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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이 드러나다

by 이인철 Aug 19. 2024

세두는 밝은 표정으로 룸살롱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치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술을 가져와. 아가씨는 부르면 그때 들어오게 해.“

치우는 혀 꼬인 소리로 웨이터에게 말했다.

"웬일이냐? 나한테 술을 사달라고? 하긴 보육원 일로 힘들긴 하겠네. 금 사장도 너무했지. 그 일을 네게 맡기다니, 그 위인은 상도덕을 몰라도 한참 몰라요. 그러니 누가 끝까지 남아 있겠어? 치우야, 과거는 잊고 오늘은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셔보자. 그래도 너를 안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우리는 같은 처지의 동병상련이니까."

세두는 위로하는 척했다.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세팅하고 나가자, 치우는 괴로운 듯 술을 벌컥 들이키고 그에게 잔을 건넸다.

잠깐 사이에 양주가 여러 번 오갔고, 치우는 화장실에서 구토를 한 뒤 정신이 맑아졌지만, 세두는 점점 취해갔다. 술에 장사는 없다.

'인생이라는 무대는 사람들에게 연극을 강요해. 그래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가지. 때로 술은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경계심을 허물어. 이를 잘 활용하면 인간의 마음을 여는 훌륭한 기술이 될 수 있어.'

치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 실장님, 사채 사무실을 얻으신다면서요? 금 사장님과 결별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 바닥 소문은 KTX보다 빠르죠. 글구 제가 보기보다 오지랖이 좀 넓어요."

"결별이 아니야. 독립이지. 너나 나나 월급쟁이잖아. 우리가 퇴직금이 있냐? 4대 보험이 적용되냐? 다치면 생명 수당이 있냐? 현장에서 뛰니 국립학교 입학 1순위지. 회사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이직하는 건 당연한 거야. 마침 기회도 좋고."

"무슨 기회인데요?"

"아, 아니. 그런 거 있어."

세두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조 실장님의 독립을 금 사장님은 아시나요?“

“아직은 모르겠지만, 알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자기만 전주가 있냐? 내가 지금까지 전주가 없어서 그 아래에 있었던 거야. 앞으로 그 인간이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할지도 몰라.”

“전주가 민 여사님이죠?”

“응, 어떻게 알았어?”

세두는 술에 취해 무심코 인정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치우가 짐짓 찔러본 것에 말려들었다.

“며칠 전에 조 실장님과 민 여사님이 카페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리고 조 실장님이 사무실을 얻는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 파트너가 민 여사님이라는 걸 눈치챘죠.”

치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연거푸 마셨다.

“저, 이번에 금 사장에게 너무 실망했어요. 아니 배신감을 느껴요. 그 일 때문에 결혼이 깨졌고, 여친과도 끝났죠. 그 여자는 저를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생각해요. 이제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네 마음을 이해해.”

세두는 울먹이는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갑자기 치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저, 사무실을 나가겠습니다! 금 사장을 볼 때마다 여친에 대한 죄책감과 적개심이 솟구칩니다.”

“그럼, 다른 할 일은 있어?”

“그게 문제죠. 알다시피 제가 배운 게 이 분야밖에 없으니까요.”

순간 세두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민 여사는 치우를 좋아한다. 이놈을 곁에 두면 민 여사가 나를 도와줄 거야. 게다가 해결사로서 치우의 라인을 밑에 둘 수 있어.'

“나와 함께 일하는 건 어때? 페이도 금 사장보다 더 줄게. 너는 일 처리가 느리긴 하지만, 깔끔하게 마무리하니까.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결정하지?”

치우는 잠시 고민하는 체했다.

“그러죠.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요.”

“잘 생각했어. 이제 우리 한배를 탄 거다.”

“전에 민 여사님이 나에게 사채 사무실을 차리라고 했었는데….”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저에게도 사업 제안을 했었어요.”

“어떤 제안이었어?”

“조 실장님과 똑같은 내용이었지만, 저는 거절했어요."

“왜?”

“여자 친구와 헤어지라는 조건이 붙었거든요.”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세두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랬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빨리 말해 봐요?”

치우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세두가 망설이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럼, 저도 조 실장님과의 계약을 무효로 하겠습니다.”

잠시 갈등하던 세두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함께 일할 거니까 말해 주지. 사실 보육원 빚은 우리 사무실 것이 아니야. 다른 대부업체의 건데 민 여사가 대신 변제하고 우리 것으로 만든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민 여사의 계획에 이유가 있었네. 그리고 보육원을 빼앗으면 금 사장의 배당이 30%라지?”

세두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금 사장이 그 일을 나에게 시킨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민 여사가 금 사장을 통해 너에게 맡긴 거지.”

“그랬군요.”

“치우야, 어차피 너와 그 여자는 원수가 되었으니 지난 일은 잊어버려. 여자와 개는 돈과 같다고 하잖아. 쫓아가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따라온다고. 우리 이 기회에 민 여사를 이용해 돈을 왕창 벌어보자.”

치우는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더니 그의 얼굴을 향해 ‘후’하고 내뱉었다. 세두는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했다. 치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해결사 일을 그만두려고 해요. 조 실장님 말대로, 현장에서 뛰는 우리가 큰집 입학 1순위 아닙니까? 돈도 없고, 수발해 줄 사람도 없는데 학교 가서 양아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잖아요. 저도 민 여사를 등에 업고 금 사장처럼 관리하면서 돈을 벌어야겠어요. 그래서 조 실장님과 일하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뭔데?”

“동업을 하자는 거죠.”

“동업이라니? 어찌 말꼬락서니가 삐딱하네.”

세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와 민 여사 사이를 잘 아시니 결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치우는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세두는 다시 주판알을 굴렸다.

‘민 여사가 밀어준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을 거야. 투자 금액도 모르고, 당장 보육원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를 이용하는 거지. 그 여자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우야. 글구 일이 끝난 후에 팽 당하더라도 하소연할 곳이 없잖아. 금 사장에게 말할 수도 없고, 민 여사가 배신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거야. 근데 치우를 거쳐 돈이 들어오면 사고가 나더라도 일차적인 책임은 이놈에게 있지. 민 여사에게 사정하지 않고도 자금을 쓸 수 있어. 난 빨대만 꽂으면 돼. 그러니 지금은 치우가 꼭 필요한 존재야.’

“그렇게 하기로 하자.”

세두는 기꺼이 동의했다.

“사무실은 언제 오픈할 건가요?”

“한 달 정도 잡고 있어. 좋은 위치에 번듯한 사무실을 구하는 게 쉽지 않네. 내가 도와줄 일이 없을까? 이제 우리 한배를 탔으니 도 실장에게만 노를 저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괜찮아요. 그럼, 저도 그때까지 쉴게요. 금 사장에게 그렇게 말할 테니 곁에서 바람 좀 잡아 줘요.”

“그건 걱정하지 마. 도 실장의 부탁이니 당연히 도와야지.”

어느새 세두는 그를 도 실장이라고 깍듯이 불렀다. 반면 치우의 말투는 점점 짧아졌다. 그는 이번 기회에 완전히 주도권을 쥐려는 속셈이었다.

곧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항상 먼저 파트너를 선택하던 세두가 그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도 실장, 민 여사에게 잘해 줘. 이번에 민 여사 자금으로 우리 크게 한몫 챙기자고. 난 도 실장만 믿어.”

‘독사 같은 놈.’

치우는 룸살롱을 나와 비틀거리는 그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때 치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 김 실장이야. 저번에 네가 말했던 공장에서 난장질한 건.”

“알아봤어?”

“너희 사무실에 조세두라는 사람이 있냐?”

“계속 말해 봐.”

“그놈이 세종금융 애들에게 개인적으로 시킨 거래. 그날 공장에 빚 받으러 오는 업자의 일을 방해하라고.”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치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그 순간 핸드폰에서 ‘카톡! 카톡!’ 알림이 울렸다. 세두가 보낸 동영상이었다. 그 동영상에는 금문성이 혜원을 겁탈하려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는 세두가 그와 금문성의 관계를 끊으려는 의도를 넘어 철천지원수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동영상을 보는 치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두둑 뿌드득.’

손가락을 꺾을 때마다 뼈마디가 부딪히며 섬뜩한 마찰음이 났다.

“이 두 놈의 내장을 꺼내서….”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함박웃음을 띤 지나가 들어왔다.

“조 실장과 동업하기로 했다며?”

치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했어! 사실 조 실장이 언제 배신할지 몰라서 불안했는데, 이제 곁에 자기가 있으니, 안심이 되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지나는 그와 금문성 사이를 어떻게 이간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금문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치우를 독점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독립하겠다고 하니, 마치 앉아서 코 푼 격이었다.

“이젠 희망이 없으니 당장 해야겠죠.”

“하긴 돈은 쌓아두기만 해서는 안 되고 굴려야지. 조 실장 말로는 한 달 정도 쉬고 새 사무실에서 함께 일한다고 하던데?”

“아니, 여기 제 사무실에서요.”

“이렇게 코딱지만 한 곳에서? 내가 크고 멋진 사무실을 마련해 줄게.”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은 사무실이 아니라 돈을 보고 오죠.”

“이래서 내가 치우 씨를 좋아하는 거야. 겉모습만 신경 쓰는 금 사장과 조 실장은 자기에게 배워도 한참을 배워야 해. 맞지?”

치우는 대답 대신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왜 그렇게 했어요? 꼭 그래야만 했나요?”

“무슨 소리야?”

지나는 시침을 떼다 그의 무서운 눈빛을 보고 감을 잡았다.

“보육원 일은 안타깝게 생각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그건 내 책임이 아니잖아. 원장의 선택이었지.”

“도대체 왜! 왜!”

“치우 씨, 진정해.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당신이 그런 지저분한 곳과 엮여서 꿈을 펼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어. 오직 나만이 당신을 키워줄 수 있어.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그래서 모든 걸 각본대로 움직였나요? 여자 친구의 퇴근 시간까지 맞추면서… 이제 속이 후련하신가요? 이건 사랑이 아니라 더러운 집착이에요!”

치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흔들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

“그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게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흥분을 가라앉힌 지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모든 걸 잊어버려. 설마 치우 씨가 그 사람들을 책임질 생각은 아니겠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그들은 저를 원수로 여겨요. 사실 틀린 것도 아니죠. 저의 폭행을 직접 본 증인들이니까요. 전 이제 갈 데가 없어요.”

“왜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 지금부터 자기 곁에 내가 있잖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무엇이든 도와줄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야.”

치우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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