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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9. 2024

첫 번째 암호를 풀다 - 1

 현재 이 화는 교정 중입니다


12월 12일 (수)


 오전 10시에 퀵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중년 남자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다한 조명 대표’라고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자기 회사 상호와 똑같아 친밀감을 느꼈다며 히죽 웃었다. 필요한 돈은 5천만 원으로 대출만 된다면 이번에 재기할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자신감에 현우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대출 용도는요?”

 “저는 몇 년 전에 조명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가 되었지요. 그래도 어려서부터 배운 기술이라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허름한 공간에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어요.”

 남자는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현우에게 보여 주었다. 나뭇잎 모양 장식에 알록달록 박힌 전구가 화려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조명에 문외한인 현우의 눈에도 너무 아름다웠다.

 “이것이 나뭇잎 무늬 조명인데 특허청에서 실용신안등록까지 받은 제품입니다. 시장 반응은 좋은 편인데 기계 설비를 갖추지 못해 온종일 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열심히 만들어야 20개 남짓이지요. 기계만 구입하면 하루 300개 이상은 너끈하게 나올 텐데요. 그래서 은행마다 문을 두드렸지만 신용불량자라 모두 거절을 당했죠. 담보 잡힐 재산도 없고 똑같이 힘든 지인들에게 보증을 서 달라기도 어렵네요. 5천만 원만 있으면 철사를 구부릴 수 있는 기계와 땜질 설비를 제작할 수 있거든요. 실장님, 제가 신용불량인데 가능할까요?”

 “저희는 손님 앞으로 실적을 쌓아 대출이 나가기에 전에 신용불량 된 은행만 제외하면 상관없어요.”

 거짓말도 할수록 늘듯이 몇 번의 상담으로 현우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들뜬 남자는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뛰다시피 나갔다.

 동수가 고려금융 봉투를 뜯고는 통장 겉면을 넘겼다. H1432620과 1212가 적혀 있었다. 대양금융 통장에는 0512라는 숫자가 적혔다. 동인이 화이트보드에 ‘고려 C423045-H143262, 1211-1212’과 ‘대양 0511-0512’라고 썼다.

“형들, 이 아이디와 비번이 무슨 뜻인 것 같아요? 그저께 고려로 보낸 아이디가 ABC1234인데 C423045로, 어제 보낸 아이디 ZXC3672가 H143262로 바뀌어서 왔어요. 비번도 6422에서 1211로, 1718은 1212로 변경되었죠. 우리가 보낸 아이디와 비번은 제가 임의로 만든 거라 신경 쓸 거 없어요. 앞으로 바뀔 아이디와 비번의 비밀을 푸는 게 과제예요. 그 아이디와 비번을 디데이에 넣어야 하니까요. 아이디는 틀려도 되기에 안전장치일 테고 문제는 비번이 세 번 오류 나면 출금을 못 하니 의뢰인이 직접 은행에 가야 해요. 그런데 의뢰인이 안 가거나 미적거리면 돈이 묶일뿐더러 잔고증명이 불법이라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거죠. 아이디와 비번을 매번 다르게 생성하다가는 자기네도 헷갈릴 수 있어요. 그래서 분명 어떤 근거와 규칙에 의해 만들겠지요. 이걸 알아내는 게 우리의 최대 관건이며 난제예요.”

 “고려에 보낸 게 이제 달랑 두 번이잖아. 좀 더 지켜보고 밥이나 먹자고.”

 동수가 피곤한 투로 인상을 찡그렸다.

“형은 바로 그게 문제야. 사람이 중요할 때는 함께 고심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게 없단 말이야! 맨날 놀 생각만 하고. 형은 아예 없는 게 나아!”

 동인이 작정한 듯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동수가 무섭게 자리를 박찼다.

 “야! 내가 언제 항상 놀기만 했냐?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네가 작업비 대고, 이쪽에 대해 좀 더 안다고 뽐내지 마.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나하고 현수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동수는 광대뼈를 씰룩거리며 금세라도 사달 낼 기세였다. 한순간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졸지에 관망자가 된 현우는 은행 갔던 손님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얼른 문을 잠갔다. 동수의 반항은 곧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그래, 형 말 잘했네. 이제부터 난 빠질 테니 현수 형하고 잘해 봐.”

 “인마, 걱정 마.”

 “풋, 꽤나 잘하겠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동인은 노트북과 몇 개의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는 문을 꽝 닫고 나갔다. 현우가 붙잡으려 계단을 뛰어 내려갔으나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동인은 사무실 부근에 절대 자기 차를 주차시키지 않는다.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구점에서 내 차를 자주 볼 경우 무의식적으로 차 종류와 번호판을 기억할 수 있어요. 또 주변에 설치된 CCTV와 다른 차의 블랙박스에 찍힐 수도 있죠. 내 차는 대포차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동인은 300여 미터나 떨어진 복개천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 다녔다.

 현우는 주차장을 향해 죽어라 뛰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으나 그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어, 어. 이러면 나가리인데….”

 눈앞이 캄캄했다. 배당금이고 복수고 이젠 물거품이 되었기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순간 희망이 사라지자 다리가 후들거려 걷기조차 힘들었다.


 동수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연신 담배만 뿜어 댔다. 그의 안색을 살피며 현우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네가 좀 참지 그랬어?”

 “현수야, 내 말이 틀렸냐? 자식이 말끝마다 명령하면서 사람을 무시하잖아. 혼자 실컷 하라고 해! 싸가지 없는 놈.”

 동수가 다시 게거품을 물었다. 현우는 그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경청해 주었다. 이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만약 그의 험담에 동조라도 한다면 언젠가 동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친형제니까.

 현우는 그의 하소연을 흘리면서 화이트보드에 적힌 ‘C423045-H143262’와 ‘1211-1212’ 암호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상담 전화가 울려 집중하던 신경이 끊겼다. 당장 방문한다는 걸 내일로 미뤘다. 일일 캘린더 메모지에 전화한 손님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다 무심코 그의 눈에 1211가 띄었다. 그것은 바로 어제 날짜였다. 순간 화이트보드에 적힌 1211 숫자가 스쳤다. 운 좋게도 비번의 실마리가 엉뚱한 것에서 풀렸다.

 “동수야, 오늘 며칠이지?”

 “12월 12일.”

 “어제는?”

 “12월 11일이지. 너 지금 장난하냐?”

 “고려에서 우리가 서류 접수한 날에 비번을 맞춘 거야. 이러면 그쪽에서도 비번을 잊어버릴 낭패가 없는 거지.”

 “야, 너 대단한데?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일일 캘린더에 메모하다가.”

 “그럼 내일 비번은 1213으로 내려오겠네.”

 “서류 접수일이 맞다면. 만일 비번이 날짜순이라면 동인이가 말한 어떤 규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증명된 거잖아. 역시 동인이는 브레인이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동인이를 치켜세운 건 그의 의도였다. 어쩌면 그들은 형제라서 라이벌 의식이 더 내재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감히 넘보지 못할 상대라면 자연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인간사다.

 "동수야, 이제 그만 화 풀고 네가 먼저 전화해. 형만 한 아우 없다고 네가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사실 동인이가 속으로는 형을 많이 생각하고 챙기는 거 알잖아. 나도 너처럼 동인이 같은 동생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현우는 어떡해서라도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형제애까지 부각했다. 솔직히 그보다는 자신의 꿈을 성취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다리 가랑이를 잡고서 읍소라도 해야 할 판이다.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던 동수가 슬며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지금 어디야? 아까 내가 한 말에 화 많이 났지? 네가 제일 고생하는 건 아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욱 했어. 원래 내 성격이 다혈질이잖아. 네가 이 단순한 형을 이해해 줘라. 우린 친형제잖아. ... 그래, 알았어.”

 “지금 온대?”

 “아니, 밖에서 일보고 내일 나오겠대. 전화를 자기 휴대폰으로 착신시켜 놓으라 하네.”

 “휴우.”

 현우는 숨죽여 심호흡을 토해 냈다. 꽉 막힌 숨통이 트이며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꾼 것 같았다.  



 12월 13일 (목요일)     

현우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동인은 잔고업체에 보낼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동수 형은 아직 술이 덜 깨서 늦을 거예요.”     

그의 말투에는 형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형, 고려금융 비밀번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1211과 1212는 접수한 월과 날짜와 같던데.”     

“어? 어떻게 알았어요?”     

동인은 당황했지만, 이미 자신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아이디 C423045와 H143262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너는?”     

현우는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이는 동인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동인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지만, 곧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도 어제 자정이 지나서야 풀었어요. 아이디는 의뢰인의 성의 알파벳과 주민번호에서 따온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아요. 보세요?”     

그는 화이트보드에 ‘최영성 540324-1002431, C423045’, ‘현정복 521210-1432620, H1432620’을 적었다.     

“문제는 아이디의 숫자예요. 주민번호 앞자리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될 텐데, 왜 뒤에서부터 했는지 의문이에요. 또 현정복의 아이디는 최영성과 다르게 뒷자리를 사용했죠. 결국 두 아이디의 규칙성은 알파벳 외에는 없어요. 만약 주민번호 13자리를 무작위로 조합한다면 그 변화는 무궁무진할 거예요. 이런 식이면 디데이에 어떤 방식으로 조합된 아이디를 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죠. 게다가 전화번호까지 섞인다면 아인슈타인도 당황할 거예요.”     

그는 답답함에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용히 듣고 있던 현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밀번호처럼 일정한 규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렇게 계속 아이디를 만들면 수십, 수백 개가 넘을 거야.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헷갈리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을 정해놓고 돌려야 그쪽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현우는 대화 중 그의 뛰어난 사고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동인이 자정 무렵에 아이디 비밀번호를 해독해 자신보다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해 위안이 되었다.     

“오늘 내려오는 아이디를 확인해 보자고.”     

동인은 화이트보드에 0511과 0512를 적었다.     

“0511과 0512는 대양에서 온 비밀번호인데, 이제 형도 감이 잡히겠죠? 05만 알면 되니까.”     

“올해가 2005년인가?”     

“정답! 만약 오늘 고려에서 1213이, 대양에서 0513이 내려온다면 비밀번호는 해결됐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대양의 입금 은행을 확정하는 건 쉽지 않네요. 첫날에는 의뢰인의 거래 은행 중 하나인 W은행으로 입금해 혼란을 주었고, 어제는 거래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으로 입금했어요. 대양금융 근처에는 W, K, S, J 네 개의 은행이 있어요. 그저께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W, K, S 세 개의 은행을 임의로 적어 보냈죠. W은행으로 입금하면 작업이 수월해요. 그 이유는 W은행이 주거래 은행이기 때문에 디데이에 입금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의뢰인이 거래하는 W, K, S를 제외한 J은행으로 입금했어요.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에요. 조금 후에 봉투가 오면 어느 은행으로 입금했는지 알겠지만,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네요.”     

그는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동인아, 대양의 입금 은행을 안다 해도 인터넷 뱅킹이 안 되면 이체할 수 없잖아?”     

“아니에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여기서 의뢰인은 작업 손님을 의미해요. 의뢰인의 인터넷 뱅킹이 가능한 통장을 미리 발급받는 거예요. 그런 다음 디데이에 대양에서 만든 통장 계좌번호를 그 은행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어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디데이 아침에 의뢰인에게 같은 은행 계좌를 하나 더 개설하라고 지시해요. 그리고 대양의 잔고증명금이 입금되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후, 의뢰인에게 다시 연락을 합니다. 오전에 개설한 통장을 분실 신고하라고 하면서 대양에서 개설한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죠. 의뢰인은 통장을 재발급받으면서 인터넷 뱅킹 신청을 하게 됩니다. 한 번에 모든 게 끝나는 거죠.”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받으려면 주민증이 필요하지 않나요? 이미 대양으로 갔잖아요?”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주민증과 운전면허증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작업하면 됩니다. 운전면허증으로도 통장 발급이 가능하거든요. 은행에 확인했고, 손님도 보내서 검증을 마쳤어요.”     

현우는 의구심이 커졌다.     

“대양에서 몇 시에 입금하나요?”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통장을 만들면서 입금했어요.”     

“시간이 촉박하지 않을까요?”     

“조금 빠듯하지만 가능해요.”     

“의뢰인에게는 어떻게 통장 재발급을 시키나요? 명분이 필요할 텐데 의심하지 않을까요?”     

“통장을 분실했다는 이유를 대면 됩니다. 돈이 급한 상황이라면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그래서 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죠. 이건 제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인은 시험지 답안을 외우듯이 술술 대답했다. 마치 예상된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저 자식의 진면목을 안다면 아마 사기꾼들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난리가 날 거야.’     

고려금융 봉투를 들고 온 퀵과 함께 눈이 충혈된 동수가 들어왔다. 동인이 꺼낸 통장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시영의 통장에는 H412371과 1213이 적혀 있었다. 비밀번호는 맞았지만, 아이디는 현우가 예상했던 H705028이나 H217321이 아니었다. 그러나 H412371의 비밀은 매우 간단했다. 그것은 한시영의 주민등록번호 820507-2173214의 뒷자리에서 끝에서부터 6자리 숫자를 나열한 것이었다. 전날 현정복의 아이디 H143262가 뒷자리 앞에서부터 나열된 것이라면, 한시영의 아이디는 그 반대였다.     

“으, 으…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동인이 야수처럼 신음했다. 현우는 그 신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적중률이 50%에서 33%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25%, 20%, 16.6%로 계속 줄어들 것이고, 확률은 반비례로 감소한다. 그러면 고려금융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디데이에 이체는 늦어도 은행 영업 시작 전에 완료해야 하며, 그 이후에는 40억을 인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된다면 새로운 아이디를 무한히 반복해야 할 상황이다. 게다가 반드시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두 번째 퀵으로부터 받은 대양금융의 봉투를 열어본 동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양의 입금 은행이 또 예측을 빗나갔어요.”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는 W, K, J은행을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보냈어요. 저번처럼 거래가 없는 S은행으로 입금될 줄 알았는데… 이건 거래하는 은행 중 하나인 K은행 통장이에요. 처음은 W은행, 다음은 J은행, 이번에는 K은행이네요.”     

동수가 흐릿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동인아, 대양에서 은행을 자주 바꾼다는 건 이미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혹시 전에 슈킹 당한 경험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어. 잔고업체가 많지 않고 거의 명동에 있으니 소문은 금세 퍼질 거야. 또 유유상종이라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도 있지. 특히 이 업계 사람들은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야. 내일 고려와 대양에 잔고증명을 의뢰해서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동인은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후, 세 번째 잔고업체인 서울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서울금융은 대양과 마찬가지로 현우가 의뢰인 서류를 보내면 그에 따라 통장을 개설한다. 동수가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아냈다. 통장에는 비밀번호 0248이 적혀 있었다.     

“수, 수표로 입금됐어!”     

동인이 비명을 질렀다. 통장에는 어제 날짜로 1억 원의 자기앞 수표가 입금되었다가 오늘 출금되어 잔액이 0원이 찍혀 있었다. 순간 세 사람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비밀번호의 비밀을 분석하느라 바빴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필요가 없었다.     

“무제한으로 잔고증명을 해 준다는 자신감이 여기 있었네.”     

동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고려와 대양은 서류 접수 시 잔고증명을 5억 원까지만 해주며 현금으로 입금한다. 이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이런 점에서 수표로 입금하는 서울금융은 완벽한 보호망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의뢰인은 돈을 벌어주는 고객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더욱이 동종 업자가 보내는 서류는 그 내막과 허점을 잘 알기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잔고증명 자체가 불법이라는 한계에서 출발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수표로 입금하면 다음 날 오후 2~3시에 돈을 찾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오전에 통장이 왔어?”     

“원래는 안 되지만 서울금융과 은행 간의 관계가 좋다면 그 전에 인출이 가능해요. 현수 형이 그 은행의 VVIP 고객이라면 그 정도 편의는 봐주지 않겠어요? 하지만 수표로 입금된 상황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죠.”     

“동인아, 이제 슈킹 금액이 30억으로 줄어든 거야? 아~ 이거 정말 짜증나네.”     

동수는 울상이 되었다. 현우도 자신의 배당이 줄어든 것에 속으로 불만이 쌓였다. 동인은 창가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굳게 다문 입술이 고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들, 서울금융 작업은 여기서 포기하자.”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현우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작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동인아,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서 인출한 시간이 몇 시일까?”     

“은행이 문을 열자마자 바로 인출했겠죠. 사채업자 입장에서는 돈을 빨리 찾아야 유리하니까요.”     

“은행에서 그 시간을 알려줄까?”     

“그럴 것 같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동인은 은행 직원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영업 시작과 동시에 인출이 이루어졌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인출한 시간을 알아서 뭐 하려고?”     

“이건 가상의 상황인데, 수표가 현금으로 바뀐 후 돈이 실제로 전달되기까지 몇 초 동안은 현금 상태로 남아 있을 거야. 이 짧은 순간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     

“형의 이론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요. 현금으로 1초만 있어도 이체가 가능하죠.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직원이 조작하는 데 몇 초가 걸리잖아요. 미리 타행 자동이체를 등록해 두고, 현금으로 바뀌는 순간에 엔터를 누르면 되는 거죠. 문제는 타이밍인데, 예상 시간보다 미리 모두 모니터 앞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해요. 포인트만 정확히 맞춘다면 성공할 수 있어요.”     

“와~ 이건 완전히 SF 영화 같아!”     

동수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동인도 숨은 그림을 찾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 친구는 하나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아는구나!’     

현우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서울금융의 비밀번호만 알면 포기할 이유가 없어요. 월요일에 서류를 제출하고 비밀번호가 0248로 그대로 유지될지 바뀔지를 확인해보죠. 화이팅!”     

동인은 잃어버린 돈을 되찾은 듯 흥분했다.     

하루도 아닌 시간당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런 작업이 또 있을까! 현우는 디데이까지 자신의 체중이 절대 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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