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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13. 2024

D-day 16일 전 - 3

12월 10일 (월)


현우는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손에 3만 원을 쥐어주었다. 그 돈은 그녀가 통장 세 개를 개설하면서 각 통장에 만 원씩 입금한 금액이었다.

그는 가슴이 아픈 기분이 들었지만, 곧 스스로를 위로했다.

‘저 사람에게 금전적으로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 실망을 줄 뿐이지. 인생에서 실망이 한두 번이겠어?’

여자의 신청서로 인터넷 뱅킹 등록과 공인인증서를 만들던 동인이 말했다.

“현수 형, 다행히 이 아주머니는 공인인증서가 없어서 내가 만들었는데, 꼭 인증서 여부를 물어봐야 해요. 이미 인증서가 있다면 그 암호를 알려 달라고 하세요. 만약 암호를 모른다면 최초로 만든 은행에서 해지한 후 연락하라고 하세요. 인증서가 없으면 이체를 할 수 없거든요.”

현우는 포스트잇에 ‘공인인증서 확인’이라고 적어 책꽂이에 붙였다.


세 번째 상담 전화는 황당했다.

“거기 사무실 위치가 어디요?”

중년 사내의 격앙된 목소리가 다짜고짜 물어왔다. 현우는 불쾌하여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왜요?”

내용은 이러했다. 아내가 지역정보지를 보고 대출사무실에 갔고, 그곳에서 은행에 350만 원을 예치하면 한 달 내에 2천만 원을 대출해 준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금한 돈은 인출되었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광고에 ‘실적 대출’이라고 적혀 있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이 사기꾼들!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경찰에 신고할 거야!”

사내의 위협에 현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떻게든 빨리 수습해야 했다.

“잠깐만요. 실적 대출이라면 통장만 주면 되는데 왜 도장을 맡기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나요?”

“듣고 보니 그러네…?”

사내는 현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조금 진정되었다. 이제 흥분이 가라앉았다면, 확실히 해야 했다.

“저희는 오늘 처음으로 광고가 나갔어요. 정보지 회사에 확인해 보세요. 그래도 의심스러우면 부인과 함께 사무실로 오세요.”

한풀 꺾인 사내는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현우는 긴장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절대 수수료를 먼저 받지 않는다.’

동인의 이 말이 이제야 명확히 이해가 갔다. 만일 선수수료를 받았다면, 그는 질질 끌려 다니거나 잠수를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동인아, 혹시 사무실에 단속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손님에게 수수료를 받고 돌려주지 않으면 사기가 되겠지만, 우리는 한 푼도 받은 게 없잖아요. 또 손님 통장을 대포통장으로 팔면 금융거래법에 위반되겠지만, 그런 일도 아니고. 굳이 걸린다면 대부업 미등록인데, 최근에 영업을 시작해서 준비 중이라고 하면 돼요. 대부업 미등록은 경고나 과태료 부과 정도죠.”

동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은행 직원과 짜고 대출을 한다는 소문이 나면 경찰이 내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른바 ‘금융브로커 사건’ 같은 거?”

“형 말대로 그럴 수는 있어요. 경찰이 대출 손님인 척 위장 수사를 할 수도 있고요. 만에 조사가 들어오면 ‘우리는 직접 대출을 하는 게 아니다. 원라인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서류만 대행한다’고 하면 돼요.”

“원라인을 추궁하지 않겠어?”

“당연히 원라인을 파고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쪽과 휴대폰으로만 연락한다고 하는 거예요. 단, 그 번호는 알려줘야겠죠.”

“원라인 번호를?”

현우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동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에서 같은 모양의 스티커가 붙은 두 개의 휴대폰을 꺼냈다.

“이건 원라인 폰이고, 저건 연락 폰이에요. 작업하기 전부터 동수 형과 이 두 개의 폰으로 원라인과 통화한 척 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죠. 경찰이 조사하러 오면 원라인 번호를 알려주고 그 폰은 숨겨요. 그리고 연락 폰을 보여주며 원라인과 통화한 폰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목이 마른지 물을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근래 원라인과 연락이 끊겼다. 이제 우리도 이 일을 접을 거다’라고 선수를 쳐요. 경찰이 원라인 폰에 전화해도 신호가 가니 우리의 말이 맞고, 통화 내역을 조회해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완벽하죠."

“원라인과의 관계를 조사할 텐데?”

“예전에 사채 사무실에서 잠깐 알았던 사이인데, 한 달 전쯤 우연히 만나서 ‘이런 방식으로 서류를 접수하면 수수료를 지급하겠다’고 해서 하게 됐다고 둘러대는 거죠. 그때부터 통화 내역이 있으니까요.”

현우는 그의 치밀한 각본에 말문이 막혔고, 곧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다음 전화는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였다. 5천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당장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내일 오후로 미뤘다. 오전에 카센터 사장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 무렵에 온 전화는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피곤해서 못 가고요, 내일 친구와 함께 갈게요.”

그녀는 맹랑하게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때 현우는 이 아가씨의 친구가 두 번째 아군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벽시계는 어느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외투를 챙겨 입었다. 현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공무원인가? 회사원인가? 다행히 야근이나 출장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네!”

내일 상담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현우는 로또 당첨 번호 중 이미 세 자리는 맞춘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힘차게 문을 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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