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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5. 2024

두 번째 아군과의 만남 - 2

12월 11일 ()   


손님들이 통장 개설 신청서를 작성할 때 사무실의 선불폰 번호를 적으라고 한다. 이를 위해 동인은 선불폰을 20대 이상 구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행이 통장 명의자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신청서에 기재된 전화번호뿐이잖아요. 근데 그 번호들이 각기 다르기에 은행들이 서로 협조하더라도 처음에는 의심을 피할 수 있죠. 게다가 그 폰들은 우리 손에 있으니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은행에서 지급 정지까지는 반나절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그 시간의 절반이면 작업을 끝낼 수 있어요.”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디데이에 잔고증명 금액이 있는 은행에서 사고를 알았을 때는, 이미 다른 은행으로 이체가 완료된 상태죠. 사고 은행은 즉시 이체 은행에 연락하더라도, 이체 은행은 통장 명의자의 동의 없이는 지급 정지를 할 수 없어요. 일단 입금된 돈은 어떤 사유로든 명의자의 소유로 간주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10번 이상 이체를 해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요. 그 사이에 은행들은 비상이 걸리겠죠?”     

그때 은행을 다녀온 카센터 사장 부부가 통장 등을 현우에게 건네주고, 기대에 부풀어 사무실을 나갔다.

“이제 현수 형도 베테랑이 다 됐네.”     

동인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카센터 사장의 서류와 수수료 30만 원을 고려금융 주소가 적힌 봉투에 담았다. 마찬가지로 트럭 아저씨의 서류도 대양금융으로 갈 봉투에 넣었다. 잔고증명 의뢰 금액은 동일하게 1억 원이다.     

“동수 형, 퀵서비스 두 곳에 전화해. 도착지는 명동이야.”     

동인이 이 사무실을 얻은 것은 교통이 편하고 은행이 밀집한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속셈이 있었다. 사무실 위치가 외곽에 있어 명동까지 직접 전달하기에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가까운 거리라면 불시에 사무실을 방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여 분 후, 한 퀵서비스가 고려금융 봉투를 가지고 나가자마자 다른 퀵서비스가 도착했다. 동인은 두 잔고업체에 퀵서비스가 출발했다고 연락했다. 모두 명동으로 가는 길이므로 한 퀵서비스를 이용하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퀵서비스를 부른 것은 봉투가 바뀌거나 한 사무실의 서류가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현우는 이 점에서 다시 한번 그의 지혜에 감탄했다.     

“동인아, 이 통장을 대양금융 봉투에 넣지 않았네. 어떻게 하지?”      

현우는 실수로 빠졌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고려금융은 우리가 통장을 만들어서 보내지만 대양금융은 그들이 직접 통장을 개설하니까 서류만 보내면 돼요. 업체마다 잔고 방식이 다르거든요. 내일 오전에 통장과 잔고증명서가 올 거예요. 그때부터 정보 파악에 들어가야죠."     

‘똑똑똑.’     

노크 소리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누군가 문틈으로 머리를 살며시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어제 퇴근 무렵 전화한 젊은 목소리의 아가씨와 그녀의 친구였다. 그들은 사우나에서 막 나온 듯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둘 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괜찮은 외모였다.     

등본을 보니 전화한 아가씨는 23세의 박선영이고 친구는 한시영으로 동갑이었다. 선영은 세대주로 혼자였고 시영의 가족 사항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기재되어 있었다. 선영은 활발한 성격인 반면, 시영은 다소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선영은 업소에서 일하는 티가 났지만, 시영은 함께 어울리지 않으면 여대생처럼 보였다.     

“시영이는 가게에서 가장 친한 친구예요. 얘도 대출을 받으려고 같이 왔어요.”      

선영이 조잘거렸다. 현우는 두 사람의 이름에서 ‘영’ 자를 발견하고 불현듯 희현이 떠올랐다.     

“오빠와 저의 이름에 ‘현’ 자가 똑같이 들어가잖아요.”      

그녀는 이 공통점을 강조하며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순간, 희현이 그리워졌다.

두 사람의 직업을 알아챈 동수가 농담을 던졌다.     

“아직도 입에서 한약 냄새가 나네요. 늦게까지 보약을 드셨나 봐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티가 나나요?”     

선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느라 바빴고, 시영은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돌렸다.     

현우가 대출 방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은 나이가 어리서인지 대출 경험이 없어서인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은행 대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이었다. 동인은 시영은 작업용으로, 선영은 이체용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시영을 대학생으로 위장해 유학 비자 발급 용도로 잔고 증명을 의뢰하면 된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동수가 선영에게 물었다.     

“2천만 원을 대출받아 어디에 쓸 건가요?”     

“사실은….”     

그녀들은 말하기가 어려운 듯 머뭇거렸다.     

“이자를 연체하거나 갚지 못하면 대출해 준 저희도 책임이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출 여부가 결정되거든요.”     

동수의 은근한 압박에 선영이 현실을 털어놓았다.     

“시영이와 저는 업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가게에서 당긴 선불금이 2천만 원이에요. 그래서 대출받아 갚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해요.”     

“무슨 일을요?”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미용 학원에 다니기로 했어요.”     

“대출만 나오면 일을 그만둘 수 있어요. 부탁드려요.”     

시영은 물기 어린 눈으로 간청했다. 동수는 분위기와 생뚱맞게 너스레를 떨었다.

“일하는 데가 어디예요? 한번 놀러….”     

“대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동수의 입방정을 막으려 그가 말을 끊었다. 사무실을 나가던 시영이 명함을 달라고 했다. 현우는 명함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건넸다. 이때만도 시영이 자신의 두 번째 아군으로 선택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일 네 건의 상담이 예정되어 있다. 각 상담은 30분 이내로, 한 은행에서 통장 발급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으로 잡았다. 평균 세 개의 통장을 만드는데 넉넉히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여유 시간을 두지 않으면 손님들이 겹친다. 같은 상황에 처한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익보다는 손실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현우는 이를 확실히 차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하루에 네 건으로 상담을 하기로 했고, 동인도 일리가 있다며 동의했다.      

“현수 형, 이제 올 손님은 없죠?”     

“응.”     

“모두 모여 봐요. 오늘은 처음 보내는 서류라 제가 다 작성했어요. 원칙은 의뢰인이 자필로 직접 써야 하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는 글씨체도 다르게 써야 해요.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요. 내일부터는 일 마감 후에 잔고업체로 보낼 서류를 준비할 거예요. 동수 형은 퀵 서비스에 신경을 써 줘.”     

“그럼 야근 수당은 주는 거야?”     

“동수 형은 민폐니까 조기 퇴근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형제의 개그로 모처럼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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