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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팅의 명분 - 2

by 이인철

민수가 보육원 마당에 들어서자 놀고 있던 혜성과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며 피했다. 혜성이 주춤하며 물러서자 민수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문밖으로 나왔고 그곳에 치우가 서 있었다. 혜성은 그를 보자 경계심을 드러냈다.

“정말 미안해. 형이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치우 형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혜성이가 그렇게 말해 주니 눈물이 나네. 우리 친구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지 않을래?”

망설이던 혜성은 친구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은 서로 팀을 나누어 축구를 즐겼고, 거동이 불편한 친구들은 열심히 응원에 힘을 보탰다.

얼마 후, 치킨과 피자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치우는 피자와 치킨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역시 아이들이라 어느새 지나간 일은 잊은 듯 웃고 장난치며 거리감이 사라졌다.

혜원은 학교 정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녀는 차갑게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다시 놀기 시작했다.

이때 치우가 두 사람에게 폭탄성 선언을 던졌다.

“나, 금 사장과 조세두, 민 여사를 파멸시키는 작업을 할 거야. 너희들 그 작업에 베팅하지 않을래?”

“세 사람을 상대로 칼춤을 추겠다는 거야?”

“그래. 까짓것 한번 추어보려고.”

“근데 왜?”

춘식과 민수가 동시에 물었다.

“그래야 저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쫓겨나지 않고 내 여자를 되찾을 수 있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두를 마떼기로 끌어들여서 거지로 만들어버릴 거야.”

“그게 가능해? 정말 작업을 할 용기가 있어?”

“두려움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게 진정한 용기야.”

“금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아마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걸.”

“우주로 도망가면 돼.”

“분명 금 사장이 복수할 텐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이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저번에 금 사장을 배신한 갈치란 놈, 지금 하반신을 못 쓴다고 들었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해. 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야.”

“치우 형, 마떼기에 대해 잘 알아요? 쉽지 않을 텐데…”

춘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민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설경마라는 것밖에 몰라. 이제부터 설계하고 작전을 짜야지. 쉬우면 재미없잖아?”

“그럼, 나는 안 할래.”

민수가 재빨리 발을 뺐다.

“너희보다 내가 금 사장을 더 잘 알아. 너희가 병신이 된다면 난 죽음이야. 춘식아, 네 꿈이 술집 사장이랬지? 민수는 큰 음식점을 운영하는 거고. 이 작업에서 베팅이 적중하면 분명 너희 꿈들이 이루어질 거야. 약속할게.”

“하긴, 우리가 법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 연놈들이 한 짓에 비하면.”

“아니, 어쩌면 법 밖에 있는 세상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지.”

춘식은 자신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민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운동장을 나선 아이들이 보육원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혜성이 아쉬운 눈빛으로 치우를 바라보았다.

“난 누가 뭐래도 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누나는 매일 밤 울어. 형, 다시 올 거지?”

“물론이지. 혜성이가 형을 믿으니까.”

치우는 그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때 혜원이 혜성의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대화할 수 있을까?”

“난 살인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살인자’라는 말에 치우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 민수의 눈치를 살피며 춘식이 말을 꺼냈다.

“오늘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많이 뛰었더니 피곤하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난생처음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민수야, 치우가 말한 거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해. 여기서 더 불구가 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

민수의 반응은 차가웠다.

“하긴, 이 정도 빌라에 살고 중고차라도 있는 것도 다 치우 덕분이지. 10년 만에 그 자식을 거기서 만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는 치우와의 재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춘식은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손님들에게 향수를 뿌려주고 팁을 받는 웨이터였다. 술에 취해 눈이 게슴츠레한 치우가 변기에 소변을 누고 있었다. 그의 몸에 향수를 뿌리며 아부하던 춘식은 팁을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 급히 쫓아가서 그를 불렀다. 이렇게 세 사람은 다시 만났다.

“치우를 만나기 전에는 나이트클럽 숙소에서 바퀴벌레처럼 살았지. 손님들에게 굽신거리며 시중드는 것에 한이 맺혀서 내 꿈이 술집 사장이야.”

“치우 형을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나. 그때 형들은 중학생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었지. 형이 나를 데리고 치우 형 집에 가는 날이 가장 좋았어. 그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정말 많았거든. 치우 형 엄마가 만들어준 햄 계란말이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치우는 내 사정을 알고 있어서 소풍 갈 때마다 내 김밥도 싸 오곤 했어.”

두 사람은 각자 추억에 잠기며 감상에 젖어들었다.


정원이 넓은 단독주택 앞에서 주춤거리는 그들을 치우가 이끌었다. 치우 엄마가 현관에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춘식과 민수는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이 음식 앞에서 주저하자, 엄마는 자리를 양보했다. 춘식과 민수는 허겁지겁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중학교 교실에서 치우와 춘식은 짝꿍이었다. 점심시간 전에 치우는 친구들이 없는 틈을 타서 그의 가방에 도시락을 넣었다.

봄 소풍의 식사 시간,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나무 아래 외톨이로 앉아 있는 춘식에게 그가 다가갔다. 치우는 가방에서 김밥과 음료수, 과자 등을 꺼내 돗자리에 펼쳤다. 음식을 먹고 나서 그는 사이다를 흔들어 춘식의 얼굴에 뿌리고 도망쳤다. 춘식은 뒤쫓아가서 앙갚음을 했다. 서로의 망가진 모습이 우스워서 깔깔 웃었다.

“치우 형 엄마를 보고 나서 우리 엄마가 그리울 때면 꿈속에서 치우 형 엄마를 떠올리곤 했어. 그렇게 보면 우리도 보육원 아이들과 다를 게 없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고아라고 놀림당하고… 내가 대들다 맞으면 형이 달려들어 패주곤 했지. 그때 내 눈에는 형이 최고의 슈퍼맨이었어.”

민수가 그를 향해 엄지척을 날렸다. 춘식이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치우를 믿고 한 번 해볼까? 죽음을 각오할 정도라면, 틀림없이 완벽한 계획이 있을 거야. 치우는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내는 데는 귀신이잖아. 그리고 잘 되면 우리는 사장이 되는 거고. 나는 치우를 믿어보려 해. 어차피 인생은 한 번뿐인데,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이 삶을 여기서 마무리하고 싶어.

평소와는 다른 단호한 춘식의 모습에 민수는 당황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액셀 한 번 밟아봐야지. 그렇지 않아?”

“형이 호강에 젖어 요강에 헤딩하려는 거야?”

“요강이든 변기든 우리 하자. 응?”

“금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 난 절대 못 해!”

민수의 태도는 여전히 확고했다.


지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커피숍에 들어왔다.

“금 사장님에게 한 달 휴가를 받았어요. 이제부터 저도 돈을 벌어야겠어요. 민 여사님이 자금을 지원해 주시면 바로 일을 시작할 거예요. 물론 조 실장이 사무실을 구하면 함께 할 거고요. 그때까지는 금 사장님과 조 실장에게는 꼭 비밀로 해 주세요.”

“그건 걱정하지 마. 오늘은 자기의 독립기념일이니까 내가 축하해줘야지. 멋지게 한 턱 쏠게.”

그녀는 이제 치우를 언제든지 편하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고, 그가 일을 빨리 시작할수록 자신의 수입이 늘어난다는 것에 좋아했다.

이렇게 치우는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비를 해결했다.

지나의 돈은 금문성과 같은 급전이므로, 1억을 빌리면 열흘 후 10%인 1천만 원의 이자를 갚아야 한다. 한 달이면 원금 7천만 원이 남는다. 이자는 나중에 빌린 돈으로 처음의 이자를 갚으면 된다.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리고 이자를 지불하면 작업비는 증가할 것이다. 한마디로 다단계 금융사기와 같은 구조이다. 기간이 길어지면 터지겠지만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안에 작업을 끝내야 하는 것이 치우의 고민이자 과제였다.


그는 작업비를 확보한 후 민수에게 편지를 주어 보육원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이라는 걸 알아. 원장님이 돌아가신 건 나 때문이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보육원을 지키는 것뿐이야. 그게 원장님께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사채업자에게는 한 달 안에 빚을 갚겠다고 약속해. 만약 못 갚으면 집을 넘기겠다는 각서를 써줘. 힘들고 괴롭겠지만 한 달만 참아줘. 나를 죽일 만큼 밉더라도 이 부탁만은 꼭 들어줬으면 해. 마지막 소원이야.’

혜원은 그의 편지를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혜성이 말했다.

“난 치우 형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어. 누나도 믿어봐.”

그러나 그녀는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거나 경매에 넘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치우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육원을 지켜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다른 방안도 없었다. 혜원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민수는 편지를 전하고 돌아서던 중, 어느 원생의 방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기도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님, 안녕하세요? 저는 상호예요.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아신다고 하셨는데, 맞나요? 그런데 원장님이 돌아가셨어요. 며칠 전, 깡패들이 원장님을 때려서 그런 것 같아요, 원장님은 저에게 아빠 같은 분이셨는데, 이제는 아빠가 없네요.

하나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였어요. 잘은 모르지만, 엄마가 저를 가졌을 때 드시던 약이 문제가 있었대요. 아빠는 저를 매우 부끄러워하셔서 여기 버리고 가신 것 같아요.

왜 아빠는 저를 그렇게 미워하셨을까요?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은 꾸중과 매 맞는 것뿐이에요. 엄마는 제가 다섯 살 때 어디론가 도망가셨대요. 아마 저를 싫어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저를 보러 오실 거니까요, 그렇죠?

아빠는 저를 보면 항상 엄마 이야기를 하며 자주 때리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아요. 아빠가 저를 때리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아 잠이 들곤 했어요. 그래서 제 별명은 아빠의 샌드백이에요. 하나님, 저는 학교에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다리를 저는 것 외에는 다른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모두 저를 멀리해요. 그나마 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철우가 그제 다른 학교로 전학 갔어요. 이제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저를 벌레 보듯 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시선이 너무 아파요.

다행히도 이곳의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대하지 않아서 좋지만, 곧 천사의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혜원 누나와 친구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무지 슬퍼요. 게다가 이곳을 떠나면 엄마와 아빠가 오실 때 제가 없어서 영원히 못 만나잖아요. 하나님,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될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원장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응답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제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나요? 혹시 하나님도 제가 창피하신가요? 그래도 괜찮으니, 저의 기도를 꼭 들어주세요…”

민수는 자기를 보육원에 맡기고 떠난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애타게 기다렸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 저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려면 작업을 해야겠지.”

그는 마음을 바꿔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민수야, 나를 믿고 어려운 결심을 해 줘서 고마워.”

“아직 형은 믿지 않지만 상호 때문에 하는 거야.”

“상호? 상호가 누군데?”

“그냥 그런 줄만 알아요.”

“아무튼 고맙다. 지금부터 맛데기 작업의 작전명을 ‘맛작업’이라고 하자. 반드시 한 달 안에 끝내야 한다는 것 잊지 마.”

세 사람은 사무실 문을 잠그고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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