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경주가 시작되기 전에 말 유도원이 고삐를 쥐고 빙빙 도는 모습이 모니터에 비쳤다.
이때 화면 하단에는 ‘사설경마로 적발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사설경마 이용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며, 신고자는 포상금을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순간 치우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저거야! 모두를 마떼기로 끌어들이는 거야. 돈만이 희망인 자들이 거지가 되면 절망만 남겠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목숨이니까. 근데 과연 한 달 안에 작업을 마칠 수 있을까? 그래, 마지막으로 달려보는 거야!’
치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활을 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어. 그의 손에는 화살이 두 개 있었지. 스승이 냉정하게 말했어. ‘화살 하나는 버려라.’ 초보자인 그 남자는 하나만 사용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 그런데 시키는 대로 하자, 멋지게 과녁을 맞혔어.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화살이 많아도 과녁을 맞히기 어려워. 하지만 화살이 하나밖에 없기에, 아니 마지막 기회이므로 온 정신을 집중한 거야.’”
갑자기 왜 이 말이 뇌리를 스쳤을까? 아마도 ‘마지막 기회’라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금문성은 한 달에 서너 번 경마를 하며 하루 베팅액이 100만 원 정도라고 들었다. 물론 그에게는 푼돈이다. 또 잃든 따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박에서 돈을 따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인데, 그만큼 자제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마가 승률이 낮은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는 경마에 대해 전혀 모른다. 이런 그들을 어떻게 마떼기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어.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지.’
치우는 이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마떼기가 뭐야?”
“마떼기는 마번이 틀리면 서로의 귀를 때리는 거야. 나랑 한번 해볼래?”
그 용어가 궁금해서 춘식에게 물어봤더니, 돌아온 조크로 웃은 적이 있었다.
작년에 치우는 친구인 김 실장과 한 도박 사무실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곳은 소규모 마떼기장이었다. 허름한 건물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들은 경마 중계를 하는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형님, 바쁘시네요?”
“바빠야 먹고살지.”
김 실장의 인사에 사장인 듯한 사내가 멋쩍어했다. 그가 치우를 친구로 소개하자, 사내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속삭이는 동안, 치우는 돈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사무실에서 하루에 만지는 돈이 몇십억이 넘어. 형님은 마주이면서 마떼기를 운영하고 있어.”
계단을 내려오며 김 실장이 한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마떼기의 본질을 몰라서 이게 무슨 사업이 될까 싶었지만, 그 일이 잘 돌아가면 엄청난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무관심하게 넘겼지만, 마떼기 운영은 사실상 황금알과 같았다. 단, 단속을 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줄기는 세웠으니, 곁가지는 형님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전에 김 실장 친구라고 인사했으니 경계하지 않을 거야.’
그는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떼기를 하던 형님, 한번 만날 수 있을까?”
“경마도 안 하는 네가 마떼기를 하려고?”
“아니, 궁금한 게 있어서.”
“안 돼. 그 형님, 올 초에 구속됐어. 아직도 수감 중이야.”
“그래…? 너는 마떼기에 대해 잘 아냐?”
“몰라. 난 경마 안 하잖아. 근데 왜?”
“아냐, 됐어. 다음에 연락할게.”
치우는 부풀었던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져 맥이 풀렸다.
“괜찮아. 깃털 하나 빠졌다고 몸이 망가지는 건 아니니까. 이제부터 하나씩 진행하면 돼. 꿈은 실패했을 때 끝나는 게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거잖아.”
그는 뒷말을 되새기며 휴게실을 나섰다.
마지막 경주가 끝나자, 출입구는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오늘의 패배를 기수와 말에게 돌리는 원망의 목소리와 승리를 자축하는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정문 앞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일회용 라이터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세 사람의 손에 각각 라이터가 쥐어졌고, 민수는 부지런히 몇 개를 더 챙겨왔다.
애연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점이 있다. 바로 가격 대비 라이터의 효용 가치다. 비록 400원에 불과하지만 구매할 때는 왠지 억울하고 돈이 아깝게 느껴진다. 이미 차 안이나 서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터가 없을 때 초조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흡연자들은 이 심리를 잘 알고 있어 라이터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모으게 된다.
치우가 라이터를 보니 ‘핸드폰 소액결제’라는 익숙한 문구와 핸드폰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스팸 메시지를 받으면 차단하곤 했다.
“민수야, 이 라이터에 적힌 핸드폰 소액결제가 뭐야?”
“그건 고객이 한 달에 30만 원 정도를 당겨쓰고 다음 달에 통신비로 갚는 방식이야. 신용카드 결제와 비슷하지만, 할부가 안 된다는 점이 다르지.”
“근데 경마와 소액결제가 무슨 관계가 있어?”
“소액결제는 원칙적으로 물건을 사는 데 사용해야 하잖아. 그런데 돈이 급한 사람들이 그 번호로 전화해서 물건을 산 것처럼 꾸미고 돈을 융통하는 거야. 쉽게 말해 카드깡이라고 보면 돼. 다른 점은 카드깡은 수수료가 20% 정도인데, 핸드폰 깡은 50%를 떼간다는 거지. 게임머니 등을 사고 되팔기에 자기들도 남는 게 없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알겠어? 둘 다 불법인 건 마찬가지인데.”
“그럼, 승인 금액의 절반만 준다는 거야?”
“당장 눈앞에서 말들이 뛰어다니는데,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이 있겠어?”
“그렇긴 하지. 절반의 돈으로 5배만 맞혀도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오니까.”
“문제는 그게 과연 적중하느냐는 거지.”
“원래 경마꾼들은 긍정적이잖아. 아마 매일 빌딩 사는 꿈을 꿀 거야.”
“핸드폰 깡도 꽤 짭짤한 사업이라더라. 그러니까 경마장까지 와서 영업하는 거겠지.”
춘식이 라이터를 켜고 끄며 말했다.
“남 얘기하네. 형도 한때 거기 단골이었잖아! 한 달 핸드폰 요금이 50만 원 가까이 나온 청구서들을 보고 감을 잡았지.”
“아니야, 인마. 그건 포커 게임머니를 산 거야.”
“아니긴. 형이 하는 게임 회사와 승인된 PG사가 다르던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 내가 졌다. 저놈은 귀신이야. 속일 수가 없어.”
춘식이 혀를 내둘렀다. 이제 핸드폰의 소액결제를 통해 서민들의 간까지 빼먹는 먹이 사슬이 경마장까지 침투한 것에 치우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들은 전철을 타기로 했다. 경마공원역은 출퇴근 시간대의 환승역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몇몇 사람이 주변을 살피더니 담장을 넘듯 개찰구를 그냥 통과했다. 차비가 없는 건지 아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왠지 애처로웠다.
세 사람은 저녁을 먹으러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패배의 원흉은 춘식 형이야. 알지?”
“그래, 내가 을사오적이다. 할복이라도 할까?”
“사장님, 여기 식칼 한 접시 주세요?”
이들의 개그에 치우가 맞장구쳤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더니 여덟아홉 살쯤의 여자아이와 어른이 느릿느릿 들어왔다. 치우는 두 사람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너저분한 옷차림으로 보아 그들이 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방향 감각이 없는 남자의 손을 이끌고 문가에 자리 잡았다. 탁자를 더듬고 있는 그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주인은 퀴퀴한 냄새가 나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봐요! 다음에 와요!”
“저기… 아저씨, 순댓국 두 개 주세요.”
“응. 근데 이리 와줄래?”
계산대에 있던 주인이 손짓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 없어. 저 자리는 예약 손님들이 앉는 곳이거든.”
주눅 든 아이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의 손에는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그럼 빨리 먹고 가야 해.”
주인은 순댓국을 내주었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아이의 수저는 소금 대신 자신의 그릇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 국밥에 있는 순대와 고기를 모두 아빠의 그릇에 담았다.
“아빠, 이제 됐어.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다고 하니까, 어서 밥 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치우는 부녀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계산대에 있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방금 전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얼른 돌렸다. 치우는 부녀의 음식값을 지급하고 가게를 나왔다. 이어 천사의 집과 원생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저 아이도 아빠마저 없다면 보육원에 가서 외로운 천사가 되겠지. 부모가 없는 삶은 척추뼈가 없는 삶이라고 하잖아.”
집에 돌아온 치우는 노트북 검색창에 ‘마떼기’를 입력했다. 그러나 마떼기에 대한 정보는 기대만큼 유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경마’를 검색하자 관련된 글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열심히 훑어보았지만, 마떼기와 연관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실망한 그의 눈에 ‘경마로 인해 파탄 난 우리 가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블로그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그 글을 클릭했다.
20여 년 전, 나는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 잘생긴 외모와 풍족한 가정환경, 나에 대한 배려... 모두 나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경마를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혼과 함께 시댁에서는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다소 큰 아파트를 마련해 주셨다. 남편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며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결혼 후 2년 동안 나는 어느 여자보다도 행복하게 지냈다고 자부할 수 있다.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남편이 점차 공장 일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꽤 많이 저축한 돈을 사업 확장을 핑계로 가져갔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베란다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경마에 상당한 돈을 잃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고백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편이 취미로 해보자고 한 말을 믿고 그곳으로 간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결국 우리는 3년 만에 공장을 접게 되었다. “7번, 힘내라!”고 응원하던 내 말은 “젠장, 너 뒈진다”는 식으로 변해갔다.
또 2, 3년이 지나고, 우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대출로 이사하게 되었다. 40평대에서 28평, 그리고 15평으로... 그때 하늘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어느새 내 전화번호부에는 친구들이 사라지고, 경마꾼들과 예상가 번호만 남았다. 가방마다 가득한 사인펜과 미적중 마권들, 정리조차 하기 싫은 지저분한 집안 모습...
여기저기서 거짓말로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친구들, 친정과 시댁, 친척들까지…
경마라는 도박은 정말로 애간장을 태웠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예전에는 소주 서너 잔이면 취하던 내가 이제는 두세 병을 마신다. 그래도 부부로서 서로를 위로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집을 팔고 전세에서 월세로 이사하는 상황이었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남편도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경마로 망가진 그에게는 일자리가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는 겨우 방 한 칸, 곰팡이 냄새가 나는 지하방에서 살고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는 통장에 3, 4억을 넣어 두고 마음껏 썼던 것 같다.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대상경주. 오전 장에서 딴 돈까지 합쳐 3-12에 380만 원을 몰빵했다. 내가 보기에도 분명 저배당인 댓길 경주였다.
아! 나의 절실한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나 보다. 그 자리에서 또다시 무너져버렸다.
남편과 미어터지는 지하철에 몸을 실어 집으로 돌아왔다. 10만 원만 덜 베팅했더라면 훨씬 더 편안한 길이었을 텐데… 후회가 밀려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소주를 한 잔 했다. 내일 공과금을 내야 하고 나갈 돈이 많아 걱정이 앞선다. 남편은 일찍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동성아~ 제발~ 이번 한 번만~”
지금 남편의 잠꼬대가 절규처럼 들린다. 이제 경마를 마음속에서 내려놓아야겠다. 남편도 인내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남은 인생을 정말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늘이시여, 저의 마지막 간절함을 저버리지 마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세요…."
여자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치우는 가슴이 쥐어짜듯 답답하고, 형언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