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식이 복도를 힘차게 걸어가더니, 한 병실의 문을 세게 열었다. 창가 쪽 침대에는 목과 다리에 깁스를 한 우 사장이 누워 있었다.
“아이고, 사장님 괜찮습니까? 큰일 날뻔했네요.”
춘식은 그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며 소란을 피웠다. 얼떨떨한 표정의 우 사장에게 치우가 인사했다.
“동양금융에서 병문안 왔습니다.”
“동양금융이요?”
“사장님께서 사업자금을 빌린 회사입니다. 이자가 두 달 연체되어 계약에 따라 원금과 함께 갚으셔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우 사장은 손으로 깁스한 다리를 가리켰다. 치우는 그의 눈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에는 교통사고 시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없어요.”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퇴원하면 바로 해결해 드릴게요.”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회사 사정이 돈을 갚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던데요?”
“아, 아니에요.”
“이거 우리를 빙다리 핫바지로 아네. 어디서 개수작이야!”
춘식이 탁자 위의 음료 박스를 치자, 병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주변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뭘 봐!”
춘식이 눈을 부라리자, 모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병실은 순식간에 공포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다행히 사장님께서 여러 군데 상해보험에 가입하셨더군요. 그 보험금으로 우리 돈을 먼저 갚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지금 저희 회사가 매우 어렵거든요. 보험 수령금을 준다는 이 위임장에 서명만 하세요.”
“그건 안 됩니다! 회사의 빚과 보험금은 엄연히 별개인데 왜 당신들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까?”
우 사장은 단호하게 나왔다.
“이래서 못 주겠다, 저래서 안 주겠다. 결론은 떼먹겠다는 거네.”
춘식이 다리를 툭툭 칠 때마다 우 사장은 아파서 눈을 찔끔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 퇴원해서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치우가 차갑게 내뱉었다.
“영일 고등학교 2학년 3반의 우성수와 상진 중학교 3학년 7반 우성희. 아시죠?”
“아니, 어떻게 저희 아이들을 아세요?”
“우리가 가서 ‘아빠가 돈을 빌리고 배짱을 부리는데, 너희들이 알바라도 해서 갚는 게 효도야. 그리고 이제 집에서 쫓겨나는데 공부는 어디서 할 거니? 이 시간 이후로 아빠 얼굴 보기 힘들 거다.’라고 말해야 하니, 무지 바쁘겠네요. 애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말해요. 가는 길에 제가 전해줄게요.”
우 사장은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며 체념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류 주세요. 서명하겠습니다.”
병실을 나온 치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조 실장님, 여기 일은 잘 완료했어요. 보육원으로 바로 갈까요?”
“아니, 지금은 안 돼. 내가 연락하면 그때 같이 가자.”
그는 전화를 끊고 의아한 듯 말했다.
“조 실장이 웬일로 함께 가자고 하네?”
“정말? 그 뺀질이가 무슨 꿍꿍이로 우리 일을 거들어 준다고 하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민수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오늘 보육원 접수하러 간다며?”
“그런데?”
“그거 팔면 얼마 정도 할지 금 사장이 사전답사를 하고 와. 나도 가고 싶은데 일이 생겨서 못 가. 그리고 확실히 마무리 짓는 거 알지?”
“그러지, 뭐.”
수화기를 내려놓은 금문성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보다 어린 게 말끝마다 반말이야. 어휴! 그놈의 배당 때문에 참는다, 참아.”
지나는 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래야 치우와 금 사장의 사이가 완전히 끝나겠지.”
사무실을 나온 세두는 비상계단에서 모기 소리로 속삭였다.
“언제 갈까요?”
“퇴근 시간에 맞춰서.”
“근데 금 사장님과 꼭 같이 가야 하나요?”
“조 실장은 내가 시킨 대로만 해.”
“알겠어요.”
세두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치우에게 전화했다.
“나야. 그 시간에 보육원에서 만나.”
세두의 얼굴은 감격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는 창밖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늘어졌다.
“사채 사무실은 어디에 얻는 게 좋을까?”
보육원 앞에 두 대의 승용차가 멈춰 섰다. 앞차에서 치우, 춘식, 민수가 내렸고, 뒤차에서는 금문성과 세두가 내렸다. 세 사람은 신속하게 마당을 지나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은 몇몇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치우가 말했다.
“약속한 대로 돈 받으러 왔습니다.”
“저, 그게 아직 준비가…”
원장은 머뭇거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일단 이자라도 드리면 안 될까요? 곧 제 딸이 돈을 가져올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자 몇 푼 받으려고 이렇게 온 줄 알아요?”
춘식의 고함에 민수가 거들었다.
원장 품에 달려들고, 무서워서 울고, 구석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로 원장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세두는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밖으로 내쫓았다.
“치우, 넌 뭐 하고 있냐!”
최근 그의 일 처리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금문성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치우는 저번 일을 만회하듯이 앞장서서 기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원장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 퇴근한 혜원이 혜성의 손을 잡고 보육원으로 들어섰다. 마당에서 울던 아이들이 그녀에게 몰려갔다. 곧 원장실에서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혜원은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치우가 원장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내동댕이쳤고, 원장은 머리가 모서리에 부딪혀 피를 흘렸다.
“아빠!”
혜원과 혜성이 비명을 질렀다. 쓰러진 원장을 일으킨 그녀의 눈과 치우의 눈이 마주쳤다. 혜원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치우 씨, 지금 우리 아빠에게 뭐 하는 짓이야!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
“치우 형, 왜 아빠를 때려! 왜 울 아빠를 때리냐고!”
“여, 여기가… 너희 집이었어?”
치우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혜성이 그에게 달려들어 가슴을 쳤다, 이어 쓰러지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 금문성과 춘식, 민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두는 이를 예견한 듯 즐거워 보였다.
혜원은 가방에서 5만 원권 다발을 꺼냈다. 그 돈은 은행 대출과 친구들에게 빌린 3천500만 원이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아. 너희가 좋아하는 그 돈이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치우에게 돈다발을 던졌다. 돈다발은 그의 얼굴에 맞고 튕겨져 나가면서 끈이 풀어져 바닥에 돈이 흩어졌다. 치우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날 저녁, 포장마차에서 세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는 마치 상갓집 같았다. 치우의 눈동자에 처량함이 가득했다. 춘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너랑 혜원 씨는 어떻게 될 거야?”
“내가 사는 이유가 사라졌어.”
“하필 그 보육원이 혜원 씨 집이라니... 앞으로 제수씨를 어떻게 보겠어….”
“그러게. 우연치곤 치우 형에게 너무 가혹하네.”
‘우연’이라는 말에 치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금문성의 방으로 들어선 치우는 굳은 표정이었다.
“어제 고생했어. 보육원 건은 이자로 3천500을 받아서 열흘 연장해 주기로 했다.”
금문성은 선심 쓰듯 말하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우리 방식으로 하면 이자가 4천400만 원인데, 너를 생각해서 사장님이 많이 봐주신 거야. 사장님, 원장을 계속 닦달하면 딸에게서 더 나올 것 같던데요?”
치우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저에게 보육원 일을 맡긴 건가요?”
“무슨 말이야?”
“그 보육원이 제 여자 친구 집인 걸 알면서 시킨 겁니까?”
“아냐, 난 정말 몰랐어. 조 실장에게 물어봐?”
금문성은 손사래를 치며 반색했다.
“조 실장님은 알았어요?”
“나도 몰랐어. 우연히 그렇게 된 거지. 만약 알았다면 사장님이 네게 시켰겠어? 내가 했지. 맞죠? 사장님?”
“그럼, 당연하지.”
두 사람의 쿵짝에 치우는 차갑게 나갔다.
“저놈은 이래서 안 돼요. 도대체 자식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몰라요.”
“우연치곤 더럽군. 이제부터 보육원 건은 조 실장이 맡아 처리해.”
“저만 믿으세요.”
세두의 입가에 야수의 미소가 번졌다.
“아! 보육원 원장 딸의 전화번호 알고 있어?."
“그걸 왜요?”
“음, 음. 그래도 그 정도의 채무자 정보는 알아야지."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며 세두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언제부터 채무자 연락처에 신경을 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