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수요일)
명의대여자를 만나러 갔던 동인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들어왔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응.”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이야? 수고비는 얼마 준다고 했어? 이제 세 명만 더 구하면 되는 거지?”
동수의 질문이 이어졌다.
“40대 후반의 아줌마인데, 큰돈을 찾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나이지. 수고비로 억당 100만 원을 주기로 했고, 머리 손질비로 30만 원을 줬어. 그렇게 해야 부담을 느끼고 펑크를 내지 않을 거야.”
그는 여자에게서 받은 각서, 등본, 인감 등을 동수에게 보관하라고 건넸다. 각서는 잔고 업체 서류 중 하나로, 잔고증명금을 인출해 도망가거나 잠적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각서는 형식적인 것이며, 만약 명의대여자가 돈의 출처를 눈치채고 자기 돈이라고 억지를 쓴다면 어쩔 수 없다.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재판을 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잔고 업체가 잔고증명이 불법이어서 신고를 못 하는 것처럼, 현우도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잔고 업자는 본인 돈이지만, 이들에게는 범죄 수익금이므로 절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여자는, 특히 가족 관계와 주거지가 확실한 사람이어야 해.”
이것이 명의대여자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며 동인은 신중하게 선택했다.
“현수 형, 내일 고려와 대양에 한시영을 작업용으로 보낼 거니까 서류 작성 좀 부탁해요. 그리고 되도록 글씨를 여성체로 써 주세요.”
동인은 자리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고려금융이죠? 8천만 원짜리 잔고증명서인데, 호주 유학 비자용이에요. 내일 오전에 서류를 보낼게요.”
그는 대양에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어 다시 천천히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서울금융이지요? 저번에 전화한 김 실장입니다. 수수료를 좀 낮춰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내일이라도 의뢰하겠습니다. 억당 28만 원까지 가능하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동수가 물었다.
“서울금융은 뭐야?”
그는 처음 듣는 업체에 대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 통화한 잔고 업체인데, 날 기억하네. 이번에 몰아서 한 번에 끝내려고 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잔고증명 금액을 무제한으로 받겠다고요? 물론 그러면 저희에게도 좋죠.”
동인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서 온 전화야?”
“방금 통화한 서울금융.”
“거기서 무제한으로 해 준다고? 야호! 10억, 아니 100억을 넣는 거야. 현수야, 강남에 있는 빌딩 가격이 얼마 하냐? 이번 기회에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가 되어보자!”
동수는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었다.
“형,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어.”
“왜?”
“그쪽에서 100억을 해줘도 우리가 실제로 작업할 수 있는 금액은 고작 5억이야.”
“왜 그런 거지?”
“대부분의 은행이 1일 이체 한도가 최대 5억이거든.”
“아, 그렇구나. 괜히 헛물만 켰네.”
동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소파로 갔다. 동수가 따라 앉으며 나지막히 물었다.
“이번에 몇 군데 작업할 건데?”
“마지막이니 최대한 해야지. 4개까지는 무난할 것 같아.”
“4개 업체나!”
전혀 뜻밖이라는 듯 동수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고려, 대양, 서울과 바지를 보내야 하는 한양금융. 한양을 작업하려면 남자 바지가 있어야 해. 명의대여자 광고가 나갔으니 곧 연락이 올 거야.”
“동인아, 바지 구하기 힘들면 서류만 보내는 업체를 더 알아보는 게 어때?”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고려, 대양, 서울이 첫 거래 시 잔고증명을 많이 해 주는 곳이야. 업체가 많을수록 정보 파악이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
“듣고 보니 그렇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현우는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만약 동인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현우의 깊은 복수심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다. 수일 금융은 서류 접수가 아닌 의뢰인이 사무실을 방문해야만 잔고 증명을 해 주기 때문이다.
“슈킹 금액이 얼마야?”
“40억.”
“40억? 그게 가능해!”
동수는 설레임으로 몸을 떨었고, 현우도 작업 금액에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인이 능글맞게 말했다.
“푼돈으로 장난치는 놈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50억, 100억이 되면 경제사범으로 높이 불러 줘. 마지막인데 우리도 그 정도 반열에 올라야 하지 않겠어?”
“그럼, 당근이지.”
“사실 재벌들은 수백억을 횡령해도 사회 공헌 같은 이유로 쉽게 풀려나는 세상이니까.”
동수의 맞장구에 현우도 거들었다.
“어떻게 할 건데?”
“고려, 대양, 서울은 서류로 5억까지 잔고 증명을 해줘. 그 이상은 본인이 사무실에 가야 해. 한양은 무조건 의뢰인이 사무실에 가야 하고, 첫 거래는 10억까지야.”
“업체마다 잔고증명 방식이 다르고, 왜 이렇게 복잡해!”
동수가 짜증 섞인 투로 언성을 높였다.
“각자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최선의 방어책을 쓰는 거야. 마치 컴퓨터 백신처럼.”
“그럼, 우리가 바이러스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그것도 고성능 바이러스.”
“뭐야? 다행히 악성 바이러스는 아니네.”
“크크…”
“킥킥…”
두 사람은 서로의 말장난이 재밌는지 피식거렸다.
“그러면 슈킹 금액이 25억인데 왜 40억이야?”
동수는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확신하며 물었다. 현우도 가세했다.
“서류를 세 곳에 두 개씩 넣으려는 거야?”
“그건 안 돼요. 하루에 한 건 보내다가 갑자기 두 건을 의뢰하면 금액이 커져서 의심받을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40억이 되냐고? 빨리 말해봐.”
“세 군데에 의뢰인이 직접 잔고증명을 하는 것처럼 해서 서류를 보내는 거지.”
동인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서류로 세 건을 처리하고, 손님이 잔고증명 광고를 보고 의뢰하는 것처럼 하는 거야. 5억에 6을 곱하면 30억이 되고, 여기에 한양 10억을 더하면…"
"아! 그래서 총 40억이 되는 거구나.”
그제야 동수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도 그의 계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양쪽으로 두 건씩 의뢰하면 어떨까?”
현우는 순간 더 많은 배당금에 욕심이 나서 제안했다.
“와~! 그러면 70억, 70억이네. 야호!”
동수가 신나서 책상을 두드렸다.
“마지막이라 저도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왜?”
“물론 서류와 사람을 보내는 건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돈을 인출하는 거죠. 오전 내로 40억을 찾는 것도 시간이 촉박할 수 있어요. 그 이상은 아예 무리예요.”
“오전 중으로?”
“네. 인출은 반드시 오전에 끝내야 해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거든요. 어쩌면 돈가방을 든 아줌마와 경찰이 함께 돌아올 수도 있어요. 상상만 해도 아찔하죠. 여기까지가 우리 몫이라고 생각해요.”
현우는 그의 냉철함과 절제력에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돈다발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한시영의 서류 작성을 시작했다. 평소 자신의 글씨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땀을 흘렸다. 표준도 없는 느낌으로 여성체로 보이게 하는 것이 창작만큼이나 힘들었다.
현우는 내일부터 오전에는 상담을 한 건만 하겠다고 동인에게 말했다. 그 시간에 잔고업체 서류가 오고 발송도 해야 하기에 어수선했다. 무엇보다 도착한 서류 내용에 따라 긴급회의가 열렸다.
동인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출 손님들이 밀려들어 이체 통장은 충분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복수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동인의 작업 방식과 금액을 정확히 알았기에 상황이 명확해졌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기회만 노리면 된다. 동인은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슈킹의 금액과 방법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나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닌가!
'복수에 자비란 없다. 복수는 강한 자들만의 권리가 아니야.’
질끈 깨문 현우의 입술에 피멍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