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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3. 2024

예행연습 - 2

 12월 3일 (월)


"어디 가는 거야?"

"명동 사채 사무실요."

"무슨 일로?"

"이 CD를 현금으로 바꾸려고요. 이미 연락해 놨으니까 형은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이 가방에 돈을 넣고 나오면 끝나요.”

동인이 가방을 가볍게 쳤다. 현우는 커피숍을 나설 때 의식적으로 앞서 나갔다. 이런 행동이라도 해야 배당금을 받을 때 떳떳할 것 같았다.

‘하루 반나절 만에 3천만 원을 버는 나 같은 고급 인력이 어디 있겠어!’ 

얼굴에는 엔도르핀이 돌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넘쳤다.

그들은 서둘러 택시를 탔다. 명동까지 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심해 시간이 꽤 걸렸다. 근처에 다다르자 동인은 사채 사무실에 전화해 정확한 위치를 물었다. 곧 방문하겠다는 그의 말에 상대방은 점심시간이라 밖에 나와 있다고 했다. 시계를 본 동인은 뭔가 문제가 생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사무실에 아무도 없대요. 우리도 점심 먹고 하죠.”

현우는 아침을 거른 빈속임에도 긴장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한가로운 식당에 들어갔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종업원에게 사내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종업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는 급히 뛰어갔다.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동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동수 형, 그쪽에 만 원권으로 준비해 달라고 했지만 무조건 현금으로 받아야 해. 수표는 절대 안 돼. 만약 낌새가 이상하다면 화장실 가는 척하고 전화해. 알겠지?”

“걱정 마.”

동수는 자기를 믿으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에 현우는 불현듯 첩보 영화의 긴박한 장면이 떠올랐다.

식사를 마친 후 동인은 커피숍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세 사람은 사채 사무실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누구도 동인의 지시와 통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한 적이 없었다. 마치 전쟁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면 처벌받을까 두려워하는 부하들처럼.

모든 작업은 동인의 각본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외라면 차가 막혀 사채 사무실 방문이 점심 이후로 미뤄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외가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채 사무실은 주변 건물들에 비해 다소 낡아 보이는 6층 건물의 4층에 위치해 있었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렸다. 현우와 동수는 각각 대형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복도 끝에는 '금강기업'이라는 아크릴 간판이 눈에 띄었다. 동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노크했다.

“시디 교환 건으로 전화드린 사람입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찾아뵙기로 했거든요.”

“네, 연락받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사무적인 투로 대답했다. 그들은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며 소파에 앉았다. 여직원이 커피를 내놓았다. 사무실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고급 도자기와 수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특히 중앙에 놓인 큰 책상은 화려한 나전칠기로 장식되어 마치 골동품처럼 보였다. 그때, 대머리 남자에게 여직원이 다가가 무언가 속삭였다. 대머리는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키는 작고 똥배가 불룩했으며, 눈매가 날카로웠다. 

“우 전무입니다. 시디를 교환하러 오셨다면서요?”

그의 중저음 목소리에는 어딘가 거만한 느낌이 묻어났다.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기름진 이마가 반짝였다.

“교환하실 금액이 얼마지요?”

“5억입니다.”

동수가 탁자 위에 시디 다섯 장을 올려놓았다.

“이게 전부인가요? 저희는 적은 금액은 취급하지 않고 보통 10억 이상만 거래하는데.”

우 전무는 교환 금액에 실망한 듯 무시하는 투였다.

현우는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쨌든 5억이 작다는 그가 거대해 보였다. 

“오전에 통화할 때 그런 말씀은 없었는데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 망설인 우 전무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고, 오래 기다렸으니 교환해 드리지요.”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시디의 발행일자를 확인한 우 전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 시디는 당일 발행된 건데, 오늘 바꾸시게요?”

사실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디는 만기일 이전에는 은행에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없다. 이는 자기앞 수표와의 차이점이다. 이 기간 동안 은행은 시디 금액만큼 자금을 활용하고, 그에 대한 이자를 발행인에게 지급한다. 만약 급한 사정이 있다면 사채 사무실에 약 2%의 수수료를 주고 교환할 수 있지만, 오늘 발행된 시디를 당일에 현금으로 바꾸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발행한 날에 수수료를 손해 보며 다시 현금으로 교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디에 관해 문외한인 동수는 안절부절못했다. 우 전무는 의심의 눈길로 동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곧 현우와 사내에게로 옮겨갔고, 순간 분위기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현우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사내는 불안한 듯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 해!’

현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정적을 깨뜨렸다. 아마도 저녁에 받을 배당금에 대한 의무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현금이 필요해서요. 만약 이 시디가 의심스럽다면 발행 은행에 진위를 확인해 보시죠.”

“음, 음.”

우 전무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로 돌아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실 K은행이죠? 시디 담당자 부탁드립니다. 오늘자 1억짜리 시디 다섯 장을 발행하셨나요? 맞다고요. 그러면 일련번호를 확인했으면 하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우 전무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문제가 없다고 하니 교환해 드리죠.”

현우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능하다면 수표가 아닌 만 원권으로 모두 주셨으면 합니다.”

정신을 차린 동수가 ‘만 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은행에서 현금으로 찾으면 되니까요. 근데 이 시디의 발행인은 누군가요?”

“저, 제가 발행인입니다.”

“거래신청서는 가져왔죠?”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에서 거래신청서를 꺼냈다. 이를 본 우 전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사본이 아닌가요? 시디를 교환하려면 원본이 필요해요. 다시 은행에 가서 원본을 받아와야 합니다. 오늘 교환하려면 서둘러야 해요. 4시까지 도착해야 저희가 돈을 준비할 수 있어요.”

우 전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은행에서 실수로 원본과 바꿨나 보네.”

사무실 벽시계는 2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6층에 고정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었던 그들은 비상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달렸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동인은 사채 사무실에서의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동수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던 적이 있었고, 아마 그때 전화로 보고했을 것이다.

동인과 사내는 한 탁자에, 뒤쪽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았다. 현우는 커피를 주문했다. 지금 마시는 커피는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났다. 같은 커피라도 은행과 사채 사무실에서의 맛이 다른 이유는 긴장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배당금이 눈앞에 아른거려서였다.

“이제 거래신청서 원본을 받아서 그 사무실에 갖다 주면 끝나는 거지? 빨리 은행에 가야 하지 않겠어?”

“동인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조급한 현우와 달리 동수는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공중으로 날리며 여유를 부렸다.

'하긴, 낙천적인 성격이 너의 매력이기도 하지.'

동인이 손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약속한 천만 원입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다음 일은 언제 있나요?”

“조만간 있을 겁니다. 그때 연락드릴게요. 저희가 드린 대포폰은 꼭 가지고 계세요.”

“물론이죠.”

사내는 환한 표정으로 돈 봉투를 가슴에 품고 나갔다. 사내가 길 건너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커피숍을 나왔다.


“지금 어디 가는데?”

“아마 이 근처에 동인의 차가 있을 거야.”

“차가 있으면 명동 갈 때 그 차를 타고 가지 그랬어?”

“너, 바보야? 그러면 바지가 우리 차 모양과 번호를 기억할 거 아냐. 자폭하라는 거야?”

현우는 ‘바지’란 사내를 지칭하는 말이고,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까닭을 이해했다.

대로변 골목을 돌아가자 주차장에 번쩍이는 그랜저가 보였다.

‘며칠 전 1년 만에 만났을 때 왜 저 차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일부러라도 자랑하고 싶었을 텐데… 여전히 나를 바지처럼 경계와 의심하고 있다는 거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섭섭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동인이 시동을 걸며 중얼거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어.”

차가 출발하자 동수는 사채 사무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자랑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K은행으로 가는 길은 차가 밀려 도심 한복판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냥한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그들을 점점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러다간 힘들겠어. 오늘은 은행에서 거래신청서만 받고 내일 처리해야 할 것 같아.”

동인은 3시를 가리키는 디지털 시계를 보며 체념한 듯 말했다.

“동수 형, 저 S은행 앞에 차를 세울 테니 ATM에서 나머지 돈을 다 인출해 와. 일단 돈부터 찾는 게 상책이야.어차피 명동 일은 오늘 힘들고 K은행은 마감 시간 내에 도착하면 되니까.”

동수가 재빠르게 현금 인출기 박스로 들어갔다. 현우는 조마조마하여 담배를 연신 피웠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세찬 바람이 연기와 맞부딪쳐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동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동인아, 어서 출발해. 인출이 정지됐어!”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사고 계좌로 나오더니 체크카드를 먹어버렸어.”

“벌써?”

놀란 동인이 급히 액셀을 밟았다.

“이상하네. 이렇게 빨리 터질 리가 없는데… 조금 전 잔액을 조회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운전대를 쥔 동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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