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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기회가 오다

by 이인철

12월 12일 (수요일)


“동인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요?”

“바지 작업을 할 업체가 한양금융이라고 했지?”

“맞아요.”

“수일금융으로 바꿀 수 있을까?”

“왜요?”

현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동인은 어리둥절했다.

“사실은….”

“뭔지 빨리 말해봐. 수일금융은 또 뭐야?”

동수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이 사건의 전말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무단횡단이었기에 보상금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때 현우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형편은 급격히 나빠졌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작은 가게를 열었지만, 세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큰 마트로 확장했다. 이때 ‘돼지 엄마’라는 계주의 소개로 사채업자인 복 사장의 돈을 빌렸다. 마트는 엄마의 친절과 부지런함 덕분에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엄마는 복 사장의 빚을 갚기 위해 돼지 엄마에게 계를 들었고, 기다리던 순번이 돌아왔을 때 계주가 잠적해 버렸다. 복 사장은 차용증을 근거로 마트를 경매에 넘기고 자신이 낙찰받아 가로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몇 배의 권리금을 받고 넘겼다.

그 후 복 사장과 돼지 엄마가 마트를 빼앗으려 작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엄마는 그 충격으로 조기 치매에 걸려 현재 요양병원에 있다.

그런데 작년에 우연히 강남역 근처에서 그 복 사장을 마주쳤다. 쭉 찢어진 눈매에 두툼한 입술, 콧잔등의 검은 점. 한눈에 봐도 그놈이었다. 뽈록한 똥배를 내밀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멧돼지가 돌진하는 것 같았다. 현우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옛 기억은 또렷했다. 순간 그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찢어 죽일 놈!”

현우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복 사장이 들어간 빌딩을 따라갔다. 그는 ‘수일금융’이라는 간판이 붙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때 귀중품으로 치장한 여자가 뱃살을 출렁이며 현우 앞을 지나쳤다. 바로 돼지 엄마였다. 불쾌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녀는 사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현우는 문틈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 왔어?”

“역시 잔고증명이 돈이 되네.”

“내가 그랬잖아. 자금 회전이 빠른 게 최고라고.”

“우리 자기 최고야!”

두 사람은 서로의 스킨십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동업자이자 애인처럼 보였다. 복 사장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팔뚝의 뱀 문신이 꿈틀거렸다.

“인간 쓰레기들!”

현우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지 이 말뿐이었다. 복수는커녕 생활고에 허덕이는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인과 작업하면서 이제야 원수를 갚을 기회가 찾아왔다.

현우가 알아본 바로는 복 사장이 하는 잔고증명은 한양금융의 방식과 같았다.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 현수야, 이번에 복수하면서 돈도 챙기면 일거양득이잖아.”

동수가 씩씩거리며 힘을 실어 주었다. 현우는 사건의 개요만 털어놓고 집안사는 부끄러워서 밝히지 않았다. 어느새 수일금융과 통화한 동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현수 형, 수일의 잔고 방법이 한양과 똑같네요. 바지도 필요하고 첫 거래는 10억까지만 해 주고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만약 더 힘들면 이런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할 수 없잖아.”

의뢰인이 사무실에 방문하는 것은 잔고 업체 입장으로는 가장 안전한 방안이다. 본인이 직접 의뢰했는데, 투명 인간이 아닌 이상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인아, 수일 작업을 내가 해도 될까?”

“네?”

“내 손으로 복수하고 싶어서.”

“처음이라 쉽지 않을 텐데….”

“일단 해보고 어려우면 말할게. 응? 응?”

불안한 표정의 동인에게 그는 간절히 매달렸다.

“그래, 현수를 한번 믿어 봐. 지금까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 왔잖아. 난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아!”

“정말 할 수 있겠어요?”

“너, 현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구나.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동수의 격려에 동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결정을 내리는 동안, 현우는 숨이 막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

동인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사실 현우는 수일금융 작업에 대해 미리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개인적인 부탁을 하면 그것을 빌미로 동인에게 끌려갈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작업의 성공을 100% 확신하게 되었기에 그 명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며칠 전, 심부름센터에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우야. 수일금융 복 사장의 이름은 복칠구인데, 그는 바지 사장이야. 실질적인 전주는 박후자라는 돼지 엄마야.”

“더 없어?”

“복 사장은 세 번 이혼해서 전처들에게 위자료로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지금은 개털이야. 박 후자의 기둥서방으로 겨우 기생하고 있어.”

“수고했어. 다음에 한 잔 살게.”

현우는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받는 것이 원수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생명 아닌가! 한편으로는 과거 사건을 드러내어 진실을 밝히려 했지만, 그 생각은 접었다.

세월이 흘러 증거는 없고, 무엇보다 공소시효와 소멸시효가 지나버렸다. 괜한 감정싸움으로 얼굴만 팔려 작업 후 원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무익한 다툼보다는 엄마가 당한 피해액의 10배를 빼앗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엄마,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어.’

현우는 돈가방을 품고 요양병원으로 달려가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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