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철 Aug 09. 2024

완전범죄의 서곡 - 2

12월 7일 (금)


“이리 와서 명함을 봐요.”

“어떻게 하루 만에 만들었어? 보통 며칠 걸리지 않나?”

“동네에 맡기면 그렇지. 우리는 월요일부터 써야 하니까 을지로에 가서 즉석으로 제작했어.”

상호는 ‘다한컨설팅’으로, 원형 안에 금색 DC 로고가 고급스러워 보였다. 실장 강수현의 이름 아래 사무실 주소와 전화번호, 휴대폰 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물론 그 휴대폰은 대포폰이었다.

‘이 번호는 외울 필요 없어. 길어야 한 달만 쓸 거니까.’

현우는 그 번호에 대해 왠지 거리감을 느꼈다.

“현수 형, 명함을 상대방에게 줄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어요. 잘못하면 형의 지문이 남을 수 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지금부터 이렇게 주는 습관을 들이세요.”

동인은 명함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주는 자세를 취했다. 현우는 그 모습을 따라 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 자신을 보호하는 길은 스스로 조심하는 것뿐이야.’

동인은 서랍에서 여러 개의 은행 통장을 꺼냈다. 첫 번째 통장은 1억 원이 입금되었다가 다음 날 전부 인출되어 잔액이 0원이었다. 두 번째는 2억 원, 세 번째는 3억 5천만 원, 네 번째는 5억 원이었고, 이들 모두 첫 번째 통장과 마찬가지로 입출금이 한 번만 기록되어 있었다. 현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통장인데, 거액이 입금되었다가 다음 날 전부 빠져나간 거야?”

“저번에 작업할 때 슈킹 정보를 빼내려고 잔고증명을 의뢰한 통장들이야. 진짜 작업 통장은 따로 있어.”

“진짜 작업 통장은 또 뭐야?”

그때 동인은 다른 서랍에서 몇 개의 통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보름에서 한 달 사이에 하루마다 수억 원의 입출금이 기록된 통장들이었다. 마지막 면에는 대출 금액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잔고증명 통장하고는 다르잖아?”

“당연하죠. 잔고증명 통장은 입출금이 한 번밖에 없는데, 그걸 쓰면 큰일 나요. 앞으로 손님들에게 설명할 대출 방법과 모순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작업한 실적 통장을 사용해야 해요.”

“실적 통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현우는 알 듯 모를 듯해서 다시 물었다.

동인이 눈짓을 하자 동수가 구석에 있는 박스를 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낯선 프린터였다.

“복합기가 있는데 웬 프린터야?”

“성능이 완전히 달라요. 복합기는 잉크젯인데, 이건 도트 프린터예요. 실적 통장을 만들려면 이게 필요해요.”

동인은 노트북과 프린터를 연결한 후, 잔고증명 통장을 펼쳐 용지가 들어가는 부분에 꽂았다. 그리고 노트북에 날짜별로 임의의 입출금을 입력한 뒤, 대출금을 적고 엔터를 눌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프린터가 ‘지익’ 소리를 내며 바늘 모양의 핀이 빠르게 잉크 리본에 점을 찍었다. 이어 왕복으로 움직이며 통장에 글자와 숫자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입출금 내역이 빼곡한 통장이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와우! 이건 정말 작품이야. 너희들 정말 대단해!”

현우는 감탄하며 그들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동인은 실적 통장을 만지작거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출 광고가 나가면 현수 형이 전적으로 상담할 거예요. 제가 설명하는 걸 잘 들어주세요.”

“보통 손님들의 질문은 대출 방식, 자격 조건, 소요 시간 등으로 한정돼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해하는 게 대출 방법이에요. 일반적으로 대출 사무실의 신용대출은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와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이죠. 이때 손님에게 받는 수수료는 사실상 불법이에요. 우리 광고에 무담보, 무보증이라고 적혀 있죠? 그리고 대출 금액이 개인은 천만 원에서 5천만 원, 사업자 및 법인은 1억까지로 되어 있잖아요. 이게 현실적으로 등본, 인감 몇 통으로 가능하다고 봐요? 웃기는 얘기죠. 아마 은행에서도 이 정도 금액을 받으려면 신용 1등급이 아니면 불가능할 거예요. 즉, 우리나라 인구의 0.3% 안에 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근데 정보지 대출 광고에는 다 그렇게 적혀 있던데?”

동수가 말허리를 잘랐다. 

"일단 대출이 된다고 해서 자기네가 취급하는 대출 상품의 조건에 맞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이야!”

동인은 말을 끊는 것에 짜증을 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현수 형, 우리 광고에는 ‘본인의 실적에 따라 은행에서 대출해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요. 이런 문구를 넣은 곳은 우리밖에 없어서, 손님들이 그 의미를 궁금해할 거예요. 그때는 저희가 손님의 명의로 예금 실적을 쌓고, 그 실적을 바탕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해준다고 하세요. 수수료는 처음에 대출금의 10%를 제시하고, 융통성을 발휘하면 되요. 또, 대출 가능 금액을 알아야 하므로 손님의 이름과 주민번호가 필요하다고 하세요. 그러면 명의 도용을 의심하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돈이 급한 처지라 알려 줄 거예요. 그런 후 30분 정도 지나서 원하는 대출액과 비슷하게 A은행에서 얼마, B은행에서 얼마가 가능하다고 하면 거의 사무실을 방문해요.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니까 꼭 기억하세요.”

그는 목이 마른 듯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강의를 계속했다.

“대출이 언제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에도 주의해야 해요. 우리 작업 기간에 맞춰 한 달이라고 하면, 손님은 두말 없이 전화를 끊을 거예요. 그래서 광고에 대출 기간을 아예 빼버린 거죠. 대출은 빠르면 2주, 늦어도 3주 내에 손님의 통장으로 입금된다고 하세요.”

“대출 날짜를 길게 잡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아요. 은행 사정이나 감사 등의 이유로 핑계를 대면, 이미 서류를 접수한 상태라 기다리게 되요.”

동인은 자신감을 보이며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근데 이 통장들은 어디에 쓸 거야?”

통장의 용도를 대충 짐작한 현우가 물었다.

“손님에게 이 실적 통장을 보여주면서 이런 식으로 입출금하여 대출이 나간다고 하는 거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민이기 때문에 이 통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거예요. 평생 억 단위 통장을 본 적이 없으니 쉽게 속아 넘어가죠. 수수료는 은행 직원의 접대비와 커미션으로 들어간다는 뉘앙스를 풍기세요. 그래서 대출이 100% 가능하다는 점도 강조해요.”

동인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만약 손님이 의심하거나 말꼬리를 잡더라도 절대 형이 끌려 다니면 안 돼요. 그럴 때는 ‘우리는 선수수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출금은 본인 통장으로 나간다. 입금 후에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 돈으로 메꿔야 한다’라고 하며 대출을 못해 주겠다고 강하게 나가세요. 그러면 손님이 아쉬워서 꼬리를 내릴 거예요.”

“그 다음은?”

“실적을 쌓기 위해 통장이 필요하니 발급받아 오라고 하세요. 대출금이 크면 한 은행으로는 부족하니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라고 해요. 어떤 은행에서 몇 개의 통장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손님이 방문하기 전에 알려드릴게요. 이 근처에 은행이 많아서 통장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다른 곳보다 임차료가 비싼 이곳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죠.”

그는 A4 용지 한 장을 현우에게 건넸다.

“이 내용을 손님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두 번 걸음 하지 않고 우리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요.”

그 종이에는 시중 은행의 종류와 1일 최대 이체 한도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 금액은 1억에서 5억까지 은행마다 달랐다. 특히 K은행에는 ‘동의함’이라는 글자가 별도로 표시되었다.

“통장 개설 신청서를 작성할 때 꼭 1일 이체 금액을 최대한으로 적으라고 하세요. 그 이유는 이체 금액이 적으면 실적을 많이 쌓지 못해 대출금이 적게 나간다고 해요. 또 인터넷 뱅킹 신청도 필수예요. 매번 큰돈을 들고 은행에 갈 수 없으니 컴퓨터로 입출금을 하려면 인터넷 뱅킹이 필요하다고 하세요. 이 정도면 얼추 마무리된 것 같은데…”

동인은 피곤한 듯 손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이체 통장으로 대포통장을 사용하는 게 어때?”

현우는 인터넷에서 본 대포통장이 떠올랐다. 그 통장을 구매해 이체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편리할 것 같았다.

“뭘 모르시는 말씀! 대포통장은 판매자가 통장과 체크카드만 주고, 인터넷 뱅킹이 안 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쓸모가 없어요. 설령 인터넷 뱅킹이 된 통장을 사더라도, 통장 명의인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꾸면 그만이에요. 결국 돈만 날리고 하소연할 곳도 없죠. 대포통장을 구입한 사람도 불법이니까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의 명쾌한 설명을 듣고 현우는 ‘그래서 대포통장을 이용하는 보이스 피싱이 CCTV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금 인출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인아, K은행에 적힌 ‘동의함’은 무슨 뜻이야?”

“아! 그걸 깜빡했네요. 손님이 한 은행에 여러 개의 통장을 가질 수 있죠. 대부분의 은행은 인터넷 뱅킹이 된 통장이 있으면 다른 통장 계좌도 컴퓨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근데 K은행은 통장 개설 신청서를 작성할 때 동의 여부를 묻거든요. 손님에게 꼭 ‘동의’에 체크하라고 하세요. 그래야 다른 통장의 입출금을 조회할 수 있어요. 그 은행은 이체 한도가 커서 타겟 넘버원이죠.”

현우가 상담 내용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대출 광고 정보지의 젊은 영업사원이었다. 그는 명함을 건네며 광고 샘플에 수정사항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현우가 보기에는 무난한 것 같았다. 동인도 마음에 든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 실장님, 문안이 어때요?”

일부러 동수가 직함을 강조하며 물었다. 그의 장난이었다.

“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는 낯선 호칭에 더듬거렸다. 눈치 빠른 영업 사원은 그때부터 현우에게 꼬박꼬박 강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직함도 점차 익숙해졌다. 

현우는 광고 계약서에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다. 나중에 이것이 물증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업 등록은 하셨죠? 등록번호를 알려 주실래요? 요즘 등록번호가 없으면 저희가 제재를 받거든요.”

순간 당황한 그는 반사적으로 동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보다시피 어제 사무실을 열어서 아직 등록할 겨를이 없었어요. 일단 월요일부터 게재해 주고, 등록번호가 나오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저희가 한 달만 광고를 올릴 게 아니잖아요? 이럴 때 편의를 봐주지 않으면 어떻게 광고를 맡기겠어요. 그렇죠?”

동인은 은근히 협박적으로 나왔다. 

“회사에 그렇게 말할 테니 등록번호가 나오면 연락 주세요.”

그는 한 발 물러선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광고를 앞면에 실어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저희와 거래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그건 당연하죠.”

광고 위치는 일주일마다 바뀌는 것이 원칙이다. 손님들은 앞에서부터 몇 군데를 살펴보고 전화한 후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현우가 같은 말을 하려던 참에 동인이 먼저 꺼내서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 듯 싶었다.

“여직원이 없네요. 괜찮은 아가씨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정말요? 그럼 고맙죠. 종종 들러서 차 한 잔….”

“아니, 필요 없어요. 글구 우리는 외근을 자주 하니 방문할 때는 미리 연락하세요.”

동수의 말을 가로챈 동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영업사원은 멋쩍어하며 광고비를 챙겨 나갔다. 곧이어 불같은고음이 터졌다.

“동수 형! 여직원은 뭐고 사무실에 놀러 오라는 게 말이 돼? 우리 일을 뻔히 알면서!”

“그냥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야. 네가 앞면으로 광고를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인사치레로 한 건데... 네 말 듣고 보니 그러네.”

동수는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오물거렸다.

“제발 좀 생각하고 행동해. 행동한 후에 생각하지 말고.”

“야,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냐?”

“형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동인이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순간 사무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전화국 직원이 들어왔다. 정년퇴직을 앞둔 듯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 모습에 현우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건네자 그는 눈인사를 하며 단숨에 마셨다.

“가입자 김성수 씨는 누구신가요? 전화 설치 완료 확인을 받아야 하거든요.”

“저희 직원인데 지금 외출 중이라 제가 대신할게요.”

현우가 자연스럽게 둘러대며 사인을 했다. 직원은 가방에 작업 도구를 챙기고 나갔다.

“현수 형, 센스가 정말 대단하네요!”

동인이 엄지 척을 날렸다. 두 대의 대출 광고 전화기는 현우와 동수의 책상 사이에 놓였고, 다른 한 대는 동인의 자리, 나머지는 팩스에 연결되었다.

“전화와 광고는 끝났고 이제 월요일에 작업 오픈만 남았네. 형들, 에너지 충전을 위해 이틀은 쉬기로 하죠. 동수 형, 저녁에 한잔 어때?”

동인은 조금 전 성질 냈던 것이 미안한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나야 콜이지. 현수야, 너도 무조건 가야 해.”

“그래.”

동수는 언제 핀잔을 받았냐는 듯 들떴다. 현우도 술이 고파서 흔쾌히 대답했다.

"지금 뱃가죽과 등가죽이 키스 직전이야!“

너스레를 떠는 동수에 이끌려 그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들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 동인은 작업 진행에 만족하여 술을 빠르게 마셨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어도 형한테 소리 지르면 되냐? 나 섭섭했어.”

“미안, 미안. 모두 작업의 성공을 위해서 그런 거야. 형이 좀 이해해 줘.”

동인은 손바닥으로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음담패설도 오갔다.

“동인아, 단합대회 기념으로 2차 가는 거 어때?”

“좋지!”

동인은 혀가 반쯤 꼬인 듯한 소리로 맞장구쳤다. 얼굴에 화색이 돈 동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전 08화 완전범죄의 서곡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