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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에 금이 가다 - 2

by 이인철

12월 14일 (금요일)


현우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조차 모를 만큼 숨이 가빠왔다. 진통제를 찾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돈 앞에서 사람이 변한다고 하지만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말의 의미를 이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문득 예전에 사채 사무실에서 일할 때의 선배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현우와 같은 건물의 사채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되어 친해졌다. 사채업자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원만한 성격에 의리를 중시하는 대장부 스타일이었다. 현우는 그와 가까워져 형이라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다.

어느 날, 그는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다며 분노를 토로했다. 현우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술집에 갔다.

“형, 이렇게 사는 거 안 지겨워요?”

“뭐가?”

“곁에서 보니 참 답답하겠다 싶어서요.”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야. 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살면서 배신이란 게 거의 뒤통수에서 오거든. 그러니 너도 자주 뒤돌아보면서 살아. 내 꼴 나지 않으려면.”

갑자기 왜 선배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지금 자신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해서라고 생각했다. 참았던 소변을 벽 모서리에 누었다. 그 냄새가 메스꺼워 구역질이 났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냈지만 개운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수록 냉정해야 해!’

분노를 억누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로수의 빛바랜 잎사귀가 겨울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아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서 바빴지? 곧 들어갈게. 동인이 왔어?”

“응, 응. 조금 전에.”

동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현우는 담배꽁초를 옆 건물 옥상으로 튕겨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일부러 문 앞에서 헛기침을 했다. 쇼핑백에서 반찬통을 꺼내 냉장고에 넣으면서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썼다. 커피를 타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현수야, 누나와 만나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동수에게 들켜버렸다.

“아, 아니. 집에 좀 문제가 생겨서.”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말을 더듬었다. 동인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느라 바빴다.

‘이중인격자 같은 놈!’

그때 상담 전화가 울렸다.

“저,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 자격이 어떻게 되나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현우가 정중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어요.”

갑자기 그녀와 조금 더 길게 통화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필요한 대출금은 얼마인가요?”

“그건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토요일도 근무하시나요? 평일에는 시간이 안 나서요.”

“주말은 쉬는데 어떻게 하죠?”

“그럼 다음 주 중에 방문하도록 할게요. 어떤 분을 찾으면 되나요?”

“저는 강 실장입니다.”

현우의 귀에 울리던 소쩍새 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은 최수혜. 주민번호로 나이를 계산해 보니 27세였다. 그는 캘린더 메모지에 ‘피아노 교사’라고 적었다.

“현수야, 너 울적한 것 같다고 동인이가 한 잔 쏜다니까 무조건 가는 거야, 알았지?”


그들은 곱창집으로 갔다. 둥근 양철판 가운데 연탄불이 놓인 추억의 식당이었다. 역시 세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사실 현우는 술이 무지 고퍘다. 저녁에 혼자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고려는 아이디만 풀면 되고, 대양은 입금 은행만 찾으면 끝이고 서울은 디데이에 작업하면 돼요. 현수 형, 수일금융 작업은 자신 있죠?”

“응? 응, 응.”

“수일 작업은 경험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불과 열흘 남았으니 힘내요!”

동인은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에 만족한 듯 자주 건배를 제안했다. 모두 취기가 올랐을 때 동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 박 부장 오빠. 지금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강 실장과 다른 오빠랑 셋이야. 세팅 좀 해줘.”

“어디 가려고?”

“너도 알잖아. 며칠 전에 대출받으러 왔던 아가씨들 가게에서 한 잔 더 하려고. 동인도 좋다고 했어. 그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어쨌든 너를 엄청 기다리고 있대. 이 자식은 여복이 많아.”


술집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룸살롱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홀이 넓고 룸도 꽤 있었다. 곧 그녀들과 한 아가씨가 들어왔다. 자동으로 동수 옆에는 선영이, 현우 곁에는 시영이 앉았다. 다른 아가씨는 동인에게 가서 찰싹 달라붙었다.

“성식 오빠는 만날 온다고 말만 하고 이제야 오면 어떡해?”

선영이 투정을 부리는 걸 보니, 이전부터 통화를 주고받은 것 같았다.

“저, 아가씨 성은 한으로 아는데 이름은 잘….”

“시영이잖아요. 저는 실장님의 성함이 강수현이라고 똑똑히 기억하는데 실망이에요.”

강수현은 명함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술에 취한 동수와 동인이 수현과 현수를 번갈아 불렀다. 한 공간에서 두 이름이 뒤섞여 떠돌았다. 현우는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재빨리 시영에게 선수를 쳤다.

“내 이름은 수현인데 저 친구들은 술에 취하면 늘 헷갈려요. 이해해 주세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본명은 현우인데, 희현에게는 현수로, 시영에게는 수현으로 불리니 이제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사무실에서 얌전했던 모습과는 달리 귀엽게 재롱떠는 그녀에게 왠지 정이 갔다.

“제가 실장님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박 부장님은 선영이와 자주 통화하는데, 실장님은 한 번도 연락이 없어서 너무 섭섭했어요.”

“미안해요. 근데 선영 씨에게 질투한 건 아니죠?”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현우는 쿨하게 인정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시영 씨, 오빠라고 불러요. 실장님보다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정말요? 진작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수현 오빠.”

“아니에요. 여동생이 생겨서 오히려 제가 영광이에요.”

시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재스민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현우는 그 향내를 음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모두 나한테 빠져드는 걸까? 난 정말 씽크홀인가 봐."

어느새 분위기는 노래방으로 바뀌어 마이크를 돌리며 불금의 밤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시영과 함께 몇 곡을 듀엣으로 불렀다. 언제부턴지 그녀는 껌딱지처럼 현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현우는 이미 주량을 넘겨 많이 취한 상태였지만,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이건 아니야.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해!’

동인은 파트너와 소파에 파묻혀 밀회를 즐기느라 바빴다. 현우는 그를 곁눈질로 째려보았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배신한 사람은 없다.’

왜 이 말이 불현듯 떠올랐을까? 분명 우정에 금이 가서라고 단정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깜짝 놀란 시영이 안주를 건네며 물었다.

“오빠,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저는 수현 오빠를 만나서 너무 좋거든요.”

“아니에요. 그냥 좀 취하고 싶어서요.”

“오빠가 외로우면 오늘 시영이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데….”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서 현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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