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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금액은 40억으로 - 1

by 이인철

12월 12일 (수)


오전 중에 고려금융에서 카센터 사장의 서류봉투가 도착했다. 어제 1억 원이 입금된 통장과 오늘 출금해 잔액이 0원인 통장, 잔고증명서, 주민등록증, 인감도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입금된 은행은 현우 사무실에서 개설한 통장이므로 문제가 없었다. 동인은 잠시 생각한 후 수화기를 들었다.

“다한 컨설팅 김 실장입니다. 보내주신 서류 잘 받았습니다. 의뢰인이 통장을 계속 사용하고 싶어 하네요. 바뀐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어떻게 되나요? 아이디는 C423045, 비밀번호는 1211이라고요. 앞으로 통장은 H, S, K은행으로 하라고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동인은 노트북으로 명동 일대 지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고려금융과 가까운 곳에 H, S, K은행이 있었다.

“직접 가봐야 할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아침 일찍 돈을 찾으려면 사무실 근처 은행이 편하겠지.”

그는 혼잣말을 했다.

“동수 형, 카센터 사장 서류를 오후에 대양으로 보낼 테니 준비해 줘.”

동인은 작업에 적합한 손님을 동시에 의뢰해 정보를 빼낼 의도였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절약하고 의뢰인 부족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에 현우도 공감했다.

30분 후 대양 금융 봉투가 도착했다. 그런데 통장을 본 동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 은행에 입금됐네…?”

“왜? 뭔가 잘못된 거야?”

현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양에서 현재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을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의로 3개를 적어 보냈거든요.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입금되면 인터넷 뱅킹으로 빼갈 수 있어 차단하는 것으로 알았죠. 당연히 거래가 없는 은행으로 입금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요. 입금된 H은행이 대양과 특별한 관계인지 지켜봐야겠네요. 앞으로 대양 작업이 만만치 않겠어요.”

동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양에 전화를 걸었다.

“서류는 잘 받았습니다. 의뢰인이 잔고 통장을 사용하겠다고 하네요. 비밀번호가 0511이라고요? 다음부터는 통장에 적어주겠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대양에서는 비밀번호만 전달된다. 이는 잔고 증명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금융은 현우 사무실에서 의뢰인의 통장을 개설하면서 인터넷 뱅킹 신청을 하고, 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보낸다. 그러면 고려금융은 의뢰인이 잔고 증명금을 인출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입금 전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꾼다.

돈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으로 입금된다. 이후 의뢰인이 불순한 의도를 품더라도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변경되었기에 이체는 불가능하다. 물론 본인이라면 다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꿀 수 있지만, 보안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보안카드와 주민증은 이미 고려금융이 보유하고 있다. 반면 대양은 직접 통장을 개설하면서 입금한다. 의뢰인의 주민증과 인감증명서, 위임장이 있어 대리인이 할 수 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은행 마감 시간쯤에 통장을 만든다. 본인이 아니므로 인터넷 뱅킹 신청은 불가능하다.

만일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받아 인출을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민증이 없고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양 금융에서 만든 통장 계좌번호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동인이 비밀번호만 물어본 것이다.

오전에 예약한 손님이 왔다. 남루한 차림이지만 눈빛이 맑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남자의 손과 신발에 묻은 검은 기름때가 특히 눈에 띄었다. 그는 대출 방법을 듣고는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형, 저 사람에게 신용불량자인지 물어보세요. 작업용은 물론이고 이체용도 불안하네요. 잔고업체에서 입금 전에 은행에 연체 조회를 할 거예요. 연체 중이면 자기 돈이 빠져나가고 신용불량자가 비싼 수수료를 내면서 잔고 증명을 하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요주의 업체로 의심하게 된다는 거죠. 연체자나 신용불량자는 대출자 신상서에 표시해 주세요.”

‘대출자 신상서’는 손님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 현우가 작성한 문서이다. 동수가 대양에 보낼 서류 준비를 마쳤다고 하자, 동인은 수화기를 들었다.

“잔고 증명이 1억 5천만 원짜리인데요, 관공서 식자재 납품 입찰 건입니다. 퀵서비스가 오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동인의 책상에는 일반 전화가 4대나 놓여 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3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1대는 통장 확보용이며 2대는 부동산 담보대출, 명의대여자 광고용이다. 나머지 1대는 잔고업체와의 통화용인데 동인은 휴대폰보다 유선전화가 더 신뢰를 준다는 게 이유였다. 현우는 그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남자는 빠르게 통장 두 개를 만들어 왔다.

“혹시 신용불량이거나 이 은행에 연체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요금이 연체된 적은 있어요.”

동인은 괜찮다는 눈 사인을 보냈다. 현우는 남자의 손에 묻은 기름때가 궁금해 물었다.

“무슨 일을 하세요?”

“얼마 전까지 저는 노숙자였어요. 어쩌면 지금도 노숙자일지도 모르겠네요.”

모호한 대답이었다. 남자의 과거가 얼룩진 운동화처럼 드러났다.

“저는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구둣방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그런데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었죠. 제가 무지해서 당한 일이니, 다 제 잘못입니다. 그 후로 술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못해 아내와 이혼하고 노숙자가 되었네요.”

그의 얼굴은 친구에 대한 원망을 넘어 달관에 이른 듯 보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할머니가 건넨 팸플릿을 보고 자활센터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거리에서 버려진 자전거를 모아 쓸 만한 부품을 떼어내 새 자전거를 만든다고 했다.

“이렇게 탄생한 재생 자전거는 아동시설이나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료로 나눠 줍니다.”

그는 다음 달 ‘사랑의 자전거 나누기 행사’에 기증할 자전거를 만드느라 밤새 작업도 잦다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 자전거 수리 기술을 갖게 되었으니 자전거 가게를 열고 싶어서, 대출을 받으러 왔습니다. 물론 재활용 활동도 계속할 거예요. 때 묻고 찌그러진 자전거를 닦고 조립해 새것처럼 만들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면 헤어진 아내와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함께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현우는 사무실을 나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따뜻한 마음이 이 한파를 녹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하셨다고요? R전철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커피숍이 있으니 거기서 만나죠. 준비 서류는 챙겨오셔야 합니다.”

동인은 잔고업체와의 통화용 전화기를 자신의 휴대폰으로 착신 전환했다. 자기가 없는 동안 잔고업체와의 연락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현우와 동수는 잔고업체와 긴 통화를 한 적이 없다. 동인이 부재중일 때는 전화를 받되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말하고 곧바로 그에게 연락했다. 섣불리 아는 체를 하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광고 전화를 받아주고 급한 일이면 이 휴대폰으로 연락해요.”

이 휴대폰은 대포폰이다. 동인은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들만의 통화용 폰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 현우의 주머니에는 두 개의 폰이 있다. 그중 하나는 실명폰이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야?”

“아마 명의대여자 일 걸.”

“명의 대여자라니?”

“잔고 증명 돈이 입금되는 순간부터 작업 손님과는 끝이 나는데, 그에게 돈을 찾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미리 명의대여자 통장을 만들어서 슈킹한 돈을 그쪽으로 이체하고 인출하게 하는 거지.”

“쉽게 명의를 빌려주고 돈을 찾지는 않을 텐데…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 사람들에게 비자금을 세탁한다고 둘러대면 돼. 아줌마들이라 그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거든. 그리고 생활이 어려워서 수고비를 많이 준다고 하면 줄을 설 정도야.”

“얼마 주는데?”

“딱 정해진 건 아니지만, 대략 1억당 100만 원. 이건 동인이가 정한 기준이야. 금액이 적으면 아예 하지 않을 수 있고, 너무 많으면 의심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하루 일당으로는 거액이지.”

“그 아줌마들, 나중에 처벌받지 않을까?”

“물론 조사는 받겠지만 큰 피해는 없을 거야. 그들은 통장을 빌려주고 돈을 찾는 심부름만 하면 수고비를 준다기에 했다는 거지. 사실 그렇기도 하고.”

그때 복도에서 구두 힐 소리가 들리더니 노크 소리가 났다. 어제 온 아가씨들이었다. 동수가 재빠르게 커피를 타서 선영에게 건네며 능글거렸다.

“오전부터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공사가 바쁘신가 봐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요.”

“오후에 서류를 받으면 다음 날 접수되어 대출이 늦어질까, 걱정이 돼서요.”

역시나 천연덕스러웠다.

“얼마나 걸릴까요? 이번 달에는 가능하죠? 가게 언니에게 말일까지 일할 거라고 했거든요.”

선영은 불안한지 입술을 잘근거렸다.

“실장님, 말일까지는 꼭 안 될까요?”

시영이 울상으로 현우에게 매달렸다.

“될 거예요. 저만 믿어요!”

우물쭈물하는 그를 대신해 동수가 큰소리를 쳤다. 금세 표정이 밝아진 선영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가게에 한번 놀러 오실래요?”

“그쪽에서 산다면 콜이죠.”

“대출도 해 주는데 그래야 하지만 저희 형편이… 정말 미안해요.”

시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냥 한 말이에요. 설마 우리가 아가씨들에게 술을 얻어먹겠어요? 벼룩의 간을 빼먹지.”

“아니, 이렇게 예쁜 벼룩들을 본 적이 있어요?”

선영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포즈를 취하자 모두 웃었다.

“시영이가 실장님이 마음에 든대요. 실장님은요?”

“네?”

“얘는, 내가 언제….”

시영은 부끄러운 듯 두 볼이 붉어졌다.

“잘됐네! 난 선영 씨, 강 실장은 시영 씨와 파트너가 결정됐으니 곧 갈게요. 또 한 사람도 갈 거니까 괜찮은 아가씨로 책임져야 해요.”

“그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실장님도 오실 거죠? 빨리 약속해요. 네? 네?”

선영은 애원과 강요가 섞인 목소리로 졸랐다.

“글쎄…”

“시영아, 실장님도 오신다고 하잖아.”

그녀는 마치 확정된 일인 양 시영의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현우는 두 사람의 우정이 참 보기 좋았다.

이때 상담 전화 소리가 울렸다. 시영은 나가자며 선영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센스에 현우는 왠지 모르게 매력을 느꼈다. 동수는 친절하게도 그녀들을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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