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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1. 2024

사채업자와의 두뇌 싸움

 12월 13일 (목)


 현우가 사무실에 도착하니 동인은 잔고업체로 보낼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동수 형은 아직 술이 덜 깨서 늦을 거예요.”

 왜 형에게 술을 많이 먹였냐는 원망의 말투였다.

 “형, 고려금융 비번의 의미를 생각해 봤어요?”

 “1211, 1212은 접수한 월과 날짜 같던데.”

 “어? 어떻게 알았어요?”

 동인은 당황했지만 이미 자신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 아이디 C423045와 H143262는요?”

 “글쎄, 잘 모르겠더라고. 너는?”

 일부러 현우는 시침을 뗐다. 그것은 동인의 능력을 알고 싶어서다. 그는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치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도 어제 자정이 되어서야 풀었어요. 아이디는 의뢰인의 성 알파벳과 주민번호에서 딴 거예요. 근데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요. 보세요?”

 그는 화이트보드에 ‘최영성 540324-1002431, C423045’, ‘현정복 521210-1432620, H1432620’을 썼다.

 “문제는 아이디 숫자예요. 간단히 주민번호 앞자리를 순서대로 하면 될 텐데 굳이 뒤에서부터 했냐는 거죠. 또 현정복 아이디는 최영성처럼 하지 않고 뒷자리를 썼냐는 거지요. 결국 두 아이디의 규칙성은 알파벳 외에는 없어요. 만약 주민번호 13자리를 불규칙적으로 만든다면 그 변화가 무궁무진하다는 거예요. 이런 식이면 디데이에 어떤 방법으로 조합한 아이디를 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거죠. 게다가 전화번호까지 섞는다면 아인슈타인이 와도 항복할걸요?”

 그는 답답하여 목이 탄지 물을 들이켰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현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번처럼 정형성이 있을 거라고 봐. 왜냐면 그런 식으로 계속 아이디를 만든다면 수십, 수백 개가 넘을 거야.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들도 헷갈리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으로 만들어서 돌려야 그쪽도 안심할 수 있잖아.”

 현우는 말하면서도 그의 예리한 사고력에 놀랐다. 다만, 동인이 자정쯤에 아이디 비밀을 풀어 자신보다 늦었다는 것에 위안 아닌 위안을 삼았다.

 “오늘 내려오는 아이디를 보기로 하지요.”

 동인이 화이트보드에 0511, 0512를 썼다.

 “0511, 0512는 대양에서 온 비번인데 이제 형도 감이 잡히죠? 05만 알면 되니까요.”

 “올해 2005년?”

 “빙고! 만일 오늘 고려에서 1213이, 대양에서 0513이 내려온다면 비번은 해결됐다고 단정해도 될 것 같아요. 근데 대양의 입금 은행을 확정하기가 어렵네요. 첫날은 의뢰인의 거래 은행 중 하나인 W은행으로 입금을 시켜 혼란하게 했잖아요. 어제는 거래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으로 입금시켰고요. 대양금융 가까이에 W, K, S, J 4개 은행이 있어요. 그저께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W, K, S 3개 은행을 임의로 적어 보냈지요. 또 W은행으로 입금시키면 작업하기가 수월해요. 그 이유는 W은행이 주거래 은행으로 디데이에 입금될 확률이 높다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의뢰인이 거래하는 W, K, S를 제외한 J은행으로 입금시킨 거예요.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 들어요. 조금 후에 봉투가 오면 어느 은행으로 입금했는지 알겠지만, 기대 반 걱정 반이네요.”

 그는 짜증 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동인아, 대양의 입금 은행을 안다 해도 인터넷 뱅킹이 안 되어 이체할 수 없잖아?”

 “아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여기서 의뢰인은 작업 손님을 뜻해요. 의뢰인의 인터넷 뱅킹이 된 통장을 그전에 발급받는 거예요. 그런 후 디데이에 대양에서 만든 통장 계좌번호를 그 은행에 접속하면 볼 수 있어요.”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디데이 오전에 의뢰인에게 같은 은행 통장을 하나 더 개설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대양의 잔고증명 돈이 입금되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순간 의뢰인에게 다시 연락해요. 오전에 만들었던 통장 분실신고를 하라면서 대양에서 개설한 통장 계좌번호와 비번을 알려 줘요.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받으면서 인터넷 뱅킹 신청을 하는 거예요. 한방에 게임 아웃이죠.”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하려면 주민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대양으로 갔잖아?”

 “그 문제도 신경 쓸 것 없어요. 주민증과 운전면허증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작업하면 되죠. 운전면허증도 통장 발급이 되거든요. 은행에 확인을 했고 손님도 보내서 검증을 거쳤어요.”

 현우의 의구심이 꼬리를 물었다.

 “대양에서 몇 시에 입금하는데?”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통장을 만들면서 입금했더라고요.”

 “시간이 촉박하지 않을까?”

 “빠듯하지만 가능해요.”

 “의뢰인에게는 뭐라면서 통장 재발급을 시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의심하지 않을까?”

 “통장을 분실했다는 이유를 붙이면 돼요. 돈이 급한 처지라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그래서 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으로 선택하면 좋지요. 이건 제가 담당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인은 시험지 답안을 외운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마치 예상된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정말 대단한 놈이다! 저 자식의 진면목을 안다면 아마 사기꾼들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난리가 날 거야.’

 

 고려금융 봉투를 갖고 온 퀵과 함께 눈이 충혈된 동수가 들어왔다. 동인이 꺼낸 통장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한시영 통장에는 H412371, 1213이 적혀 있었다. 비번은 적중했으나 아이디는 현우가 예상했던 H705028이나 H217321이 아니다. 그러나 H412371 비밀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것은 한시영의 주민번호 820507-2173214 뒷자리 끝에서부터 6자리 숫자를 나열한 것이다. 전날 내려온 현정복의 아이디 H143262가 뒷자리 앞에서부터 라면 한시영의 아이디는 그 반대였다.

 “으, 으… 이러면 안 되는데….”

 동인이 야수의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신음의 의미를 현우는 안다. 어느새 적중률이 50%에서 33%로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25%, 20%, 16.6%… 확률이 반비례가 된다. 그러면 고려금융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디데이에 이체는 늦어도 은행 영업 시작 전에 끝내야 한다. 그 이후로는 40억을 인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새로운 아이디를 무한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꼭 들어맞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두 번째 퀵에게 받은 대양금융 봉투를 뜯은 동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양의 입금 은행이 또 예측을 빗나갔어요.”

 “어떻게?”

 “이번에는 W, K, J은행을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보냈지요. 그러면 저번처럼 거래가 없는 S은행으로 입금시킬 줄 알았는데… 이것은 거래하는 은행 중 하나인 K은행 통장이잖아요. 처음은 W은행, 다음은 J은행, 요번에는 K은행이에요.”

 동수가 흐리멍덩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동인아, 대양에서 은행을 자주 바꾼다는 것은 벌써 우리를 의심하는 거 아냐? 혹시 전에 슈킹 당한 경험이 있다거나.”

 “그럴 수도 있어. 잔고업체가 그리 많지 않고 거의 명동에 있으니 소문은 금세 퍼질 거야. 또 유유상종이라 서로 정보를 교류할지도 모르지. 특히 이 계통 업자들을 더 조심하라는 게 불문율이야. 내일 고려와 대양에 잔고증명을 의뢰해서 다시 파악해야겠어.”

 동인은 열받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후 세 번째 잔고업체인 서울금융 봉투가 도착했다. 서울도 대양과 마찬가지로 현우 쪽에서 의뢰인 서류를 보내면 거기서 통장을 만든다. 동수가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아 냈다. 통장에는 비번 0248이 적혀 있었다.

 “수, 수표로 입금됐어!”

 동인이 비명을 질렀다. 통장에는 어제 날짜로 1억의 자기앞 수표가 입금되었다가 오늘 출금되어 잔액 0원이 찍혔다. 순간 세 사람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느 때면 비번의 비밀을 분석하느라 바빴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필요가 없다.

 “무제한으로 잔고증명을 해 준다는 자신감이 여기에 있었네.”

 동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고려와 대양은 서류 접수 시 잔고증명을 5억까지만 해주며 현금으로 입금한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수표로 입금하는 서울금융은 완벽한 보호망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의뢰인은 돈을 벌어 주는 고객이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더욱이 동종 업자가 보내는 것은 그 내막과 허점을 잘 알기에 요주의다. 잔고증명 자체가 불법이라는 한계에서 출발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근데 수표로 입금시키면 다음 날 오후 2~3시에 돈을 찾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오전에 통장이 왔어?”

 “원래는 안 되지만 서울금융과 은행 간의 관계가 돈독하다면 그전에라도 인출이 가능해요. 현수 형이 그 은행의 VVIP 고객이라면 그 정도 편의는 봐주지 않겠어요? 하지만 수표로 입금되어 아무 의미가 없는 얘기죠.”

 “동인아, 이제 슈킹 금액이 30억으로 줄어든 거야? 아~ 이거 환장하겠네.”

 동수는 울상이 되었다. 현우도 자신의 배당이 감소한 것에 속으로 울컥했다. 동인은 창가에 서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굳게 다문 입술이 고심하고 있음을 역력히 나타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형들, 서울금융 작업은 여기서 포기하기로 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현우는 머릿속에 무언가 섬광이 스쳤다. 전혀 불가능한 작업도 아닌 것 같았다.

 “동인아, 몇 시에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인출했을까?”

 “은행 문 열자마자 바로겠지요. 사채업자 입장에서 일찍 돈을 찾아 돌려야 유리하니까요.”

 “은행에서 알려 줄까?”

 “그럴 거예요. 잠깐만요.”

 동인은 은행 직원과 통화했다. 그의 추측대로 영업 시작과 동시에 인출되었다.

 “근데 인출한 시간은 알아서 뭐 하게요?”

 “이건 가상인데 수표를 현금으로 대체한 후 돈을 내주기까지 몇 초 동안은 현금 상태로 있을 거야. 이 찰나를 이용하면 어떨까?”

 “형의 이론이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현금으로 1초만 있어도 이체는 가능해요. 은행에서 돈 찾을 때 직원의 조작 시간이 몇 초는 걸리잖아요. 미리 타행 자동이체로 등록해 놓고 현금으로 바뀌는 순간 엔터를 치면 되죠. 문제는 타이밍인데, 예상 시간 전부터 모두 모니터 앞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포인트만 정확히 맞춘다면 성공할 수 있어요.”

 “와~ 이건 완전히 SF 영화감이네!”

 동수가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동인도 숨은 그림을 찾은 듯 생기가 돌았다.

 ‘역시 이 자식은 하나를 가르치면 세 개를 아는 놈이다!’

 현우는 그의 천재성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서울금융의 비번만 안다면 포기할 까닭이 없어요. 월요일에 서류를 접수해서 비번이 0248로 똑같이 올지 바뀔지 보기로 하죠. 화이팅!”

 동인은 잃어버린 돈을 도로 찾은 양 흥분했다. 

 하루도 아닌 시간당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런 작업이 또 있을까! 현우는 디데이까지 자기 체중이 절대 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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