이 이 사실을 숨기지요. 이 둘의 공생 관계가 우리에게는 보호막이 되는 셈이죠.”

이제야 현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아직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지만.

“이 바닥에서 가장 나쁜 놈이 누군지 아세요?”

“글쎄…”

“돈 많이 가진 놈들.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더 나쁜 짓을 하거든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천사야. 할렐루야!”

동수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현수 형, 잔고증명 알죠?”

“응. 공사 입찰할 때 자금 능력을 확인하는 거잖아? 또 이민이나 유학 갈 때 생활 능력을 증명하는 돈으로 알고 있어.”

“맞아요. 잔고증명은 원칙적으로 자기 돈으로 해야 해요. 그런데 돈이 부족한 사람은 잔고 업자에게 비싼 수수료를 주고 의뢰할 수밖에 없죠. 잔고 업자는 의뢰인 명의의 통장에 돈을 입금한 후, 다음 날 일찍 인출해요. 이때 그 돈을 순간적으로 빼내는 거예요.”

“하루 만에 한다고? 그게 정말 가능해?”

현우는 주위를 의식하여 낮게 내뱉었다.

“현수,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졌네. 너도 차 안에서 확인했잖아. 자기들이 약점이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다고 잡아떼는 거. 오늘 거래신청서 원본이 있었으면 성공했다는 것도.”

동수는 분한 듯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설계는 동인이가 다 할 거야. 너와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현수야, 우리도 만날 요꼴로 살 수는 없잖아. 그 사람들은 몇백억을 가진 부자들이라 이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해. 너도 들었잖아? 5억이 껌값이라는 말을. 그런 놈들에게 껌값 좀 받는다고 생각해.”

“나도 현수 형이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형처럼 호감 가는 스타일이 필요하거든요. 물론 서로의 믿음이 중요하겠지만요.”

동인은 '믿음'이라는 단어에 의도적으로 힘을 주었다.

“갑자기 이런 제안을 받아서 어안이 벙벙할 거예요.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분명한 것은, 그들은 신고를 못 하기에 안심해도 된다는 거죠.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예요.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니까요. 형들에게 약속할게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현우는 '그럼 이전에도 했다는 거야?'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켜버렸다.

'저번처럼 현금으로 찾자고 했잖아'라는 동수의 말을 유추하면 굳이 처음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몇 번째인지 묻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반죽은 제가 다 할 테니 형은 몸만 오면 돼요. 넉넉잡아 한 달 안에 끝낼 수 있어요. 현수 형이 고생한 만큼은 충분히 보상해 줄게요.”

“현수야, 우리 동인을 믿고 따라가 보자. 이 자식이 이쪽으로는 도통했어. 우리도 폼 나게 한번 살아봐야지. 할 거지? 응?”

“너희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현우는 오늘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현수야, 생각이 너무 많으면 인생이 고달픈 거야.”

“만약 형이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요. 그러니 모레까지는 확답을 주세요. 전, 현수 형을 믿어요.”

'나조차 나 자신을 모르는데,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배고프지 않아? 한참 굶었더니 배꼽시계가 요동친다. 요동쳐!”

“배고프긴 해? 배만 볼록하고만.”

“아냐, 인마. 이건 등짝이 꺼진 거야.”

언제 심각했냐는 듯 동수의 야단법석에 동인이 비꼬았다. 어느새 시간은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술을 주문했다. 빈속에 소주를 연거푸 마신 현우는 긴장이 풀리며 취기가 돌았다. 침울한 술자리는 일어날 때까지 이어졌다.

현우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물론 돈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이 선택이 과연 옳은지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얽히면서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태어나서 이렇게 하루가 길고 복잡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술에 취해 몸은 힘이 빠졌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또렷해졌다. 그는 이틀 전 동수와의 전화 통화를 떠올리며 밤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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