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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4. 2024

두 번째 아군과의 만남 - 1

12월 11일 (화)


동인은 출근하자마자 화이트보드에 ‘C은행 김 차장 저녁 7시 미팅’, ‘S은행 박 과장 12시 점심 약속’, ‘K은행 최 부장 모친 회갑연’ 등의 일정을 적어 나갔다. 이 내용은 매주 2~3일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형, 손님 상담할 때 참고하세요.”     

현우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는 손님들에게 우리가 은행 직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저 놈은 자면서도 작업에 대한 꿈을 꿀 거야. 아마 나도 그 꿈속에 몇 번 등장했을지도 모르겠네.’     

10시쯤 카센터 사장 부부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남편은 50대 중반으로, 목소리는 우렁차며 순박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카센터 옆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주유소가 생겼고, 카센터도 겸한다고 했다.

“저는 부품을 도매상에서 가져오는데, 그쪽은 본사에서 공급받기 때문에 가격 경쟁이 도저히 안 돼요. 게다가 그곳은 무료로 자동 세차를 해 주니까 고객을 모두 빼앗겨서 월세도 못 낼 지경이에요.”     

사장은 까칠한 턱수염을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가게와 붙어 있는 자투리 땅을 빌려 손 세차장을 하려고 해요. 근데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지금의 돈으로는 부족해서 이렇게 찾아왔네요.”     

“비록 근처에 자동 세차기가 있어도 손 세차를 원하는 고객은 따로 있으니 성심껏 하면 고정 손님을 확보할 수 있어요. 물론 저도 할 거예요.”     

곁에서 조용히 있던 아내가 덧붙였다.     

“서류는 갖고 오셨죠?”     

현우는 등본과 인감을 세 통씩 받고 세 개의 은행을 지정해 주었다. 그리고 각 은행에서 2천만 원 대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등본과 인감을 세 통이나 받은 이유는 이 사람은 신분이 양호하여 작업용으로 할 것이라는 동인의 귀띔 때문이었다. 부부는 다정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동인은 지역정보지에 게재하라며 현우에게 한 문구를 내밀었다. 그것은 색다른 광고였다.     

‘명의대여자 구함. 고수익 보장. 40세 이상 남·여.’

기존 광고와의 차이는 연락처에 일반전화 대신 휴대폰 번호만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의 대여자? 이게 무슨 뜻이야?”     

“돈을 인출하려면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죠. 여자는 돈을 찾고 남자는 바지예요.”     

“바지라니?”     

그때 노크 소리에 현우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오후에 방문을 약속한 덤프트럭 아저씨였다. 손에는 음료수 박스가 들려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강 실장님이 대출이 가능하다고 해서 어제 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너무 기쁜 마음에 달려왔죠.”     

그는 이미 대출이 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음료수 뚜껑을 손수 따서 하나하나 나눠주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기까지 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미안하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등본상으로는 50대 중반이지만, 새치가 많아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평생 운전으로 가족을 부양해왔지만, 작년에 사람을 치고 트럭을 팔아 합의한 후 지금은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일한다고 했다.     

“근데 얼마 전부터 눈이 아프고 사물이 점점 흐릿하게 보이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당뇨 합병증이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실명된 오른쪽 눈에 인공눈을 삽입해야 통증이 멈춘다고 해요. 그런데 회사에서 사고가 날 수 있으니 퇴직을 강요하고 있어요. 운전 말고는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말 큰일이에요.”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늦게 결혼해서 자식들이 중·고등학생과 늦둥이 유치원생인데, 뒷바라지할 일이 까마득 하네요. 아내는 오래전부터 관절염을 앓고 있어 매일 약으로 버티고 있죠. 제가 아니면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요.”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마의 주름도 깊어졌다.     

다행히도 살면서 인심을 잃지 않아 주변에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의 지인들은 대부분 운전기사인데, 만약 기름을 공급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받겠다고 했다. 먼저 기름을 주고 월말에 결제하므로 이윤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보관 탱크가 필요하다고 했다.

“탱크를 설치할 장소는 저의 형편을 잘 아는 친척이 빌려주기로 했어요. 하지만 기름 탱크는 위험물이라 땅을 파서 지하에 설치해야 하죠. 이 공사에는 4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대출을 받으러 왔어요.” 

“가능할 것 같아요.”     

현우는 두꺼운 낯짝으로 공수표를 날렸다. 아저씨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비쳤다.     

“대출이 나오면 꼭 거하게 대접할게요.”     

아저씨는 현우의 손을 간절히 잡았다. 그가 은행을 지정하자 아저씨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뚜~’     

팩스 음이 울리며 용지가 쏟아졌다. 잔고업체인 고려금융에서 보낸 서류였다. 처음 대양금융에 이어 두 번째 양식이 도착한 것이다.     

아쉽게도 현우의 복수 대상인 수일금융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본격적인 작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시작이란 잔고업체에 서류를 접수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그때까지는 탐색전일 뿐이다. 또한 수일금융의 잔고 방법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에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수일금융이 잔고증명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현우는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서류는 공통적인 양식도 있었지만 업체마다 내용과 인쇄체가 조금씩 달랐다.     

동인은 이 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각 업체의 서류가 섞이지 않도록 분류하라고 동수에게 신신당부했다. 동인의 이유는 이러했다.     

“그쪽은 자기와만 거래하는 줄 아는데 다른 업체의 양식을 보내면 의심받을 수 있어. 굳이 여러 곳과 거래할 필요가 없거든.”     

백 번 일리가 있다. 동수가 서류 정리와 보관을 맡았다. 동인의 자리는 파티션으로 가려져 있어 조용히 말하면 알아듣기 힘들다. 그는 손님이 없을 때 잔고업체와 통화하고 ‘명의대여자 구함’ 광고 전화는 나가서 은밀히 받았다.     

“아까 말한 바지란 게 뭐야?”     

“바지 할 남자를 잔고업체로 보내서 작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 카센터 부부가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다.

“사장님, 통장 개설 신청서에 저희가 알려드린 전화번호를 적으셨죠?”     

“네, 그런데 제 번호를 적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표정은 의심보다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물론 이 전화는 선불폰이다.     

“실적 대출이다 보니 입출금 관련해서 은행에서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아요. 이때 저희가 대신 받아서 대응하는 거죠. 한마디로 대출을 빨리 진행하려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야 사장님에게도 이득이 되니까요.”     

“아~ 그렇군요.”     

현우는 자신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명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의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그 순간 ‘좋은 사람과 가까이 하면 좋게 변하고,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쁘게 변한다’는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자신과 동인 중 누가 ‘주(朱)’이고 누가 ‘묵(墨)’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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