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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4. 2024

사랑이 떠나다

치우는 혜원의 퇴근 시간에 맞춰 서울병원 입구에 서 있었다. 멀리서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치우는 다가갔다.

“빚 받으러 온 거야?” 

혜원은 까칠한 말투로 돌직구를 던졌다.

“어디 가서 얘기 좀 해.” 

“나는 사채 해결사의 변명을 들어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사채 이자라도 갚으려면 빨리 가서 야간 알바를 해야 해.” 

“천사의 집이 네 집인 줄은 정말 몰랐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다고 우리 빚이 없어지진 않잖아.” 

이번에는 차가운 얼음송곳이 날아왔다. 

“그, 그건….” 

혜원은 후다닥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렸다. 그는 절망의 눈길로 택시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았다. 


치우는 심란한 마음으로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춘식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외쳤다.

“혜원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다시 말해 봐. 누가 죽었다고?” 

“방금 금 사장 사무실의 김 대리를 길에서 만났는데, 어젯밤에 보육원 원장이 죽었다고 해. 그래서 지금 금 사장이 조 실장을 그쪽으로 보냈대.” 

“어떻게 돌아가셨대?” 

민수가 서둘러 물었다.

“아마 자살한 것 같아.” 

“자살이라고? 나 보육원에 갔다 올게.” 

치우는 정신없이 나가고, 두 사람이 뒤따랐다.


세두와 어깨들이 보육원 마당에 들어섰다. 많은 문상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거실 영정 앞에는 상복을 입은 혜원이 서 있었고, 그 곁에서 혜성과 원생들이 울고 있었다. 세두가 그녀에게 다가가 윽박질렀다. 

“그래도 약속 날짜는 지켜야 한다는 거 알지? 아버지의 죽음으로 엉뚱한 생각을 할까 미리 경고하는 거야.” 

“당신들 빚 독촉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해?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야!” 

“아저씨 나빠. 울 아빠 살려 내. 살려 내란 말이야!” 

한순간 거실은 비극적인 장면으로 가득 찼다. 이때 세두의 가슴을 치던 혜성이 그의 팔을 꽉 물었다. 

“으악!”

세두는 비명과 함께 혜성을 밀쳐냈다. 그녀는 뒤로 넘어지는 혜성을 잡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대문에서 이 모습을 목격한 치우는 피가 거꾸로 치솟았지만, 자신 때문에 원장이 죽은 것 같은 죄책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두와 어깨들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재빨리 벽 뒤로 숨었다. 떠나는 차를 바라보는 치우의 목에는 핏대가 섰다. 영정을 품에 안고 절규하는 혜원의 몸부림에 그는 눈물을 쏟았다.


공원묘지에서, 맨 앞에 선 혜성이 영정사진을 들고 걸어갔다. 관이 뒤따르고 혜원과 원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장애아들의 힘겨운 걸음과 울음소리에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묘지 구덩이 앞에서 목사의 인도로 입관 예배가 진행되었고, 혜원은 관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통곡 소리는 애달픈 메아리처럼 산등성이에 퍼져 나갔다.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세 사람이 이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치우는 절규하고 싶었지만 목울음이 먼저 차고 올라왔다. 

“춘식이 형, 형은 신이 있다고 생각해?” 

“응?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신은 없어.” 

민수가 단호하게 정의를 내렸다.

“왜?” 

“신이 있다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맞네. 나도 이제 신을 믿지 않을래.” 

춘식이 동의했다. 치우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슬프다. 민수야, 제수씨가 우리를 엄청 원망하겠지?.” 

“당연하지. 더구나 치우 형이 원장님을 폭행하는 걸 봤으니…” 

그 장면을 떠올린 치우는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민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춘식 형, 그 얘기 들었어? 요즘 조 실장이 사채 사무실을 구한다고 무지 바쁘대.” 

“뭔 소리야? 사무실만 있으면 사채업을 할 수 있냐? 그럼 난 백 번도 오픈했겠다. 전주가 있어야지.”

"며칠 전에 세두와 민 여사가 카페에서 나오는 걸 봤어. 낌새가 수상해서 조 실장의 부하인 꽁치에게 술을 사주며 슬쩍 물어보니, 전주가 민 여사라고 하더라."

“정말? 민 여사가 치우에게 차이니까 조 실장에게 붙었구나. 안 봐도 비디오고 안 들어도 오디오네.”

춘식은 혀를 끌끌 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치우의 손등에는 푸른 힘줄이 곤두섰고, 어금니를 악문 입술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왔다.


원장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의자에 혜원이 슬픈 표정으로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아버지가 평소 읽던 손때 묻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책갈피를 펼쳐 편지를 꺼냈다. 그것은 원장의 유서였다.

‘사랑하는 딸 혜원아, 어린 혜성이와 동생들을 맡기고 먼저 떠나는 못난 아빠를 용서해 다오. 아무리 고민해도 너희를 보호할 방법은 이 길뿐이구나. 빚의 당사자인 나만 없으면 사채업자가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이 보육원도 지킬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아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네게 너무 많은 짐을 떠맡기고… 앞으로 우리 혜원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늘나라에서 아빠와 엄마가 하나님께 지켜 달라고 눈물로 간구하마….’

혜원은 목이 메어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그때 혜성이 들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누나, 아빠는 좋겠다. 이제 보고 싶은 엄마와 항상 천국에 함께 있으니까. 그치?” 

혜원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혜성이 손등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누나, 울지 마. 혜성이가 있잖아. 난 아빠처럼 남자니까.” 


금문성 사무실 빌딩 입구에서 ‘천사의 집을 지켜 주세요’라는 피켓을 든 혜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희 아버지는 보육원 원장이셨습니다. 친구의 보증을 서게 된 일이 잘못되어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은 점점 불어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제 보육원도 악덕 사채업자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천사의 집 가족이 강제로 흩어질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세두의 지휘 아래, 어깨들이 그녀를 무자비하게 끌어냈다. 혜원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외쳤다. 

“도와주세요! 아이들이 천사의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치우는 이 모습을 보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자신의 죄책감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그날 밤, 치우는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소주를 유리컵에 벌컥벌컥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전신에 퍼지는 알코올 기운이 쓰나미처럼 온 신경을 휩쓸어 버렸다.

원장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으로 한 잔. 혜원이 지키려는 천사의 집을 위해 한 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한 잔.

비가 세차게 내리며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선잠을 자던 치우는 반사적으로 깨어났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현우는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나갔다.

저 멀리 걸어가는 아가씨가 혜원으로 겹쳐졌다.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연기에 실어 하나씩 떠올렸다.

호수를 끼고 걷던 산책로, 노을이 지던 강변의 라이브 카페, 파도타기를 즐겼던 해변, 두어 잔 술에 진달래 향기를 내뿜던 목로주점,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포옹했던 공원 벤치… 그때 그곳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기억은 사랑보다 더 슬프다. 한 사람의 삶에 단 한 번의 사랑이 허락된다면 기꺼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버림받아, 파티가 끝난 탁자 아래의 빈병처럼 나뒹굴고 있다.

사랑은 시작할 때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발전할수록 용기를 주며, 끝날 때는 아픈 상처를 남긴다. 이제야 첫사랑을 하려는데 이렇게 끝나버렸다. 결국 나는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가 되었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더라도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는 거래요.”

그는 혜원의 말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길은 도랑이 되어 콸콸 흘렀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흙탕물은 땅을 저수지로 만들었다. 치우는 산소 없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숨을 헐떡였다.


빌딩으로 들어가는 혜원을 발견한 세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여자, 천사의 집 유혜원인데… 이 시간에 왜 여기 나타났지? 이상하네.”

그는 의심이 생겨 몰래 혜원을 따라갔다. 그녀는 사무실을 지나 금문성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모두 일찍 퇴근하도록 해.”

야근을 밥 먹듯 시키던 금문성이 웬일로 호의를 베풀자 직원들은 의아해했다. 그제야 세두는 금 사장이 혜원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금문성 맞은편에 앉은 혜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했나요?”

“보육원 사정이 딱해서 말이야. 내가 보기보다 마음이 약해. 그래서 이사 날짜를 연기해 줄까 생각 중이야.”

“정말요?”

“단, 조건이 있어.”

“네? 뭔데요?”

“오늘 나와 데이트를 하는 거야. 이 정도면 거래치고 괜찮은 것 같은데?”

“당신의 속셈이 그거였어요?”

“하룻밤 데이트로 수십 명의 식구를 챙기는 게 중요하지 않나? 아가씨 말대로 이 추운 겨울에 애들을 길바닥에 내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이 개자식!”

그녀는 금문성을 노려보며 치를 떨었다. 

“왜 치우 때문에? 이미 둘은 원수 사이가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아가씨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치우에게 책임이 있지.”

“내 앞에서 그 인간 얘기는 하지 마세요!”

금문성이 그녀의 곁으로 슬쩍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은 보육원과 불쌍한 애들만 생각해야 해. 당신의 가족들이 이 칼바람 속에서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잖아.”

혜원은 뿔뿔이 흩어질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늘만 꾹 참고 견뎌내면….’ 

혜원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금문성이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혜원은 그의 손을 쳐냈다.

“알겠어. 그럼 이자를 빼고 원금만 받는 걸로 하지. 이런 거래는 난생처음이야.”

한껏 달아오른 그가 말했다. 

혜원의 눈꺼풀은 심하게 떨렸고, 갈등의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의 감정을 헤아린 금문성의 팔이 어깨를 넘어와 가슴을 주물렀다. 

“그래. 아주 현명한 선택이야.”

자신이 제시한 조건의 성공을 확신한 그는 대담하게 나왔다. 혜원을 소파에 눕히고 몸을 밀착시켰다. 저항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금문성의 무거운 몸에 눌려 점점 약해졌다. 맹수의 손이 블라우스 첫 단추를 풀었다. 그 순간, 혜원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의 손등을 힘껏 깨물었다.

“아, 아악!”

비명과 동시에 금문성은 손을 움켜잡고 촐랑촐항 뛰어다녔다. 그 틈을 타 혜원은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감히 저년이 날 물어? 아쉽네. 좋은 기회였는데….”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입맛을 쩍쩍 다셨다.

세두는 사무실에 숨어 이 광경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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