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수요일)
오후에 약속한 손님이 왔다. 해진 옷을 입은 여성이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그녀는 동남아 출신이었다. 현우는 그녀 앞에 음료수를 내놓았다.
“저는 아무것도 없는데, 저 같은 사람도 대출이 가능할까요?”
그녀의 발음은 여전히 어눌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베트남에서 왔어요. 아직 많이 서툴러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슬픔이 묻어났다. 현우는 동정심이 생겨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대출을 원하시나요?”
“1차 수술에 3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네? 어디가 아프세요?”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고, 중병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뇌종양을 앓고 있어요.”
“그럼 빨리 병원에 가셔야 하지 않나요?”
그녀는 수술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현우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고향 사람을 만난 듯 자신의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저는 베트남에서 남편을 만나 한국에 와서 결혼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으로서 한국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겪어야 했어요. 저의 아들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을 경험했어요."
시댁은 그들을 내쫓았고, 지금은 지하 월세방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고 했다.
“뇌 속 깊이 자리 잡은 암세포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후각을 잃었고, 시력도 몇 미터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나빠졌어요.”
믿었던 남편은 사기를 당하고, 작은 직장을 전전하다가 최근에는 그 일자리마저 잃었다고 했다. 여자는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아이는요?”
“아이가 초등학생인데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저 자신이 너무 미워요.”
그녀는 아이의 급식비와 월세 20만 원 내기도 버거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의 가족과 한때 행복했던 가정을 되찾게 해달라고 성당에서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그래도 주님께서 저희를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겠죠. 바쁘신 와중에도 끝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우는 무심코 던진 질문을 후회했다. 극심한 가난, 시댁과의 갈등, 언어 문제, 문화 차이로 인한 불행이 머릿속 암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쓸쓸히 문을 나섰다. 현우는 이 삭막한 겨울 거리에서 외로운 이방인처럼 은행으로 향하는 그녀를 떠올리며 마음이 아팠다.
동수는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데 바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인터넷 포커 게임에 빠져 있었다. 동인이 없는 동안에는 온 정신이 그 게임에 쏠렸다. 어떤 날은 몇천억 원을 따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다가, 또 다른 날은 몇조 원을 잃고 시무룩해졌다.
며칠 전, 현우는 그와 다툰 적이 있었다. 게임할 때 울리는 스피커 소리 때문이었다. 전화 상담이나 손님과 대화 중에도 동수는 고음으로 켜 놓았다.
“동수야, 손님이 있을 때 게임하면 사무실 이미지가 좋지 않아. 정말 하려면 스피커를 끄거나 볼륨을 줄이는 게 좋겠어.”
“야, 소리가 커야 생생한 라이브를 즐길 수 있어. 글구 손님들은 대출에 관심이 있지, 이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그는 이렇게 둘러대며 현우의 부탁을 무시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얼굴을 붉혔고, 동인에게 상의할까를 고민했지만, 고자질하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갔다. 다음 날, 동수는 의외로 그의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현우는 계단을 올라가 처음으로 옥상 문을 열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며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허공에 연기를 내뱉었다.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거리를 방황하는 베트남 여성의 모습과 아이디 C423045-H143262의 비밀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첫눈이 내리려나…."
그는 회색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현수야, 오늘 방문하기로 한 손님이 내일 오후 2시에 온다고 연락이 왔어.”
현우는 연기한 손님의 미팅 시간을 일일 캘린더 메모지에 적었다. 이어 한 장씩 넘기며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 내용이 휘갈겨져 있었지만, 손님의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는 공통으로 적혀 있었다.
“손님의 예상 대출금을 알아보려면 은행에 조회해야 하거든요.”
이 말을 핑계로 그는 손님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물어보았고, 그 결과를 연락하겠다고 하며 전화번호를 요청했다.
아이디를 만들 때 필요한 것은 알파벳과 숫자이다. 이를 특정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인적 사항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야 잊어버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밀번호를 날짜로 설정하듯이 말이다.
의뢰인 서류에서 고유한 정보는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이다. 이 중 알파벳은 이름의 성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흔히 그렇게 하지 않는가! 김은 K, 이는 L, 박은 P로 표기하듯이.
숫자는 주민번호나 전화번호로 구성하고, 이 세 가지를 조합하여 아이디를 만들면 간편하다.
이렇게 정리한 현우는 11일과 12일에 고려금융에 접수한 카센터 사장과 트럭 아저씨의 서류를 보관철에서 꺼냈다. 이는 잔고 업체에 원본을 보내기 전에 복사해 둔 것이었다. 다행히 잔고 업체에서는 집과 직장 전화번호까지 요구하지 않았다. 비직장인도 잔고증명을 의뢰할 수 있고 요즘 집 전화는 큰 의미가 없다. 카센터의 사장은 최영성이고, 트럭 운전사는 현정복이었다. 순간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C423045의 C는 성 최인 CHOI 첫 알파벳이고, H143262의 H도 마찬가지이다.
이제야 전체적인 그림이 드러났다. 다음 단계는 주민번호와 전화번호에서 여섯 자리 숫자의 비밀을 찾아내면 된다. 최영성의 주민번호는 540324-1002431로, 423045는 주민번호의 앞자리 540324를 거꾸로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 너무 간단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현정복의 주민번호는 521210-1432620이다. 당연히 최영성처럼 012106이어야 하는데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큰 문제는 아니었다. 143262는 뒷자리를 앞에서부터 여섯 번째까지의 숫자였다. 두 사람의 아이디가 다른 이유는 아마도 서류 접수일의 차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마치 정보요원이 되어 암호를 해독한 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역시 동인의 주장처럼 규칙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내일은 ‘H705028’이나 ‘H217321’ 아이디와 1213 비밀번호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학 비자 용도로 보낸 한시영의 주민번호가 820507-2173214이기 때문이다. 이 기쁜 소식을 게임에 빠져 있는 동수에게 전하려다 멈췄다. 아직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현우는 이 정도의 파악으로 만족하며 우쭐해졌다.
“현수야, 이제 퇴근하자. 오늘 한 잔 할래?”
동수의 제안에 대신 주문해서 먹자고 했다. 야식집 스티커를 보고 술과 안주를 시켰다. 이야기 장소로는 식당이나 술집보다 사무실이 훨씬 편했다.
1년 전, 선배의 사채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그들과의 대화가 일상적이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작업에 관한 내용이어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스스로 경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수는 술이 들어가자, 동인과의 다툼을 다시 꺼냈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식이 내 마음을 몰라줘. 현수야, 정말 섭섭해.”
“모르긴, 다 알고 있어. 마지막 작업이라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 거야.”
“예전에는 그랬던 적이 없었는데, 경마로 돈을 다 날린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무시하더라고.”
“경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 얘기를 안 했구나.”
동수는 혀가 반쯤 꼬인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작업했잖아.”
“잔고증명?”
“응.”
“둘이 한 거야?”
“아니, 한 명 더 있었는데 너는 모르는 친구야. 근데 그 친구는 작업이 끝나자마자 잠수타서 연락이 안돼. 그래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몇 번 했는데?”
“두 번.”
“작업 금액은 얼마야?”
“3억과 5억.”
“어떻게 진행했어?”
“3억은 서류로, 5억은 바지 세워서 했지.”
“바지라니?”
“동인이가 명의대여자 광고를 냈잖아. 그 광고로 바지 역할을 할 사람을 구해서 잔고업체에 보낸 거야.”
“설마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과 거래하는 거지. 알면서도 하는 인간이 많아. 오히려 우리가 고분고분한 사람을 선택할 정도야. 그건 동인이에게 맡겨.”
그 순간, 현우는 열흘 전 K은행 앞에서 만났던 사내가 떠올랐다. 그는 동인이가 건네준 돈봉투를 가슴에 품고, 또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하며 커피숍을 나갔었다.
“저번에 K은행에서 돈을 인출한 남자가 바지야?”
“아니, 그 사람은 돈만 찾은 명의대여자야.”
“그럼, 그 남자를 바지로 내세우면 되잖아?”
“안돼.”
“왜?”
“그 사람은 10억 정도의 잔고증명을 의뢰하기에는 외모와 능력에서 의심받을 확률이 높아.”
“그렇구나. 근데 경마에서 얼마 잃었는데?”
“작업이 끝난 후 바지 수당과 경비를 제하고 셋이 나눴는데, 그중 내 몫을 경마에 다 날려버렸어. 그래서 이번 작업 비용을 동인이가 모두 부담하고, 나는 질질 끌려가는 처지가 된 거지.”
그는 자기의 행동을 자책하듯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순간, 현우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슈킹 금액이 40억이니 투자금을 제외하더라도 내 배당은 대략 10억 이상이 아닐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자기로서는 평생, 아니 환생해도 만질 수 없는 노다지였다. 동수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며 술이 부족한지 빈 병의 입구를 연신 빨았다. 현우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소주를 더 사 왔다.
“동인이와 나는 형제지만 너무 다르게 느껴져…”
현우는 그 독백의 의미를 이해했다. 외모와 성격이 친형제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인은 오락 수준으로 즐기는 반면, 그는 거의 중독 상태였다. 길가의 오락실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동인이지만, 나올 때는 동수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 번은 ‘바다 이야기’라는 성인 오락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버튼을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간에 수십 대의 기계와 손님들로 꽉 찼다. 화려한 바닷속 모니터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떠다니며 뽀글뽀글 물방울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버튼을 누르기조차 귀찮은지 아예 자동으로 설정해 놓고 졸고 있었다. 현우는 무슨 재미로 하는지 따분하게 느꼈다. 두 사람의 돈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감소 속도는 동수가 더 빨랐다.
갑자기 동인이 여종업원을 부르더니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만 원짜리 대여섯 장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그의 모니터에 고래가 나타나며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어 당첨을 축하하는 시끌벅적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곧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샘 속에 기계에서 상품권이 쏟아졌다. 상품권을 현금으로 교환한 결과 원금보다 수익을 올렸지만, 동수가 많이 잃어서 전반적으로 손해였다. 동인이 딴 돈을 전부 그에게 주고 달래서야 겨우 오락실을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