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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6. 2024

경마장에 가다 - 2

딱히 할 일이 없는 오늘, 치우는 바람을 쐬고 저녁에 술 한 잔 하기로 마음먹었다. 

옷을 챙겨 입으며 그는 차보다는 전철이 더 빠를 것 같아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경마장에 대한 이야기를 춘식에게 들은 적은 있지만, 본장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마공원역에 도착하자 전철 문이 열리며 많은 승객들이 승강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는 그 흐름에 휩쓸려 내렸다. 역사 안은 어두운 점퍼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평일 출퇴근 시간의 혼잡함에 가까웠다. 

곳곳에서 경마지를 판매하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경마지를 한두 부씩 겨드랑이에 끼고 역사를 빠져나갔다. 

모두들 얼굴에 희망이 가득하고 발걸음이 빨랐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온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점퍼를 입은 40대와 50대 남성들이었다. 

경마장 입구의 기둥에는 ‘세계 정상급 기수들의 자존심을 건 승부’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 

말발굽 모양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군밤, 꿀물, 호두과자 등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중장년층이라 그런지 군것질거리도 그에 맞춘 듯했다.  

유원지나 행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번데기 장수도 보였다. 사람들은 번데기 컵을 들고 호호 불어가며 정문으로 힘차게 들어갔다. 곧 자신이 번데기가 되어 나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초겨울의 날씨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어느 교회에서 나온 성도들이 커피를 타 주고 있었다. 그는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8년째 이 봉사를 하고 있는데, 경마장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많아. 밥을 굶고 오는 사람도 부지기수야. 빵 같은 간식을 나눠 주면 모두 받아가.” 

책임자인 듯한 남자와 보조하는 아주머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때 입구 쪽에서 한 마차가 천천히 다가왔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무료 8인승 꽃마차였다. 한 가족이 마차에 올라타고 마부가 신호를 주자 마차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신이 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치우는 문득 동심으로 돌아가 그 꽃마차를 타고 싶었다.

그는 창구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안내 센터에서 팸플릿과 경마공원 지도를 챙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속도로에서 하이패스를 이용하듯이 티머니로 바로 입장했다. 아마도 단골 고객을 위해 편의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스마트 게이트를 보며 ‘이제 교통카드까지 사용하니, 차비 마저 떨어져서 걸어 가는 사람들이 생기겠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관람대로 들어서자 거대한 경마 스크린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더욱 높게 느껴졌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수천 명이 좌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치우는 구관 4층 관람대에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춘식은 경마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페이지가 너덜너덜해 보였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그의 열정이 부럽기도 했다. 

“공부 열심히 하네.” 

“어제 밤새웠어. 이 다크서클 안 보이냐?” 

춘식이 싱긋 웃으며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이 녀석의 낙천적인 성격은 참 천성이야.’ 

민수도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경마지에 밑줄을 긋느라 바빴다. 

트랙 주변의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보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중년 여성들과 젊은 커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여자들도 꽤 많네.” 

“치우야, 여기 오는 여성들의 변천사를 말해줄까?” 

“어떤데?” 

“나는 여자의 행동을 보면 그녀의 경마 인생사를 잘 알 수 있어.” 

 춘식은 연설하듯이 입을 열었다. 

“한 달 된 여성, 조용히 앉아 순수한 얼굴로 경주를 바라보며 미소가 가득하다. 예쁜 손에는 천 원짜리 몇 장을 자랑스럽게 쥐고 있다.

두 달 된 여성, 남자친구가 생긴다.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아직은 밝고 해맑다. 가녀린 손에는 5천 원짜리도 보인다.

반년 된 여성, 남자친구에게 '이 바보야'라며 핀잔을 준다. 가끔 웃음도 보인다. 세종대왕 몇 장을 대수롭지 않게 들고 다닌다.

1년 된 여성, 이제는 혼자다. 독고다이로 경주에 참여한다. 아예 미소가 없다. 떨리는 손에는 경마지가 몇 장 늘어난다.

3년 된 여성, 사인펜 뚜껑을 질겅질겅 씹어댄다. 절대 웃지 않는다. 허리춤에 돈 가방을 차고 자세가 매우 당당하다.

5년 된 여성, 신발을 벗고 양반자세로 앉는다. 슬슬 욕도 나오기 시작한다. 거칠어진 손으로 경마지를 쌓아 놓는다.”

주변 사람들이 키득키득거렸다. 춘식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10년 된 여성, 욕은 기본이고 사인펜을 뒷머리에 꽂고 다닌다. 다른 여자들에게 조언을 한다. 손은 이미 두 배로 커졌다.

20년 된 여성, 마장에 도착하면 바로 눈을 감고 잠이 든다. 이제는 고수가 되어 베팅은 하지 않고 실눈으로 경주를 지켜본다.

30년 된 여성, 혼잡한 지하철 속에서도 떳떳이 경마지를 본다. 몸매는 두 배로 살쪄 있다.

50년 된 여성, 마권을 한 움큼 쥐고 있다. 100원, 300원, 500원. 구멍 수는 많지만 환수는 나온다. 별 욕심이 없어 보인다. 반찬거리 살 돈만 따도 웃는다. 이상으로 마 여사의 변천사를 마치겠습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며 요절 복통이다.

아나운서가 말과 기수를 소개하는 동안, 치우는 경주마에 대한 관심보다 기수에게 더 눈길이 갔다.

‘헐, 기수가 작네.’

그는 기수들을 바라보며 신이 정말 공평하다고 느꼈다. 사회에서는 핸디캡이 될 수 있지만, 경주에서는 말에게 부담을 덜 주어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창구와 발매기를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일을 저렇게 하라고 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피 같은 돈이 걸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기야, 이번만 베팅할 테니 돈 좀 줘. 제발!” 

“벌써 몇 번째야? 안 돼!” 

“진짜 요번이 마지막이야. 약속할게. 꼭!” 

앞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아내에게 애걸했다. 여자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돈을 받아낸 남자는 창구를 향해 달려갔다.

“춘식아, 마주, 조교사, 기수의 상금 분배는 어떻게 되지?” 

치우는 전부터 이점이 궁금했다.

“마주 78%, 조교사 9%, 말 관리사 7%, 기수 6%로 배분돼.” 

“1마신이 뭐야?” 

이 질문은 치우가 관람석에 들어설 때, 한 남자가 1마신 차이로 졌다며 주먹으로 벽을 치는 모습을 보아서였다. 

“1마신은 2.4m로 말의 코끝부터 엉덩이까지의 길이야.” 

“대단하네!” 

“뭘, 이 정도는 교과서 수준이지.” 

“피, 그러면 뭐 해! 매번 오링되어 차비나 구걸하면서.” 

민수가 비꼬며 혀를 날름거렸다. 경마지를 보던 치우가 다시 물었다.

“춘식아, 혼전경주가 뭐야?" 

“너, 조선말 몰라?” 

“응?” 

“한마디로 진흙탕 경주란 거지.” 

민수가 치우의 귀에 속삭였다. 

“치우 형, 내가 처음 경마장에 왔을 때 똑같은 질문을 했었어.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결혼 전에 뛰는 경주래.” 

“풋, 하하하!” 

치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배꼽을 잡았다.


총성의 울림과 동시에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들의 함성으로 경마장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주가 끝나자 적중한 사람들의 환호와 미적중한 이들의 탄식이 뒤섞였다.

“주식으로 돈 벌고, 경마로 돈 날리고. 에휴, 이 더러운 세상!” 

뒷좌석에서 푸념이 들려왔다. 이때 민수가 쇳소리를 냈다. 

“거 봐! 내가 그 번호로 가자고 했지? 그럼 맞았잖아!” 

“그건 배당이 없잖아. 경마의 묘미는 고배당을 맞추는 데 있는 거야.” 

“저배당이라도 적중이 중요하지. 경마장에서 이기는 놈이 대장이고, 따고 일어나는 게 장땡이야. 돈 잃고 속 좋은 놈이 어디 있어? 치우 형은?” 

“춘식이 따라갔어.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 있다고 하기에.” 

“참내, 따라갈 사람을 따라가야지. 경마가 공부해서 되는 거라면 고시생들은 다 재벌이 됐겠네!” 

민수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위를 둘러본 춘식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화창한 날에도 여기 오는 사람들은 왜 거의 우중충한 옷을 입고 있지? 너희는 알아?” 

“나도 그게 궁금해서 어떤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사인펜이 묻어서 그렇대. 마권 살 때 정신없이 사람들과 부딪치다 보니, 그때 검정색 사인펜이 옷에 묻어서 어두운 색을 입고 다닌다나?”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경마 끝나면 초상집 분위기인데 그런 옷을 입어야지.” 

“정답이네! 상갓집에 화려하게 갈 수는 없지. 이 사람들은 개선장군처럼 출근했다가 퇴근할 때는 패잔병으로 돌아가잖아.” 

치우는 경마지 앞면에 가득한 예상가들을 가리켰다. 

“춘식아, 이 예상가를 정말 맞히기나 하냐?” 

“그놈들 예상을 믿으면 10만 원 잃을 걸 천만 원 잃어. 다 사기꾼들이야. 자기 돈이 아니라고 막 지껄이는 족속들이지.” 

“맞아요. 100% 적중할 것처럼 현혹하여 음성을 듣다 보면 중독이 돼요. 난 지난달에 전화비가 95만 원이나 나왔어요. 베팅에 죽고 음성비에 죽고… 그놈들이 자격증이 있나요? 절대로 듣지 마세요.” 

춘식 곁의 남자가 흥분하며 덧붙였다. 이번에는 뒤쪽의 노인이 예상가 비판에 동참했다. 

“예상가의 우승마 추천을 보면 거의 다 비슷해요. 하루에 14, 15경주 중 그들이 맞히는 건 서너 경주에 불과하죠. 만약 내가 전문가라면 세 경주 정도만 추천하겠소. 근데 이놈들은 돈만 벌려고 모든 경주를 예측하죠. 이게 말이 돼요? 그럼 자신이 베팅해서 빌딩을 사지, 왜 욕을 먹으면서 예상가를 하냐 말이요. 현장에서 예측한다는 놈이 스크린을 보며 말이 좋다니 무겁다니 지랄하고. 우리 돈이 자기 돈인 양 마구 쏟아부어라며 염병을 하니 말이요.”

“맞아!”

"옳소!"

“예상가 자격시험을 도입해라!”

“사기죄로 고소하자!”

그동안 예상가들에게 쌓인 불만이 폭발하듯 사방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이일지라도 경마와 마시회에 대한 비난에 있어서는 동지애가 생기고 하나로 뭉친다. 아마도 패배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마는 마사회가 판을 벌려놓고 매 경주마다 세금을 떼어가는 구조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경마꾼끼리 싸우는 줄 모르고 마치 마사회와 사투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고스톱이나 포커에서 매 판마다 고리를 뜯으면 어떻게 될까? 하우스장만 돈을 번다. 경마도 마찬가지로 마사회만 배부르고 결국 경마인들은 패배하는 마이너스 게임이다.

“삼촌 왔네. 오늘 보는 경주가 있어?”

씨름 선수 같은 덩치의 중년 여자가 춘식에게 말을 걸었다.

“몇 경주가 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치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저 아줌씨, 아는 사람이야?”

“저번에 우연히 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중배당 한 구라를 선사한 후로는 볼 때마다 아는 척하네.”

“치우 형, 춘식 형이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경주를 맞혔는데, 그때 마침 저 뚱보 아줌마에게 알려준 거야.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줄도 모르고 말이지.” 

“야, 작게 말해. 쪽팔리잖아.” 

춘식이는 서둘러 민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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