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목요일)
현우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동인은 잔고 업체에 보낼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동수 형은 아직 술이 덜 깨서 늦을 거예요.”
그의 말투에는 형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형, 고려금융 비밀번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1211과 1212는 접수한 월과 날짜와 같던데.”
“어? 어떻게 알았어요?”
동인은 당황했지만, 이미 자신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아이디 C423045와 H143262는요?”
“글쎄, 잘 모르겠더라고. 너는?”
현우는 일부러 시간을 뗐다. 이는 동인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치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도 어제 자정쯤에 풀었어요. 아이디는 의뢰인의 성의 알파벳과 주민번호에서 따온 거예요. 근데 한 가지 의문이 남아요. 보세요?”
그는 화이트보드에 ‘최영성 540324-1002431, C423045’, ‘현정복 521210-1432620, H1432620’을 적었다.
“문제는 아이디의 숫자예요. 주민번호 앞자리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될 텐데, 왜 뒤에서부터 했냐는 거죠. 또 현정복의 아이디는 최영성과 다르게 뒷자리를 사용했어요. 결국 두 아이디의 규칙성은 알파벳 외에는 없어요. 만약 주민번호 13자리를 무작위로 조합한다면 그 변화는 무궁무진할 거예요. 이런 식이면 디데이에 어떤 방식으로 만든 아이디를 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죠. 게다가 전화번호까지 섞인다면 아인슈타인도 당황할 거예요.”
동인은 답답함에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현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밀번호처럼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렇게 계속 아이디를 만들면 수십, 수백 개가 넘을 거야.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헷갈리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을 정해놓고 돌려야 그쪽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현우는 그의 뛰어난 사고력에 감탄했지만, 동인이 자정 무렵에 아이디를 해독해 자신보다 늦었다는 점에 위안이 되었다. 동인은 화이트보드에 0511과 0512를 썼다.
“0511과 0512는 대양에서 온 비밀번호인데, 이제 형도 감이 잡히겠죠? 05만 알면 되니까요.”
“올해가 2005년인가?”
“빙고! 만일 오늘 고려에서 1213이, 대양에서 0513이 내려온다면 비밀번호는 해결됐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근데 대양의 입금 은행을 확정하는 건 쉽지 않네요. 첫날에는 의뢰인의 거래 은행 중 하나인 W은행에 입금해 혼란을 주었고, 어제는 거래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으로 입금했어요. 대양금융 근처에는 W, K, S, J 네 개의 은행이 있어요. 그저께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W, K, S 세 개의 은행을 임의로 적어 보냈죠. 또 W은행에 입금하면 작업이 수월해요. 그 이유는 W은행이 주거래 은행으로 디데이에 입금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의뢰인이 거래하는 W, K, S를 제외한 J은행에 입금했어요.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에요. 조금 후에 봉투가 오면 어느 은행으로 입금했는지 알겠지만,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네요.”
그는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동인아, 대양의 입금 은행을 안다 해도 인터넷 뱅킹이 안 되면 이체할 수 없잖아?”
“아니에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여기서 의뢰인은 작업 손님을 의미해요. 의뢰인의 인터넷 뱅킹 통장을 미리 발급받는 거예요. 그런 다음 디데이에 그 은행에 접속하면 대양에서 만든 통장 계좌번호를 알수 있어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디데이 아침에 의뢰인에게 같은 은행 통장을 하나 더 개설하라고 해요. 대양의 잔고증명금이 입금되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후, 의뢰인에게 다시 연락을 해요. 그리고 아침에 만든 통장을 분실 신고하라고 하면서 대양에서 개설한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줘요. 의뢰인은 통장을 재발급받으면서 인터넷 뱅킹을 신청하는 거예요. 한 방에 게임 아웃이죠.”
“의뢰인이 통장을 재발급받으려면 주민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대양으로 갔잖아?”
“그 문제는 신경 쓸 것 없어요. 주민증과 운전면허증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하면 돼요. 운전면허증으로도 통장 발급이 되거든요."
현우는 의구심이 커졌다.
“대양에서 몇 시에 입금하는데?”
“4시에서 4시 30분 사이에 통장을 만들면서 입금했어요.”
“시간이 촉박하지 않을까?”
“조금 빠듯하지만 가능해요.”
“의뢰인에게는 어떻게 통장 재발급을 시켜? 명분이 필요할 텐데 의심하지 않을까?”
“통장을 분실했다는 이유를 대면 돼요. 돈이 급한 처지라서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그래서 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죠. 이건 제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인은 시험지 답안을 외운 듯이 술술 대답했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저 자식의 진면목을 안다면 아마 사기꾼들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난리가 날 거야.’
고려금융 봉투를 들고 온 퀵과 함께 눈이 충혈된 동수가 들어왔다. 동인이 꺼낸 통장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한시영의 통장에는 H412371과 1213이 적혀 있었다. 비밀번호는 맞았지만, 아이디는 현우가 예상했던 H705028이나 H217321이 아니었다. 그러나 H412371의 비밀은 매우 간단했다. 그것은 한시영의 주민번호 820507-2173214의 뒷자리 끝에서부터 6자리 숫자를 나열한 것이었다. 전날 현정복의 아이디 H143262가 뒷자리 앞에서부터 나열된 것이라면, 한시영의 아이디는 그 반대였다.
“으, 으…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동인이 야수처럼 신음했다. 현우는 그 신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적중률이 50%에서 33%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25%, 20%, 16.6%... 확률은 계속 반비례로 감소한다. 그러면 그러면 고려금융 작업이 불가능에 가깝다. 디데이에 이체는 늦어도 은행 영업 시작 전에 완료해야 하며, 그 이후에는 40억을 인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된다면 새로운 아이디를 무한히 반복해야 할 상황이다. 게다가 반드시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두 번째 퀵으로부터 받은 대양금융의 봉투를 열어본 동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양의 입금 은행이 또 예측을 빗나갔어요.”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는 W, K, J은행을 의뢰인이 거래하는 은행으로 보냈어요. 저번처럼 거래가 없는 S은행에 입금될 줄 알았는데… 이건 거래하는 은행 중 하나인 K은행 통장이에요. 처음은 W은행, 다음은 J은행, 이번에는 K은행이네요.”
동수가 흐릿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동인아, 대양에서 은행을 자주 바꾼다는 건 이미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혹시 전에 슈킹 당한 경험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어. 잔고 업체가 많지 않고 거의 명동에 있으니, 소문은 금세 퍼질 거야. 또 유유상종이라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도 있지. 내일 고려와 대양에 잔고증명을 의뢰해서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동인은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후, 세 번째 잔고 업체인 서울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서울금융은 대양과 마찬가지로 현우 쪽에서 의뢰인의 서류를 보내면 그에 따라 통장을 개설한다. 동수가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아냈다. 통장에는 비밀번호 0248이 적혀 있었다.
“수, 수표로 입금됐어!”
동인이 비명을 질렀다. 통장에는 어제 날짜로 1억 원의 자기앞 수표가 입금되었다가 오늘 출금되어 잔액이 0원이 찍혀 있었다. 순간 세 사람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비밀번호의 비밀을 분석하느라 바빴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필요가 없었다.
“무제한으로 잔고증명을 해 준다는 자신감이 여기 있었네.”
동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고려와 대양은 서류 접수 시 잔고증명을 5억 원까지만 해주며 현금으로 입금한다. 이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이런 점에서 수표로 입금하는 서울금융은 완벽한 보호망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잔고 업체의 입장에서는 의뢰인은 돈을 벌어주는 고객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더욱이 동종 업자가 보내는 서류는 그 내막과 허점을 잘 알기에 더욱 주의를 한다. 잔고증명 자체가 불법이라는 한계에서 출발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근데 수표로 입금하면 다음 날 오후 2~3시에 돈을 찾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오전에 통장이 왔어?”
“원래는 안 되지만 서울금융과 은행 간의 관계가 좋다면 그 전에 인출이 가능해요. 현수 형이 그 은행의 VVIP 고객이라면 그 정도 편의는 봐주지 않겠어요? 하지만 수표로 입금된 상황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죠.”
“동인아, 이제 작업 금액이 30억으로 줄어든 거야? 아~ 이거 정말 짜증이 나네.”
동수는 울상이 되었다. 현우도 자신의 배당이 줄어든 것에 안타까웠다. 동인은 창가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굳게 다문 입술이 고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들, 서울금융 작업은 여기서 포기하기로 하죠.”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현우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작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동인아,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서 인출한 시간이 몇 시일까?”
“은행이 문을 열자마자 바로겠죠. 사채업자로서는 돈을 빨리 찾아서 돌려야 유리하니까요.”
“은행에서 그 시간을 알려줄까?”
“잠깐만 기다려요.”
동인은 은행 직원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의 예측대로 영업 시작과 동시에 인출이 이루어졌다는 답변을 받았다.
“근데 인출한 시간을 알아서 뭐 하려고요?”
“이건 가상의 상황인데, 수표를 현금으로 대체한 후 돈을 내주기까지 몇 초 동안은 현금 상태로 있을 거야. 이 찰나를 활용하면 어떨까?”
“형의 이론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요. 현금으로 1초만 있어도 이체가 가능하죠.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직원이 조작하는 데 몇 초가 걸리잖아요. 미리 타행 자동이체를 등록해 두고, 현금으로 바뀌는 순간에 엔터를 누르면 되는 거죠. 문제는 타이밍인데, 예상 시간 전부터 모두 모니터 앞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포인트만 정확히 맞춘다면 성공할 수 있어요.”
“와~ 이건 완전히 SF 영화야!”
동수가 박수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동인도 숨은 그림을 찾은 듯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역시 이 자식은 하나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아는구나!’
현우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서울금융의 비밀번호만 알면 포기할 이유가 없어요. 월요일에 서류를 보내서 비밀번호가 0248로 그대로 유지될지 바뀔지를 보기로 하죠. 화이팅!”
동인은 잃어버린 돈을 되찾은 듯 흥분했다.
하루도 아닌 시간당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런 작업이 또 있을까! 현우는 디데이까지 자신의 체중이 절대 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