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수)
오전 10시에 퀵서비스가 동시에 도착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다한조명 대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회사 이름과 같아 친근감을 느낀다며 미소를 지었다. 필요한 자금은 5천만 원이며, 대출이 가능하다면 이번에 재기할 수 있다고 주먹을 쥐었다. 그의 자신감에 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대출 용도는 무엇인가요?”
“저는 몇 년 전 조명 사업이 실패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되었어요.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배운 기술이라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허름한 공간에서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현우에게 보여주었다. 나뭇잎 모양의 장식에 화려한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현우의 눈에도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것은 나뭇잎 무늬 조명으로, 특허청에 실용신안 등록까지 마친 제품입니다. 시장 반응은 좋은 편인데, 기계 설비가 없어 하루 종일 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열심히 만들어야 겨우 20개 정도 나오죠. 기계만 구입하면 하루에 300개 이상 생산할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여러 은행에 가봤지만, 신용불량자라 모두 거절당했어요. 담보로 잡힐 재산도 없고, 힘든 처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증을 부탁하기도 어렵습니다. 5천만 원만 있으면 철사를 구부릴 수 있는 기계와 땜질 설비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실장님, 제가 신용불량자인데 가능할까요?”
“저희는 고객의 실적을 바탕으로 대출을 진행하기에, 이전에 신용불량이었던 은행만 제외하면 상관없습니다.”
거짓말도 할수록 늘듯이 현우의 대답은 자연스러워졌다. 들뜬 남자는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뛰다시피 나갔다. 동수가 고려금융의 봉투를 열고 통장을 꺼내 겉면을 넘겼다. H1432620과 1212라는 숫자가, 대양금융 통장에는 051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동인은 화이트보드에 ‘고려 C423045-H143262, 1211-1212’와 ‘대양 0511-0512’라고 썼다.
“형들, 이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이틀 전에 고려로 보낸 아이디가 ABC 1234였는데 C423045로, 어제 보낸 아이디 ZXC 3672는 H143262로 변경되어 돌아왔어요. 비밀번호도 6422에서 1211로, 1718은 1212로 바뀌었죠. 우리가 보낸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제가 임의로 만든 것이니 신경 쓸 거 없어요. 앞으로 바뀔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비밀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에요. 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디데이에 입력해야 하니까요. 아이디는 틀려도 괜찮으니 안전장치 역할일 테고, 문제는 비밀번호가 세 번 틀리면 출금이 불가능해져서 의뢰인이 직접 은행에 가야 해요. 만약 의뢰인이 가지 않거나 미적거리면 돈이 묶일 뿐만 아니라 잔고증명이 불법이어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매번 다르게 생성하다 보면 그들도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분명 어떤 규칙과 근거에 따라 만들 거예요. 이걸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과제이자 난제죠.”
“고려와 대양에 보낸 게 이제 달랑 두 번이잖아. 좀 더 지켜보고 밥을 먹자!”
동수가 피곤한 표정으로 짜증을 냈다.
“형은 그게 문제야. 중요한 시점에 함께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한 거야. 만날 놀 생각만 하고. 형은 아예 없는 게 나아!”
동인이 작심한 듯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동수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내가 언제 항상 놀기만 했냐?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네가 작업비 대고, 이쪽에 대해 좀 더 안다고 뽐내지 마.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동수는 광대뼈를 씰룩거리며 금세라도 폭발할 기세였다. 순간 분위기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관망자가 된 현우는 은행에 갔던 손님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서둘러 문을 잠갔다. 동수의 반항은 곧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그래, 형 말 잘했네. 이제부터 난 빠질 테니 현수 형하고 잘해 봐.”
“인마, 걱정하지 마.”
“풋, 꽤 잘하겠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동인은 노트북과 몇 대의 휴대폰을 가방에 챙기고는 문을 꽝 닫고 나갔다. 현우가 그를 붙잡으려 계단을 내려갔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동인은 사무실 근처에 자신의 차를 절대 주차하지 않는다. 그는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
“가구점에서 내 차를 자주 보면 무의식적으로 차종과 번호판을 기억하게 돼. 또 주변의 CCTV나 다른 차의 블랙박스에 찍힐 수도 있어. 내 차는 대포차가 아니니까.”
그래서 동인은 300미터나 떨어진 복개천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 다녔다.
현우는 주차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지만, 그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어, 어. 이러면 나가리인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배당금과 복수는 이제 물거품이 되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순간 희망이 사라지자, 다리가 후들거려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동수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연거푸 담배를 피워댔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현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네가 좀 참지 그랬어?”
“현수야, 내 말이 틀렸냐? 자식이 말끝마다 명령하면서 사람을 무시하잖아. 싸가지 없는 놈.”
동수는 다시 불만을 쏟아냈다. 현우는 그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경청해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만약 그의 험담에 동조라도 한다면 언젠가 동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친형제니까.
현우는 그의 하소연을 흘려듣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C423045-H143262’와 ‘1211-1212’ 암호 퍼즐 맞추기에 몰두했다.
그때 상담 전화가 울려 집중하던 신경이 끊겼다. 당장 방문하겠다는 것을 내일로 미뤘다. 일일 캘린더 메모지에 전화한 손님의 인적 사항을 적다가 무심코 그의 눈에 1211이 띄었다. 그것은 바로 어제 날짜였다. 순간 화이트보드에 적힌 1211 숫자가 떠올랐다. 운 좋게도 비밀번호의 실마리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동수야, 오늘 며칠이지?”
“12월 12일이야.”
“어제는?”
“12월 11일이지. 너 지금 장난하냐?”
“고려에서 우리가 서류를 접수한 날에 비밀번호를 맞춘 거야.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도 비밀번호를 잊어버릴 염려가 없겠지.”
“야, 너 대단한데?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일일 캘린더에 메모하다가.”
“그럼, 내일 비밀번호는 1213으로 오겠네.”
“서류 접수일이 맞다면 말이야. 만일 비밀번호가 날짜순서라면 동인이가 말한 어떤 규칙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증명되는 거잖아. 역시 동인이가 똑똑하긴 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동인이를 칭찬한 것은 그의 의도였다. 어쩌면 그들은 형제라서 경쟁심이 더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라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동수야, 이제 그만 화 풀고 네가 먼저 전화해. 형만 한 아우 없다고, 네가 넓은 마음으로 받아줘. 사실 동인이가 속으로 형을 많이 생각하고 챙기는 거 알잖아. 나도 너처럼 동인이 같은 동생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
현우는 어떻게든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형제애를 강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다리 가랑이를 잡고서라도 읍소해야 할 처지였다.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던 동수가 슬며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어디야? 아까 내가 한 말에 많이 화났지? 네가 제일 힘든 건 알지만 순간적으로 욱했어. 원래 내 성격이 다혈질이잖아. 네가 이 단순한 형을 이해해 줘. 우리는 친형제잖아. 그래, 알았어.”
“지금 온대?”
“아니, 밖에서 일 보고 내일 나오겠대. 전화를 자기 휴대폰으로 착신시켜 놓으라 하네.”
“휴우.”
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답답했던 숨통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