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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0. 2024

첫 아군을 만나다

12월 7일 (금)


그들은 택시를 타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룸살롱에 도착했다. 

실내는 화려한 인테리어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웨이터가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룸으로 안내했다. 동인과 동수에게 사장님과 부장님으로 부르는 걸 보아 처음 방문한 것 같았다. 화사하게 꾸민 마담은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맞이했다.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아가씨가 들어왔다. 두 아가씨는 동수와 동인의 자리로 가서 냉큼 앉았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으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 함께했던 파트너인 듯했다. 혼자 남은 아가씨는 현우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녀의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하얀 다리는 매끈해 보였다.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세팅했다. 술은 21년산 밸런타인이었고, 빈 쟁반 위에는 10만 원의 팁이 놓여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웨이터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어쩌다 보니 현우의 양옆에 파트너와 마담이 앉았다. 아니, 이는 마담의 상술일 것이다. 두 사람은 단골이고, 초면인 현우의 신분을 파악해야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의 젠틀한 스타일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담은 현우의 입에 안주를 넣어주며 대화를 독점했다.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파트너는 과일만 깎는 처량한 상황이 되었다. 마담이 점점 밀착하며 그를 터치하기 시작하자, 동수는 시샘 어린 투정을 부렸다.

“역시 남자는 멋있어야 해.”

“동수 오빠는 밤일이 멋지잖아요.”

파트너의 맞장구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때 동인의 파트너가 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빠, 나 사랑해?”

“야, 너 사랑이 뭔지 알아? 사랑이란 누군가를 90% 이상 믿는 거야. 까놓고 말하면, 나는 너를 그렇게 믿지 않아.”

“그럼 몇 % 나 믿는데?”

“51%.”

“겨우?”

“그래도 절반은 넘잖아. 난 어떤 놈이든 49% 이상은 안 믿어.”

그날 현우는 술기운에 그의 말을 가볍게 넘겼지만, 그러나 알았어야 했다. 자신도 그 '어떤 놈'에 속한다는 것을.

“동수 오빠, 요즘 사업이 잘 나가나 봐.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네?”

“야, 너 백조 알지? 이 백조가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속에서는 버둥버둥 헤엄치고 있어. 인생이란 그런 거야.”

“따봉! 우리 오빠 정말 감동적이네.”

“아니, 나를 감동시키는 건 딱 세 가지야. 캐시, 크레디트 카드, 그리고 섹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붕가붕가 한 번 할까?”

동수는 손바닥을 비비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콜!”

그때 웨이터가 마담을 밖으로 불러냈고, 현우의 파트너가 그에게로 바짝 당겨 앉았다.

“마담 언니가 진짜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아. 사실 저 질투했어요.”

입술을 살짝 내민 뾰로통한 표정이 귀여웠다.

“오빠, 여기 자주 오세요?”

“처음이에요.”

비로소 현우는 파트너의 얼굴을 가까이 보았다. 쌍꺼풀이 없는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의 생머리 아가씨였다. 그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아가씨는 왜 쌍꺼풀 수술을 안 했지?’

두 아가씨는 쌍꺼풀을 한 티가 났고 애교가 넘쳤지만, 그녀는 얌전했다.

“저는 희현이에요. 성희현. 본명이에요. 비록 이런 곳에서 일하지만 가명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니까요.”

현우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오빠 이름은요?”

“난….”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자리에서 본명을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강현수예요.”

잠깐 명함의 이름이 스쳤지만, 지금 동수와 동인이 부르는 현수가 더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둘 다 본명은 아니니까.

“어! 오빠와 저는 공통점이 있네요.”

“네?”

“오빠와 저의 이름에 ‘현’이 들어가니까, 이건 분명 인연이에요. 안 그래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희현은 그와의 첫 만남에 인연이라는 끈을 억지로 엮으며 다가왔다.

“현수 오빠는 왠지 저 오빠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무슨 뜻이에요?”

“오빠는 존댓말을 쓰고 굿 매너잖아요. 게다가 인상도 좋고 마음도 넓으신 것 같아요.”

“제가 좀 중독성 있는 마스크죠. 그리고 제 닉네임이 강태평양이에요.”

“분위기와는 다르게 유머 감각도 있으시네요. 정말 매력이 넘쳐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현우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그는 술집 아가씨와도 말을 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약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동수는 파트너의 상의에 손을 넣고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동인도 파트너 허리를 감고는 키스하느라 바빴다.

노래방 기계에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인은 파트너를 끌어안고 노래를 불렀고, 동수와 파트너는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노래책을 넘기기만 하는 그를 대신해 희현이 잔잔한 블루스 곡을 선정했다.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서로의 몸이 하나가 되어 흐느적거렸다. 후렴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가 가만히 현우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희현이는 이제 현수 오빠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나도 그래요.”

그는 살포시 희현의 좁은 어깨를 감싸며 촉촉한 눈망울에 입을 맞추었다. 

“현수야, 뜨거운 밤 보내고 월요일에 보자!”

동수의 외침이 바람결에 실려오는 듯 귓가에 아른거렸다


12월 8일 (토)


눈을 뜬 현우는 과음으로 정신이 몽롱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휴대폰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옆에 작은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현수 오빠를 알게 되어 정말 기뻐요. 우연은 없잖아요. 오빠와의 만남은 필연이라고 믿고 싶어요. 오늘은 엄마 생신이라 동생과 함께 준비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먼저 가니 이해해 주세요. 제 전화번호예요." - 희현이가 -

어제 현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순수한 마음에 끌리게 되었다. 이 감정은 이 분야에서 쉽게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오늘 할 일이 뭐지?’

그는 거울 속 흐릿한 눈빛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메모지를 지갑에 넣고 서둘러 샤워를 했다. 작업 이후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어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모텔을 나와 피시방으로 갔다. 토요일 오전이라 한산했다. 현우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변한 점은 항상 음침한 장소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피숍, 식당, 술집 모두 마찬가지였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대포폰’을 입력하려다 ‘선불폰’으로 바꾸었다. 대포폰 판매업자들이 최소 두 달 이상 통화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고, 개통된 지 오래된 폰은 바로 정지될 수 있다. 동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포폰을 샀는데 열흘 만에 통화가 정지됐어. 근데 판매업자가 전화번호를 없애고 잠수타서 돈만 날렸지."

선불폰을 선택한 까닭은 희현과의 통화가 많지 않을 것이고, 요금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끊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선불폰 판매업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동인이 준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분증 사본을 팩스로 요구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그는 재빨리 피시방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동인의 서랍에 손님들의 주민증 사본이 있어서였다. 그중 한 장을 복사하려다 여러 장을 복사했다. 나중에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변 문구점에서 팩스를 보냈다.

동인에게 선불폰 구입을 부탁할 수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를 둘러댈 만한 적당한 핑계가 없었다. 그렇다고 희현의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녀가 연락처를 물었을 때, 현우는 망설이다가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얼버무렸다. 지금 구입하는 선불폰은 희현과 통화할 때 사용할 예정이다. 동수와 동인 외에는 누구도 자신의 실명폰 번호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휴대폰을 받은 후 퀵 기사에게 물건 값을 드릴게요.”

“편한 대로 하세요.”

판매업자는 그렇게 말했다. 계좌이체도 가능했지만, 이는 추적의 고리를 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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