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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6. 2024

작업 금액은 40억으로 - 1

 12월 12일 (수)


 오전에 고려금융에서 보낸 카센터 사장의 서류 봉투가 도착하였다. 어제 날짜로 1억 입금되고 오늘 출금해 잔액 0원인 통장과 잔고증명 확인서, 주민증, 인감도장이 들어 있었다. 입금 은행은 현우 사무실에서 통장을 만들어 보냈기에 문제될 게 없었다. 동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다한컨설팅 김 실장입니다. 보낸 서류는 잘 받았습니다. 의뢰인이 왔는데 이 통장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하네요. 바뀐 아이디와 비밀 번호가 어떻게 되죠? 아이디는 C423045, 비번은 1211이라고요. 통장은 가능한 H, S, K은행으로 하라고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동인은 노트북으로 명동 일대 지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고려금융과 가까운 거리에 H, S, K은행이 있었다.

 “직접 가 봐야 하나? 별 의미는 없는 거 같은데… 아침 일찍 돈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사무실 근방 은행이 편하겠지.”

 그는 혼잣말을 했다.

 “동수 형, 카센터 사장 서류를 오후에 대양으로 보낼 거니까 준비해.”

 동인은 작업용으로 적합한 손님은 동시에 의뢰해 정보를 빼낼 심산이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되고 의뢰인 부족을 방지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에 현우도 공감했다.

 30분 후에 대양금융 봉투가 도착했다. 그런데 통장을 본 동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 은행에 입금했네…?”

 “왜? 뭐가 잘못됐어?”

 현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양에서 현재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을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의로 3개를 적어 보냈거든요. 그 의미가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입금시키면, 인터넷 뱅킹으로 빼갈 수 있기에 차단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당연히 거래가 없는 은행으로 입금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요. 입금된 H은행이 대양과 거리가 가까워선지 특별한 관계인지는 지켜봐야겠죠. 앞으로 대양 작업이 장난 아니겠는데요?”

 동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대양에 전화를 걸었다.

 “서류는 잘 받았어요. 의뢰인이 잔고 통장을 쓰겠다고 하네요. ...비밀번호가 0511이라고요? 다음부터는 통장에 적어 준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대양에서는 비밀번호만 내려온다. 그것은 잔고증명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금융은 현우 사무실에서 의뢰인의 통장을 만들면서 인터넷 뱅킹 신청을 하고 그 아이디와 비번을 보낸다. 그러면 고려는 혹시 의뢰인이 잔고증명 돈을 빼가는 사고를 막으려 입금 전에 아이디와 비번을 바꾼다. 

 돈은 밤 10~11시에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으로 입금시킨다. 그 후에 의뢰인이 흑심을 품어도 아이디와 비번이 변했기에 이체는 불가능하다. 물론 본인이므로 다시 아이디와 비번을 바꿀 수 있다. 단 보안카드가 필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안카드와 주민증은 이미 고려금융이 갖고 있다. 

 이와 다르게 대양은 직접 통장을 만들면서 입금시킨다. 의뢰인의 주민증과 인감증명서, 위임장이 있어 대리가 가능하다.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은행 마감 시간쯤에 통장을 개설한다. 본인이 아니기에 인터넷 뱅킹 신청은 안 된다. 

 행여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받아 인출을 시도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민증이 없고 시간도 촉박하다. 그보다 대양금융에서 만든 통장 계좌번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인이 비번만 물은 것이다.

 오전에 예약한 손님이 왔다. 남루한 차림이지만 눈망울이 맑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남자의 손과 신발에 묻은 검은 기름때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대출 방법을 듣고는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형, 저 사람에게 신용불량인지 물어보세요. 작업용은 고사하고 이체용도 불안하네요. 잔고업체에서 입금 전에 은행에다 연체 조회를 할 거예요. 연체 중이면 자기 돈이 빠져 나가고 신용불량자가 비싼 수수료를 주면서 잔고증명을 하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요주의 업체로 의심한다는 거죠. 연체자나 신용불량자는 대출자 신상서에 표시해 주세요.”

 ‘대출자 신상서’란 손님의 인적사항을 기재한 것으로 현우가 만든 서류이다. 동수가 대양에 보낼 서류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동인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잔고증명 1억 5천만 원짜리인데요. 관공서 식자재 납품 입찰 건이에요. 퀵 오면 바로 보낼게요.”

 동인의 책상에는 일반 전화가 4대나 있다.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3대를 더 설치했다. 2대는 부동산 담보대출과 명의대여자 광고용이고, 1대는 잔고업체들과 통화하는 전화다. 휴대폰보다 유선전화가 신뢰를 준다는 게이유였다. 현우는 그의 주장에 대체로 수긍이 갔다. 

 남자는 빠르게 통장 두 개를 만들어 왔다.

 “혹시 신용불량이거나 이 은행에 연체가 있나요?”

 “아니, 없어요. 전에 휴대폰 요금은 연체된 적이 있어요.”

 동인은 괜찮다는 눈 사인을 보냈다. 손에 찌든 기름때가 궁금했던 현우가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얼마 전까지 저는 노숙자였어요. 어쩌면 지금도 노숙자일지 모르겠네요.”

 알 듯 모들 듯 한 대답이었다. 얼룩진 운동화 같은 남자의 과거사가 펼쳐졌다.

 “저는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억척으로 일한 덕에 구둣방을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요. 근데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당해 전 재산을 잃었어요. 제가 일자무식이라 당했으니 다 제 탓이죠. 그 후로 술독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아 아내와 이혼하고 노숙인 신세가 되었네요.”

 그의 얼굴은 친구에 대한 원망을 초월해 달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할머니가 건넨 팸프릿을 보고 노숙인 자활센터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거리에 버려진 자전거들을 모아다 쓸 만한 부품을 떼어내 새 자전거를 만든다고 했다.

 “이렇게 탄생한 재생 자전거는 아동시설이나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료로 나눠 줘요.”

 다음 달 ‘사랑의 자전거 나누기 행사’에 기증할 자전거를 만드느라 밤새 작업도 잦다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 자전거 수리 기술이 있으니 자전거 점을 하고 싶어서 대출을 받으러 왔어요. 물론 재활용 활동도 계속할 거예요. 때 묻고 찌그러진 자전거를 닦고 조립해서 새 걸로 만들어 놓으면 꼭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생활능력이 된다면 헤어진 아내와 자식에게 용서를 구하고 함께 사는 게 소원입니다.”

 어느새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현우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몰아치는 이 한파를 녹일 거라 확신했다.

 “명의대여자 광고 보고 전화했다고요? R전철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커피숍이 있는데 거기서 만나지요. 준비 서류는 갖고 나와야 해요.”

 동인은 두 대 전화기를 자신의 휴대폰에 착신을 걸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 잔고업체 연락에 대한 대비였다. 현우와 동수는 잔고업체와 길게 통화한 적이 없다. 동인이 부재중이면 전화는 받되 담당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말하고는 곧 그에게 연락한다. 잔고증명에 관해 섣불리 아는 체를 하다가는 치명타가 된다는 것이다.

 “광고 전화를 받고 급한 일이면 이 휴대폰으로 연락해요.”

 이 휴대폰이란 대포폰이다. 동인은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들만 통화하는 폰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 현우의 주머니에는 폰이 두 개다. 그중 하나는 실명폰이다.

 “누굴 만나러 가는 거야?”

 “아마 명의대여자일 걸.”

 “명의대여자라니?”

 “잔고증명 돈이 입금되는 순간부터 작업 손님과는 쫑인데 그에게 돈을 찾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미리 명의대여자 통장을 만들어서 슈킹한 돈을 그쪽으로 이체하고 인출하게 하는 거지.”

 “쉽게 명의를 빌려주고 돈을 찾지는 않을 텐데…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 사람들에게 비자금을 세탁한다고 둘러대면 돼. 아줌마들이라 그 분야에 대해 거의 몰라. 글구 생활이 궁핍해서 수고비를 많이 준다 하면 줄을 설 정도야.”

 “얼마 주는데?”

 “딱 정해진 건 아닌데 1억당 100만 원 정도. 이건 동인이가 정한 거야. 적으면 안 할 수 있고 너무 많으면 의심한다나? 하루 일당 치고는 거액이지.”

  “그 아줌마들 나중에 처벌받지 않을까?”

 “물론 조사야 받겠지만 큰 피해는 없을 거야. 자기들은 통장을 빌려 주고 돈을 찾는 심부름만 하면 수고비를 준다기에 했다는 거지. 사실 그렇기도 하고.”

 그때 복도에서 구두 힐 소리가 들리더니 노크 소리가 났다. 어제 온 아가씨들이다. 동수가 잽싸게 커피를 타서 선영에게 내밀며 능글거렸다.

 “오전부터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공사가 다망하셨나 봐요?”

 “일찍 오려 했는데 일이 생겨서요.”

 “오후에 서류를 받으면 다음 날 접수되어 대출이 늦어지니까 걱정이 돼서요.”

 역시나 천연덕스러웠다.

 “얼마나요? 이번 달에는 되죠? 가게 언니에게 말일까지 일할 거라고 했거든요.”

 선영은 불안한지 입술을 잘근거렸다.

 “실장님, 말일까지는 꼭 안 될까요?”

 시영이 울상으로 현우에게 매달렸다.

 “될 거예요. 저만 믿어요!.”

 우물쭈물하는 그를 대신해 동수가 큰소리 쳤다. 금세 표정이 밝아진 선영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가게에 한번 놀러 오실래요?”

 “그쪽에서 산다면 콜이죠.”

 “대출도 해 주는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저희 형편이… 정말 미안해요.”

 시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냥 한 말이에요. 설마 우리가 아가씨들에게 술 얻어먹겠어요? 벼룩의 간을 빼먹지.”

 “아니, 이렇게 예쁜 벼룩들을 본 적이 있어요?”

 선영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포즈를 취하자 모두 웃었다.

 “시영이가 실장님이 마음에 든대요. 실장님은요?”

 “네?”

 “얘는, 내가 언제….”

 시영은 부끄러운 듯 두 볼에 홍조를 띠었다.

 “잘 됐네! 난 선영 씨, 강 실장은 시영 씨로 파트너가 결정됐으니 곧 갈게요. 또 한 사람 갈 거니까 괜찮은 아가씨로 책임져야 해요.”

 “그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실장님도 오실 거죠? 빨리 약속해요. 네? 네?”

 선영은 애원 반 강요 반으로 졸랐다.

 “글쎄요.”

 “시영아, 실장님도 오신대.”

 그녀는 기정사실인 양 시영의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현우는 두 사람의 우정이 보기 좋았다. 

 이때 상담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시영은 나가자며 선영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센스에 현우는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갔다. 동수가 친절하게도 그녀들을 밖까지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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