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낙이 지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어떡하나? 이제 몇 시간 후면 재판이 끝나는데, 게임 아웃인 걸 알고 있지?”
“네 뜻대로 될 거라면, 진작에 너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아직 하루가 더 남았는데.”
“무슨 소리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야. 그리고 세상일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거 모르지?"
“마음껏 떠드세요. 곧 게거품을 물 녀석이 자존심은 있어서.”
석낙은 손목시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재판이 시작되자 지상이 격렬하게 나섰다.
“피고인은 사고 전에 백도진 씨와 운전을 교대했기 때문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백도진 씨를 심문하기 전까지 이 재판은 연기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백도진 씨는 거동이 불편하여 법정에 출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서면 진술로 대신하겠습니다.”
석낙은 서류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얼마 전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으러 경찰청에 갔던 증인이 출석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잠시 심 판사는 양쪽의 배석 판사와 상의하는 척했다.
“형사소송법 314조에 따르면 사망, 질병, 소재 불명 등의 사유로 진술할 수 없으면 예외로 인정되므로 검찰의 서면 진술 조서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지상은 분통을 삭이려고 숨을 골랐다.
그는 공판 준비 기일에 상태와 도진을 대상으로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신청했었다.
“이것마저 거부하면 강지상 성격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심 판사는 마지못해 ‘거짓말 탐지기 검사 신청서’에 서명했다.
거짓말 탐지 검사는 기계 측정에 대한 신뢰도와 기본권 침해 우려가 있어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상태는 찬성했지만, 도진도 순순히 응했다. 지상은 의아했지만, 도진은 거짓으로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거짓말 탐지의 원리는 허위 진술을 할 때 신체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질문에 대해 거짓으로 대답하면 심박수가 증가하고 호흡이 빨라지며, 피부에 땀이 나는 등의 증상이 그래프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체 반응에 의존하기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나 예민한 성격의 사람, 반대로 극도로 이성적인 사람에게서는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법원에서는 이를 정황 증거로만 활용하며,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선량한 사람을 범죄자로 낙인찍거나 범인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면담 조사가 진행된다. 거짓말 탐지에서 측정 장비의 검사 시간은 짧고, 피검사자와의 면담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이 과정에서 녹화된 미세한 표정을 통해 정밀하게 관찰된다.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0.3초 동안의 미세한 행동 변화는 있기 마련이다. 검사관은 그 순간을 포착하여 잡아낸다.
증언 중 분석 실장은 코를 만졌고, 구 경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끔벅였다. 영채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신호를 보였지만,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상태는 음성이었지만, 도진의 거짓으로 드러난 양성 반응은 기탁이 매수한 검사관에 의해 음성으로 바뀌었다. 지상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결과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이 검사는 백도진 측에 유리하게 작용하므로 재판에서 다투지 않았다.
지상이 방청석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백도진 씨는 오늘 하루로 끝나는 이 국민참여재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출석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범행을 감추려는 의도로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변호인은 백도진 씨의 출석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에 위축된 심 판사가 석낙에게 물었다.
“증인의 상태는 어떤가요?”
“심한 부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심 판사는 윤철과 눈빛을 교환했다.
“백도진 씨의 출석은 검찰의 서면 진술서로 대체하겠습니다.”
지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피가 거꾸로 솟았다.
심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증거 조사와 증인 심문에 대해 질문이 있으시면 질문지를 작성하여 재판부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일하게 연우의 질문지가 재판장에게 건네졌다. 모든 시선이 그 종이에 집중되었다. 질문지를 펼친 심 판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가 떨렸다.
“사고 현장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운전자를 알 수 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두 사람의 협공이 불을 뿜는 순간이었다.
“연우야, 나는 강하게 퍼부을 테니 너는 밀어붙여.”
“그럼 저는 태풍이고 선배님은 장대비네요.”
“맞아.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고. 보람 있게.”
이 대화는 연우가 질문지를 제출하기로 하면서 지상과 나눈 이야기였다.
여기저기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낙은 선수를 쳤다.
“재판장님, 검찰이 도로공사에 확인한 결과, 사고 시간대에 시설 점검으로 CCTV 영상이 삭제되었습니다. 게다가 복구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그래서 피고인 측이 복원 업체를 찾아내었고, 그쪽에서 내일 영상을 복구해 주기로 했습니다.”
“음, 음. 시간도 부족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심 판사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상이 작심한 듯 발언했다.
“현재 재판부는 진범을 밝힐 수 있는 CCTV 검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증인의 출석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에 변호인은 재판장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직무 유기로 고발하며 항소 법원에 기피 신청을 하겠습니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심 판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내 재판이 문제가 되어 공수처에서 조사를 받는 것은 판사로서 불명예지. 이 불명예는 평생 꼬리표로 따라다닐 것이고, 가문의 망신이야. 만약 기피 신청이 받아들여진다면, 편파성을 인정하는 꼴이지. 지금 흐름으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아."
심 판사는 속앓이를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공개 재판을 강행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윤철을 향해 이제는 무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CCTV 검증을 위해 재판을 하루 더 하겠습니다. 내일 변호인은 영상을 제출하고 검찰은 백도진 씨를 출석시키세요.”
“네.”
석낙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순간 연우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지상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CCTV 확인을 언급할 수 있지만, 분명 심 판사가 기각할 거야. 근데 배심원의 의견 제시는 국민참여재판의 필수 절차이기 때문에 재판장이 거부할 수 없어. 그리고 내일까지 재판을 해야 도진이를 심문할 수 있어. 만일 오늘 재판이 끝나면, 상태는 유죄가 될 거야.”
지상은 이전에 심 판사가 윤철의 수하였던 점에서 의심스러운 기미를 감지했다. 그래서 도진을 출석시키는 것이 유일한 스모킹건이라고 판단했다.
이때 불안한 표정의 기탁이 수찬에게 귓속말을 했다. 수찬은 급히 법정을 나갔다. 곧이어 기탁은 자리를 떠나 TF팀에 전화를 걸었다.
“빨리 9번 배심원의 신상을 자세히 조사해!”
그리고 중얼거렸다.
“9번은 도원그룹 취업 준비생인데… 그래서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돌발적인 질문을 했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이 모든 것이 세호 그 자식의 정보만 믿고 CCTV 복원 업체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해서야. 성과는 개뿔도 없으면서 말이야.”
그때 기탁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라고? 9번과 피고인이 중학교 동창이라고!”
기탁의 메모지는 수고비를 쥐여준 법원 경위를 통해 석낙에게 전달되었다.
“재판장님, 9번 배심원은 피고인과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검사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9번 배심원의 기피를 요청합니다.”
“9번 배심원, 이 사실이 맞습니까?”
연우는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혀 몰랐습니다. 동창 중에 저 친구가 있었는지조차… 그리고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서로 일면식도 없는 관계가 기피 사유라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만약 피고인의 고향이 서울이라면 여기 배심원님들의 고향은 모두 지방이어야 한다는 거네요.”
지상의 논리에 배심원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검사님, 중학교는 어디서 졸업하셨나요?”
“서울입니다.”
“동창생은 몇 명 정도였죠?”
“500명 정도입니다.”
“지금 그 친구들을 모두 기억하고 만나고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바로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석낙은 머쓱해졌다.
“검찰 측의 기피 신청을 기각합니다.”
연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방 중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신들이여, 학교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 반이었다는 것만은 들통나지 않게 해주세요. 같은 반 친구를 모른다고 누가 믿겠어요.’
다행히도 연우의 소망은 요원의 게으름 덕분에 실현되었다.
첫 재판이 끝났다. 벽시계는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청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복도에서는 기사를 송고하는 기자들의 소음이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무슨 재판을 이틀이나 하나? 할 일이 태산인데.”
“왜? 난 좋은데. 일당을 더 벌잖아.”
배심원들은 불만과 만족으로 나뉘었다.
보통 국민참여재판은 변론, 배심원단의 평결, 재판장의 선고가 하루에 이루어진다. 예외적으로 밤늦게 끝나거나 다음 날 새벽까지도 진행된다. 중요 사건은 일주일 내내 열린다.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어 법원 마당은 회색빛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4번 배심원이 연우에게 다가왔다.
“변호사님, 얼마 전 제 동생이 음주 운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어요. 저는 배심원들을 최대한 설득해서 유죄 평결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지켜보세요!”
그는 섬뜩한 경고를 남기고 정문을 나섰다.
‘오늘 저녁 태양에서 배심원을 매수할 텐데… 이거 정말 갈수록 태산이네.’
포장마차로 향하는 지상의 뒤로, 달빛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졌다.
<정의의 배심원 2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