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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3. 2024

우정에 금이 가다 - 2

 12월 14일 (금)


 현우는 살며시 걸음을 뒤로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숨이 가빴다. 진통제를 맞는 양 담배를 찾아 물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돈 앞에서 사람이 변한다고 하지만 설마 이럴 줄 몰랐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란 게 이런 걸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말의 의미를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문득 전에 사채 사무실에서 일할 때 선배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현우와 같은 건물의 사채 사무실에서 근무했으며 선배 소개로 인사를 나누고 친해졌다. 그는 사채업자 이미지와 다르게 원만한 성격에 의리를 강조하는 대장부 스타일이었다. 현우는 그와 가까워져 형이라 부르며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를 위로해 줄 겸 함께 술집에 갔다.

 “형, 이렇게 사는 거 안 지겨워요?”

 “뭐가?”

 “곁에서 보니 참 답답하겠다 싶어서요.”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야. 살려고 요렇게 사는 거지. 살면서 배신이란 게 거의 뒤통수에서 오거든. 그러니 너도 자주 뒤돌아보면서 살아. 내 꼴 나지 않으려면.”

 갑자기 왜 이 말이 스칠까! 지금 자기의 상황과 똑같아서라고 생각했다. 벽 모서리에다 참았던 소변을 누었다. 그 냄새가 메스꺼워 구역질이 났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냈으나 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럴수록 냉정해야 해!’

 지그시 분노를 억누르며 자기 세뇌를 반복했다. 가로수의 빛바랜 잎사귀가 겨울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다.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서 바빴지? 곧 들어갈게. 동인이 왔어?”

 “응, 응. 조금 전에.”

 동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현우는 담배꽁초를 옆 건물 옥상으로 튕기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일부러 문 앞에서 헛기침을 냈다. 쇼핑백에서 반찬통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현수야, 누나 만나서 안 좋은 일 있었어?”

 감정을 감추려 노력했음에도 동수에게 들켜 버렸다.

 “아, 아니. 집에 좀 문제가 생겨서.”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살며시 떨렸다. 동인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중인격자 놈!’

 이때 상담 전화가 울렸다.

 “저,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 자격이 어떻게 되나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다. 그 목소리에 끌려 현우가 정중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지금 하시는 일은요?”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어요.”

 불현듯 그녀와 조금이라도 길게 통화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인지도 모른다.

 “필요하신 대출금이 얼마인가요?”

 “그건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토요일도 근무하시나요? 평일에는 시간 내기가 힘들어서요.”

 “주말은 쉬는데 어떡하지요?”

 “그러면 다음 주중에 방문하도록 할게요. 어느 분을 찾으면 되나요?”

 “저는 강 실장이라고 합니다.”

 현우의 귓가에 울리던 소쩍새 음성이 시나브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이름은 최수혜. 불러 준 주민번호로 나이를 계산하니 27세. 그는 캘린더 메모지에 ‘피아노 교사’라고 썼다.

 “현수야, 너 울적한 거 같다고 동인이가 한잔 쏜다니까 무조건 가는 거야. 알았지?”


 그들은 곱창집으로 갔다. 둥근 양철판 가운데 연탄불이 놓인 추억의 식당였다. 역시나 세 사람은 구석진 자리로 앉았다. 사실 현우는 술이 무지 고팠다. 저녁에 혼자라도 마실 참이었다.

 “고려는 아이디만 풀면 되고, 대양은 입금 은행만 찾으면 끝이고 서울은 디데이에 작업하면 돼요. 현수 형, 수일금융 작업은 자신 있죠?”

 “응? 응, 응.”

 “수일 작업은 경험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자, 이제 불과 열흘 정도 남았으니 우리 파이팅 해요.”

 동인은 순조로운 진척에 흡족한지, 현우를 위로해 주려는 건지, 자주 건배를 제안했다. 모두 취기가 올랐을 때 동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 박 부장 오빠. 지금 가려는데 괜찮지? 강 실장과 다른 오빠하고 셋이야. 세팅 좀 해 놔.”

 “어디 가려고?”

 “너도 알잖아. 며칠 전 대출받으러 왔던 아가씨들. 그 가게에서 한잔 더 하려고. 동인이도 OK 했어. 그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하여간 너를 엄청 기다린대. 이 자식은 여복도 많아.”

 

 술집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룸살롱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홀이 넓고 룸도 꽤 있었다. 곧 그녀들과 아가씨 한 명이 들어왔다. 자동으로 동수 옆에는 선영이, 현우 곁에는 시영이 앉았다. 다른 아가씨는 동인에게 가서 찰싹 달라붙었다.

 “성식 오빠는 만날 온다고 말만 하고 이제야 오면 어떡해?”

 선영이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전부터 통화를 주고받은 것 같았다.

 “저, 아가씨 성은 한으로 아는데 이름은 잘….”

 “시영이잖아요. 저는 실장님의 성함이 박수현이라고 똑똑히 기억하는데 실망이에요.”

 박수현이란 명함에 적힌 이름이다. 그녀에게서 서운한 음성이 돌아왔다. 그런데 술 취한 동수와 동인이 수현과 현수를 번갈아 불렀다. 한 공간에서 두 이름이 뒤섞여 날아다녔다. 현우는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얼른 시영에게 선수를 쳤다.

 “내 이름은 수현인데 저 인간들은 취하면 만날 헷갈리니 이해해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저는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가볍게 고비를 넘겼다. 

 본명은 현우, 희현에게 현수로, 시영에게는 수현으로... 이젠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사무실에서 얌전했던 모습과는 달리 귀엽게 재롱떠는 그녀에게 왠지 정이 갔다.

 “제가 실장님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죠? 박 부장님은 선영이와 자주 통화하는데 실장님은 연락 한 번도 없고… 넘 섭섭해서 울 뻔했어요.”

 “미안해요. 근데 선영 씨에게 질투한 건 아니고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솔직히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현우는 쿨하게 인정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시영 씨, 오빠라고 불러요. 실장님보다 그게 듣기 편할 거 같아요.”

 “그래도 돼요? 진작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수현 오빠.”

 “아니에요. 여동생이 생겨서 도리어 제가 영광이죠.”

 시영은 함박웃음을 띠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재스민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어느새 분위기는 노래방으로 바뀌어 마이크를 돌려 가며 불금의 밤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시영과 듀엣으로 몇 곡을 불렀다. 언제부턴지 그녀는 껌딱지처럼 현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미 현우는 소주도 양주도 주량초과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정신은 갈수록 맑아졌다.

 ‘이건 아냐.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해!’

 동인은 파트너와 소파에 파묻혀 밀회를 즐기느라 바빴다. 현우는 그런 그를 곁눈질로 째려보았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배신한 사람은 없다.’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올랐을까? 분명 우정에 금이 가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려 연거푸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깜짝 놀란 시영이 안주를 넣어 주며 말했다.

 “오빠,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저는 수현 오빠를 만나서 너무너무 좋은데.”

 “아녀요. 좀 취하고 싶어서 그래요.”

 “오빠가 외로우면 오늘 시영이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데….”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이 부끄러운지 빨개진 두 볼을 현우의 가슴에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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