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 귀엽다고 마냥 받아 줬더니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물지 않겠어?"
금문성은 손등에 붙은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에 치우와 세두는 철렁한 마음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저, 당분간 쉬고 싶습니다.”
“왜?”
“…”
“얼마나?”
“한 달 정도요. 허락해 주십시오.”
“사장님,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어요. 요즘 치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세두가 지원 사격을 했다.
“그래,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그럼, 오늘 치우 송별식을 할까? 자, 다들 저녁 먹으러 가자.”
“저... 동생과 약속이 있는데요.”
치우가 망설이자, 세두는 빨리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빌딩 앞에서 치우를 기다리던 희우가 그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야!”
세두와 금문성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순간 희우는 두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며 걸음을 멈췄다. 치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녀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오빠, 저 사람들과 어떤 관계야?”
“거, 거래처 사람들. 너, 저 사람들 알아?”
희우는 겁에 질려 다리를 부들부들 떨렸다.
“왜 그래?”
“저, 저 사람들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들이 우리 아빠를 죽였어.”
“무슨 소리야?”
“아니,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치우는 동생이 몸이 안 좋다며 병원에 가야 한다고 둘러대고 지나가는 택시를 급히 세웠다.
“일단 집으로 가자.”
그날 치우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오빠는 군대에 있어서 잘 모를 거야. 그리고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얘기 하지 말라고 하셨어. 오빠가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희우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오빠는 건설회사가 망해서 아빠가 화병으로 죽은 줄 알지만, 그건 사실의 일부분일 뿐이야. 실제로는 아까 그 사람들이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거야.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미분양 아파트 두 채와 우리가 살던 집 덕분에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어. 아빠는 사업하는 친구에게 일정 금액의 배당금을 받기로 하고 아파트를 담보로 보증을 섰어. 근데 그 친구가 사업이 어려워지자, 아빠 몰래 사채를 끌어 쓰고 연락을 끊어버렸어. 그러던 어느 날, 사채업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빚을 대신 갚으라며 아빠를 협박하고 폭행했지.
아빠는 보증을 선 금액이 아파트 두 채 값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셨대. 그런데 빚은 어느새 몇 배로 불어나고 이자도 상상을 초월했어. 아빠가 따져보셨지만, 계약서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고 친구와의 연락이 끊겨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 그들이 다시 찾아와 집을 비우라고 하자, 아빠는 절대 안 된다고 버텼지만 결국 우리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어. 그리고 강제로 차용증을 쓰게 한 뒤 낙찰 대금도 모두 가져갔지.
그 후 아버지는 술에 빠져 병이 생기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도망간 친구와 사채업자들을 원망하셨지.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아빠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하는 나와, 수술을 받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자신을 탓하셨어.
아빠와 엄마를 죽인 사람은 바로 그 사채업자들이야. 그들이 정상적으로 돈을 받았다면 아빠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도 일찍 수술받아 살 수 있었을 거야. 그날 나는 무서워 방 안에 있었지만, 문틈으로 보았던 두 사람의 얼굴은 생생하게 기억해."
치우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그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는 슬프게 울고 있는 희우를 품에 안아주었다. 치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후 감정을 가다듬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기 힘들지?”
“아니야. 오빠가 집세, 학원비, 생활비 다 줘서 괜찮아."
“네 꿈이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유학 가는 거였지?”
“응. 그래서 매달 적금을 넣고 있어. 지금은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될 거야.”
“그래도 마음껏 입고 싶은 옷도 사고, 취미 생활도 즐겨.”
“그럼, 언제 유학비를 모으려고?”
“그건 걱정하지 마. 곧 오빠가 유학 보내줄 거야.”
“천천히 가도 괜찮아. 요즘 혜원 언니는 잘 지내? 나는 그 언니가 참 좋더라. 오빠는 자주 만나?”
“응, 응. 그럼.”
그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희우의 원룸을 나와 그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면 승부도 좋지만, 세상에 가진 것 하나 없는 나 같은 놈에게는… 이런 방법도 있지.”
치우는 몽롱한 술기운에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빚을 받으러 가서 채무자들을 괴롭혔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금문성과 세두가 아버지를 폭행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순간 그들이 치우 자신으로 변해 있었다. 이어 원장의 관을 붙잡고 오열하는 혜원과 원생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버지와 원장님을 죽인 거야!”
그는 미치도록 몸부림치며 목구멍에 술을 쏟아부었다.
민수가 보육원 마당에 들어서자 놀고 있던 혜성과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며 피했다. 혜성이 주춤하며 물러서자 민수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문밖으로 나왔고 그곳에 치우가 서 있었다. 혜성은 그를 보자 경계심을 드러냈다.
“정말 미안해. 형이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치우 형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혜성이가 그렇게 말해 주니 눈물이 나네. 우리 친구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지 않을래?”
망설이던 혜성은 친구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은 서로 팀을 나누어 축구를 즐겼고, 거동이 불편한 친구들은 열심히 응원에 힘을 보탰다.
얼마 후, 치킨과 피자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치우는 피자와 치킨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역시 아이들이라 어느새 지나간 일은 잊은 듯 웃고 장난치며 거리감이 사라졌다.
혜원은 학교 정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녀는 차갑게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다시 놀기 시작했다.
이때 치우가 두 사람에게 폭탄성 선언을 던졌다.
“나, 금 사장과 조세두, 민 여사를 파멸시키는 작업을 할 거야. 너희들 그 작업에 베팅하지 않을래?”
“세 사람을 상대로 칼춤을 추겠다는 거야?”
“그래. 까짓것 한번 추어보려고.”
“근데 왜?”
춘식과 민수가 동시에 물었다.
“그래야 저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쫓겨나지 않고 내 여자를 되찾을 수 있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두를 마떼기로 끌어들여서 거지로 만들어버릴 거야.”
“그게 가능해? 정말 작업을 할 용기가 있어?”
“두려움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게 진정한 용기야.”
“금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아마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걸.”
“우주로 도망가면 돼.”
“분명 금 사장이 복수할 텐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이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저번에 금 사장을 배신한 갈치란 놈, 지금 하반신을 못 쓴다고 들었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해. 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야.”
“치우 형, 마떼기에 대해 잘 알아요? 쉽지 않을 텐데…”
춘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민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설경마라는 것밖에 몰라. 이제부터 설계하고 작전을 짜야지. 쉬우면 재미없잖아?”
“그럼, 나는 안 할래.”
민수가 재빨리 발을 뺐다.
“너희보다 내가 금 사장을 더 잘 알아. 너희가 병신이 된다면 난 죽음이야. 춘식아, 네 꿈이 술집 사장이랬지? 민수는 큰 음식점을 운영하는 거고. 이 작업에서 베팅이 적중하면 분명 너희 꿈들이 이루어질 거야. 약속할게.”
“하긴, 우리가 법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 연놈들이 한 짓에 비하면.”
“아니, 어쩌면 법 밖에 있는 세상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지.”
춘식은 자신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민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