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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2. 2024

예행연습 -1

 12월 3일 (월)

 

일찍 집을 나선 현우는 동인이 알려준 장소로 가기 위해 전철에 올랐다.

어제 저녁, 그는 동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저께 말했던 일이 진행되니 오전 9시에 동수와 만나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정장 차림을 부탁했다. 오랜만에 현우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머리에 무스를 발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한 아파트 근처의 상가 입구였다. 그 상가 2층에는 K은행이 있었다.

현우는 9시에 도착했지만 동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은행 문이 열리기까지 30분이 남아 있었고, 그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고 있을 때, 동수와 낯선 사내가 다가왔다. 금테 안경에 코트를 입은 동수의 변신한 모습에 그는 놀랐다.

“야, 너 스타일 멋지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현우의 감탄사와 달리 동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현수야, 저 사람이 K은행에서 돈을 찾을 건데, 혹시 돈을 가지고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봐야 해. 알겠지?”

동수는 턱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내는 서성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은행 출입문이 두 개인데, 내가 저 사람과 함께 들어갈 테니 너는 정문 밖에서 지키고 있어.”

사내는 50대 중반쯤으로 새 양복을 걸쳤지만 어색해 보였다. 마치 막노동을 마치고 세탁소에서 빌려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처진 눈매는 순한 인상을 주었다.

동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다. 곧이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은 은행 안으로 들어갔고, 현우는 투명 유리 밖에 서 있었다.

변두리 지점이라 직원이 적었고, 청원경찰 아가씨만 분주히 돌아다녔다. 사내의 뒷모습이 창구에서 보이다가 사라졌다. 안쪽에 고객 대기석이 있는지 동수는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왠지 긴장해 입술에 침을 자주 발랐다.

한동안 내부를 주시하던 그는 답답함을 느껴 복도 끝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이어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내뿜었다. 순식간에 밀려든 차가운 바람이 연기를 휘감아 얼굴을 때렸다. 

건너편 아파트의 나뭇가지가 자신의 마음처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 수 없어 미칠 것만 같았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담배가 유일한 해소제가 되어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수야, 이제 가자.”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니 계단을 총총 내려가는 동수와 사내의 등이 반쯤 보였다.

“어떻게 됐어? 다 끝난 거야?”

현우의 물음에 동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대로로 나와 택이를 잡았다. 사내는 조수석에,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

“잠실 스타벅스에 세워 주세요.”

차가 출발하자 동수가 슬그머니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현우의 손에 슬쩍 건넸다. 수표를 본 그의 눈이 커졌다. 현우는 숨을 죽이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십만, 백만, 천만, 억!?”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다시 확인했지만 틀림없었다. 그것도 다섯 장이나.

‘5억!’

지금껏 이런 거액을 만져본 적이 없는 현우는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보니 아픔이 느껴졌다. 이는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온몸의 핏줄이 뛰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금 세탁한 돈이야?”

그는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며 동수에게 속삭였다. 동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택시는 어느새 커피숍에 도착했다. 그들이 개선장군처럼 안으로 들어서자 동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큰 베이지색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동인과 아는 사이인 듯 인사를 했다. 동수가 사내에게 귓속말을 하자 그는 조금 떨어진 자리로 갔다.

“예상보다 빨리 끝났네. 형, 수표 줘 봐.”

“여기 있어.”

동인이 수표를 세어 보더니 돌려주었다. 이렇게 큰돈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현우는 적잖이 놀랐다. 

“형, 이제부터가 중요해. 내가 말한 대로 침착하게 행동해야 해. 알았지?”

비장한 말투였다.

“현수 형, 동수 형이 K은행에 갈 건데 형도 같이 가면 좋겠어요. 특별히 할 일은 없고 병풍 역할만 하면 돼요.”

현우는 이 부탁이 반명령처럼 들렸다.

“그래, 현수야. 너는 얼굴이 호남형이니 동행하면 신뢰가 더 생길 거야. 함께 가자, 응?”

동수까지 조르는 바람에 덕분에 그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정한 것 같고, 한편으로는 자금 세탁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승낙하게 되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동인만 남고 세 사람은 길 건너편 K은행으로 향했다.

그들이 K은행에 들어선 때는 오전 11시였다. 이 은행은 이전에 방문했던 K은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직원도 많았다. 동수는 조심스럽게 창구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시디를 사러 왔는데요.”

“네, 시디는 과장님이 담당하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은 중년의 여성에게 달려갔다.

“시디를 구입하시겠다고요? 그러면 상담실로 가시죠.”

여자 과장은 동수가 시디를 사러 왔다고 하니 그를 부유층으로 알고 유난히 친절하게 대했다. 상담실은 현우가 은행에 수없이 왔지만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의 신분으로는 부의 증식을 논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수는 고객석에 있던 두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실내는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졌고, 접대용 차와 과자가 놓여 있었다. 현우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과장이 권하는 차를 마셨다. 대기표를 뽑고 전광판에 자신의 순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치 상류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디를 얼마나 사시려고요?”

“5억입니다. 1억짜리 다섯 장으로요.”

불쑥 사내가 과장 앞에 수표를 내놓았다.

“오늘 저희 은행에서 발행한 1억 원짜리 자기앞 수표네요. 시디를 발행받으실 고객님께서는 이 거래신청서를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신분증을 좀 주시겠어요?”

과장은 수표와 신청서, 남자의 신분증을 대기 중인 여직원에게 건넸다. 이어서 그녀는 자기 은행에서 모집하는 펀드와 금융 상품 판매에 열을 올렸다. 돌아온 여직원에게서 시디를 받은 과장이 말했다.

“이 시디는 6개월 만기로 세금 공제하고 3.8%의 이자가 붙습니다. 앞으로 저희 지점을 자주 이용해 주시고, 언제든지 전화 주시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과장은 사내와 동수, 현우에게 차례로 명함을 주었다. 그녀는 이 기회에 부유층 고객을 단골로 만들고자 정문까지 배웅했다.


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커피숍에 들어갔다. 동인과 사내는 다른 자리에서 속닥거렸다.

“너, 시디라는 걸 못 봤지? 여기 있어.”

동수가 건넨 지폐보다 약간 큰 종이 중앙에 ‘양도성예금증서’라는 글자가, 왼쪽에는 수입인지가 붙었고 금액란에는 ‘1억 원’이 적혀 있었다.

현우는 시디가 무기명 채권이고, 최초 발행인과 최종 소유자의 신분만 확인하며 유통 과정에서는 실명 확인이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비자금이나 불법 정치자금 등 ‘검은돈’ 세탁에 자주 활용된다는 것과 상속이나 증여 시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시디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가슴이 뛰었다. 오늘 1억 원짜리 돈을 몇 번이나 만져보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현수 형, 지금부터 동수 형과 저 사람과 함께 다니세요.”

‘이놈 봐라. 이제는 대놓고 명령하네?’

현우는 기분이 상했지만 낯선 사내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부끄러워 참았다. 사실 그보다는 동인이 그의 손에 쥐여 준 쪽지에 혹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현우는 소변이 급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뒤따라온 동인이 그의 주머니에 뭔가를 쏙 넣고는 재빠르게 나가버렸다. 현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메모지를 펼쳤다.

‘오늘 일 끝나면 형 몫도 있을 거예요.’

배당금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생한 대가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방금 전까지 그에게 불쾌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것이 평범한 인간의 본성이다. 현우도 보통 사람이다. 지금 백수인 그의 입장에서는 뜻밖의 희망의 빛이 비친 것이다.

‘그래, 이제껏 국가가 나에게 뭘 해줬지? 쥐꼬리만 한 봉급에서 세금만 꼬박꼬박 떼어갔잖아.’

현우는 이것을 명분 삼아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또 개인이 아닌 정부를 상대로 한 세금 포탈이라 생각하니 죄책감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희열이 일기도 했다. 그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중얼거렸다.

“천만 원을 주려나? 아니, 3천만 원은 줄 거야. 원래 동인이 성격이 화끈하잖아!”

꿀꺽, 목이 울렁거렸다. 현우는 마치 채무자에게 받은 차용증처럼 그 쪽지를 고이 접어 지갑에 넣고는 행진하듯 화장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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