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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2. 2024

연인에서 원수로 - 2

치우가 금문성의 방에 들어섰다. 금문성이 물었다.

“보육원 일은 어떻게 됐어?”

“저, 그게 아직….”

“그럼 왜 거기 갔어? 소풍 다녀온 거야? 사장님, 치우는 또 그쪽 사정만 듣고 왔을 거예요.”

세두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금문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해결 방안은 가지고 왔어? 이제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해서….”

“봐요! 빈손으로 왔잖아요. 내가 처리할까요?”

풀 죽은 치우와는 달리 세두는 자신감이 넘쳤다.

“경매보다 우리에게 넘기는 게 낫다고 했지?”

“네.”

“이런 일은 치우보다 제가 딱이라니까요. 내가 갔으면 인주밥도 식지 않은 각서를 가져왔을 거예요.”

세두는 투덜거리는 척했다.


보름달의 빛이 창을 통해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원장의 얼굴을 비추었다. 혜원이 원장실로 들어가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 웬일로 술을 드세요? 무슨 걱정 있어요?”

“아니야. 혜성이와 애들도 건강하게 잘 크는데 걱정은 무슨. 오늘 밤 보름달이 휘영철 밝으니 네 엄마가 생각나서.”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제가 아빠를 모르겠어요? 얼른 말씀해 보세요.”

그녀가 조르자 원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빠 친구인 석구 아버지 알지?”

“장 사장님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그래. 사실 그 친구가 몇 달 전에 보증을 부탁했어. 은행 대출은 이미 한도가 차서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고… 그때 내가 보증을 섰지. 장 사장이 우리 보육원에 많이 후원한 건 너도 알 거야. 나와 친한 친구이기도 해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 근데 그 친구 회사가 부도가 났어. 엊그제 사채업자가 와서 보증인인 나에게 대신 빚을 갚으라는 거야. 이달 말까지 안 갚으면 집을 비우라고….”

“그 얘기를 왜 지금 하시는 거예요? 시간도 얼마 없잖아요.” 

“네 사정을 뻔히 아는데 말하면 걱정만 더 하지 않겠니? 네 월급의 절반을 보육원에 보태고, 혜성이 뒷바라지도 네가 다 하고 있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보증한 금액이 얼마인데요?”

“원금이 3억인데, 연체 이자까지 합치면 4억 정도 된다고 하더라.”

“4억이라고요? 왜 이자가 그렇게 비싸요?”

“장 사장이 급한 마음에 사채 중에서도 고리대금업체에서 돈을 빌린 것 같아. 그런데 앞으로가 더 문제야. 고리대금은 하루만 지나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까. 대출금이 3억인 것만 알고 보증을 서준 건 내 실수지, 누굴 원망하겠어. 다 내 잘못이야.”

원장은 가슴을 치며 자책했다.

“장 사장님께 연락해 보셨나요?”

“집에도 안 들어오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었나 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딘가에서 노숙을 한다고 하더라. 나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혜성이와 이 아이들은 어쩌면 좋단 말이냐.”

400만 원도 아닌 4억이라는 큰 돈을 어디서 구하란 말인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 이제 우리 어떡하면 좋아요?"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두 사람의 처연함에 보름달도 안타까운 듯 기울었다.


다음 날, 혜원이 사채 사무실에 들어서며 금문성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지나가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천사의 집 원장 딸인 유혜원이예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하지만, 긴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버지께서 금 사장님께 빚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가 빌린 것도 아니고 친구 보증으로 떠안게 되었어요. 지금 친구를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근데 갑자기 집을 비우라 하면 20여 명의 저희 가족은 갈 데가 없어요. 더욱이 어린아이들과 몸이 불편한 장애아도 있으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간호사라서 그런지 환자 대하듯 말은 잘하네.”

지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가씨, 아버지의 친구를 찾는 것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빚 받아야 할 우리가 지금껏 가만히 있었겠어? 알아보니 그 놈은 벌써 죽었어. 그런데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장 사장님이 죽었다고요!” 

세두의 말에 혜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금문성이 그녀의 몸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시체를 찾는 것보다 빚을 갚는 게 더 현명한 거야. 아버지를 대신해 여기까지 온 정성이 갸륵해서 한 마디 해주지. 그 집 경매에서 몇 번 유찰되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그 돈으로는 우리 빚을 갚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부족한 돈은 당신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하지. 아버지가 못 갚으면 딸인 아가씨가 몸을 팔아서라도 메꿔야하고. 우리는 저승사자에게도 빚을 받아내. 그러니 경매보다 우리에게 집을 넘겨. 그래야 아가씨 식구 세 사람이 살 전세방이라도 얻을 수 있어.”

“우리 가족은 수십 명이에요. 근데 갑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해요? 제발 시간을 좀 더 주세요.”

“내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금 사장님 말이 맞아요. 경매로 가면 한 번 유찰될 때마다 집값이 20%씩 떨어져요. 게다가 낙찰까지 빨라도 몇 개월, 늦으면 1년이 더 걸려요. 그동안 이자를 어떻게 감당할 건가요? 이 사무실 돈이 급전인 것으로 아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예요. 아가씨와 가족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지나의 말에 혜원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떨썩 주저앉았다.

“금 사장님, 많이 변하셨네. 아가씨 식구를 생각해서 전세방까지 신경 쓰고.”

“내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그래서 민 여사처럼 큰돈을 못 벌어요. 하하하.”

금문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지나를 비꼬았다.

“아버지가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돈을 갚거나 집문서를 넘겨줘야 해. 아니면 강제로 모두 쫓아낼 테니 그렇게 알아!”

세두가 험악한 표정으로 협박했다.

“이제 얘기는 다 끝난 것 같네. 아가씨, 잘 가시도록 배웅해 드려라.” 

혜원은 힘겹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은행 창구에서 혜원은 대출 상담을 받고 있었다. 

“집에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어서 부동산 담보대출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유혜원 씨의 신용으로는 2천만 원 대출이 가능합니다. 이 금액이라도 해 드려요?” 

“제가 급한 상황이라 더는 안 될까요?” 

“그건 곤란합니다. 대출 규정이 있어서요.” 

“그럼 그 금액이라도 해 주세요.” 

혜원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 벤치에서 바쁘게 전화를 걸었다. 

“미영이니?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집에 일이 생겨서 돈이 필요한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래, 고마워.” 

몇몇 지인에게 같은 요청을 반복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아빠, 3천 500만 원은 준비했어요. 이 돈으로 일단 시간을 벌어보세요.” 

그녀는 휴대폰에 저장된 치우의 번호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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