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철 Aug 24. 2024

독자 노선을 선언하다 - 1

 12월 15일 (토)


 술을 섞어 마신 날이면 여지없이 머리가 아팠다. 현우는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생소한 방안을 서성이며 가까스로 지난밤 일을 떠올렸다.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술집 앞에서 헤어졌다. 시영의 부축을 받으며 포장마차에서 한잔 더 했다. 소주를 앞에 놓고 내일 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했던 것 같다. 그녀는 현우의 기분을 맞추려 연신 조잘거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모텔로 갔다. 지금 시영은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다. 정신을 차리려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졌다.

 ‘시영 씨, 위로해 줘서 고마워.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니 이해해 줘. 조만간에 밥 살게.’

 메모지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모텔을 나오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은 한바탕 눈이라도 내릴 듯 짙게 흐렸다. 현우는 사무실까지 걸었다. 주말에 출근한 것은 처음이다. 이제부터 설계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해야 한다. 저용량의 386 컴퓨터가 고성능 펜티엄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저번 판매업자에게 선불폰 세 개와 대포폰 한 개를 주문했다. 

 처음 선불폰은 희현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새로운 선불폰 하나는 시영과 통화할 예정이다. 물론 명함의 대포폰을 사용해도 되지만 나중에 통화 내역으로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다. 다른 선불폰은 명의대여자를 구하는 광고에 쓸 폰이다. 마지막 선불폰은 앞으로 왠지 필요할 것 같아 여분이다. 대포폰은 동지에서 적으로 바뀐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영원히 끊어 줄 것이다.

 월요일 오전 9시면 두 사람은 출근해 있다. 이때 밖에서 전화를 걸어 실명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폰을 구입하려 매장에 들렀으니 조금 늦을 거라고 말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그들의 실명폰에 이 대포 폰 번호를 입력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 이후 시나리오는 준비되어 있다. 당연히 시험을 하겠지만 한 명이라도 자신의 실명폰 번호를 기억한다면 이들과 끝까지 동맹으로 가야 한다.

 현우가 굳이 선불폰보다 비싼 대포폰을 주문한 이유는 따로 있다. 010은 같지만 이어서 94**-****, 98**-**** 등 9로 시작하는 번호는 선불폰이다. 이것도 동인에게 배워서 알았다. 만일 선불폰 번호를 알려 준다면 그의 예리한 안테나에 포착되는 건 순식간이다. 실명폰을 선불폰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불폰은 통화량에 비해 요금이 엄청 비싸고 충천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지역 정보지에 낼 광고는 동인이 작성한 ‘명의대여자 구함’ 광고를 참고했다. 다른 점이라면 ‘40세 이상 남·여’에서 남자를 뺐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어느 지역에 내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사무실 지역에 게재한다는 전제하에 장단점을 비교해 보았다. 이 지역에 광고를 내는 것에 어려움은 없다. 영업사원이 그들보다 자기와 친하므로 함구해 달라하면 된다. 물론 사무실에 출근한 후로는 광고 전화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해결 방법은 마련해 두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지역에 광고를 내는 것도 괜찮다. 그래도 더 깊이 더 넓게 사고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는 독자 노선을 선언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최악을 염두에 둘 것. 둘째, 객관적으로 볼 것. 셋째,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할 것.

 지금은 첫 번째 상황이다. 작업이 끝난 후 수사가 개시되면 이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은 조사 대상이 된다. 현우가 낸 명의대여자 광고를 통해 돈을 찾은 여자들은 신문을 받는다. 그녀들은 이 지역의 정보지를 보고 한 것이라며 실토할 것이다. 곧이어 그가 독자적으로 광고를 내서 인출책을 모집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면 두 사람은 중간에서 돈을 가로챈 사람이 현우라고 단정 짓는다. 그에게 명의대여자가 필요한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형제는 복수심으로 서로의 입을 맞춰 현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며 주범으로 몰 것이다. 다수의 진술이 신뢰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더욱이 그가 손님들을 상담했기에 외적으로는 가장 많이 개입한 인물이다. 바로 현우의 고뇌가 여기에 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비밀을 간직한 채 웃으며 돌아서야 한다. 만약 그들이 이 내막을 알게 된다면 훗날 후환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지금 현우는 스스로를 악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40억에서 4억, 20억 중 2억이라는 터무니없는 분배가 어찌 상식선이란 말인가!

 배신의 원인 제공은 그들이다. 또 두 사람은 작업한 돈을 전부 유흥비나 도박으로 탕진하여 결국 무일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원점으로 돌아갈 이들에게 동정할 이유도 없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도 현우가 이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따로 있었다. 그 순간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동수는 K은행에서 낯선 사내가 도망갈 수 있다며 감시하라고 했다. 그때는 비자금을 세탁하는 줄 알았기에 죄의식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 일에 직접 관여한 것도 아니며 단지 망만 보아서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역할도 범죄의 공범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속인 것이다. 다행히 미수로 그치고 잔고업자가 사건을 무마해서 운 좋게 넘어간 것뿐이다. 만일 그 사건이 터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행여 그 작업이 성공했다고 치자.

 “잘 됐으면 형 몫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연 이 몫은 얼마였을까? 아마 천만 원 정도를 주면서 더없는 생색에 자신은 감지덕지하며 받았을 것이다. 고작 그 금액에 5억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엮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를 일회용 소모품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또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전의 작업 방법이 너무 무모했다는 것이다. 현우는 CCTV에 찍히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줄도 몰랐다. 상가 2층 K은행 복도 천장에 설치된 CCTV를 정확히 보았다. 하물며 잠실 K은행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 CCTV를 의식하지 않고 개선장군처럼 휘젓고 다녔다. 분명 각도별로 찍힌 영상이 무수히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시디를 교환하러 간 사채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동인의 무데뽀가 한심할 뿐이다. 혹시 자신만 노출이 안 되면 괜찮다는 속셈이었을까? 그러면 친형인 동수는? 또 나는?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슈킹 당한 잔고업자가 결코 신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한단 말인가! 사람의 성격과 추구하는 목적은 각기 다르다. 아마 돈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사채업자가 아닐까? 잔고증명이 불법이라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할까? 사실 잔고증명은 어떤 면에서 카드깡과 비슷하다.

 공통점이라면 엄청난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 이자가 연 49% 이상 넘지 못하게 규제한다. 이를 위반하면 ‘대부업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그런데 이 처벌이 금액과 상습에 따라 다르지만 몇백만 원의 벌금에 그친다. 

 쌍방이 고액의 수수료를 인정한 행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잔고증명은 여기에 사기죄가 추가된다. 원칙은 자기 돈으로 해야 하는데 남의 돈을 이용한 것으로 상대방을 기망하여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해서다. 그래서 의뢰인은 잔고업자와 사기죄의 공범이 된다. 비록 이들은 사기라는 실정법을 위반했지만 일방적인 피해자가 없어 처벌 수위가 무겁지 않다.

 현우는 이 실체를 명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관련 법을 공부했고 변호사에게도 질의하여 돌아온 응답이었다. 동인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전주와의 관계도 있다. 또한 그 계통에서 무능력자로 취급받기에 신고를 꺼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장담할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잔고업자가 자기 자금으로 할 수도 있으며 전주를 보호하려고 본인의 돈이라고 우기면 끝이다.

 법원 판례를 찾아보니 의뢰인과 잔고업자는 대부분 벌금형이었다. 그리고 수사기관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인 잔고업자를 굳이 괴롭힐 이유가 없다. 왜냐면 잔고증명은 경미한 죄이고 돈을 슈킹 한 범행은 계획적으로 사기 친 중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사건 후 잔고업자의 대응이다. 동인은 이런 연유로 절대 신고를 못할 거라고 했으나 그는 이 점에서도 생각이 달랐다. 억대를 슈킹 당하고도 기껏 몇백만 원의 벌금이 아까워 고소를 안 하겠는가! 전에 성공한 두 번의 작업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니다, 어쩌면 사건화가 되어 지금 수사 중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확인할 방법은 매스컴 외에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경찰서나 검찰청에 가서 자신의 지명수배와 기소중지를 조회할 수도 없다. 결국 이들은 현우가 세운 세 가지 철칙 중 ‘객관적으로 볼 것’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사실 현우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조사한 것은 그들이 아군에서 적군으로 바뀌면서부터이다. 이제 독자 노선을 선언한 이상 사소한 허점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완전범죄를 만들 수 있다. 그는 이 작업이 끝나자마자 잔고업자의 신고를 전제로 설계하고 있다. 그것도 무려 40억 사기 사건으로 4곳의 잔고업체가 동시에 고소한다는 상황에서...

 고심 끝에 현우는 ‘명의대여자 구함’ 광고를 타 지역 정보지에 내기로 결정했다. 사무실 팩스를 이용하지 않고 한참 떨어진 문구점에서 광고 문안을 보냈다. 이로써 정보지 회사에 증거로 남을 팩스 용지에 찍힌 전화번호는 문구점의 번호가 인쇄될 것이다. 그런 후 문안에 빈 전화번호는 조금 후에 알려 주겠다고 했다. 담당자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광고가 게재된다고 말했다. 

 현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전화를 걸었다.

 “거기 미래금융이죠? 실례지만 전에 근무했던 고성진 부장님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김정민 이사님 좀 바꿔 주실래요?”

 “예, 김 이사입니다.”

 굵은 저음을 들으니 시간이 지났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김 이사님, 저 박현수입니다. 기억나세요?”

 현우는 그가 자기의 본명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일부러 현수라고 둘러댔다.

 “누구시더라….”

 “고성진 부장 후배로 1년 전에 그 사무실에서 두어 달 근무한 적이 있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 근데 자네가 웬일이야?”

 “혹시 고 부장이 어디서 근무하는지 아세요?”

 “글쎄, 현수도 알다시피 난 고 부장과 좀 그랬잖아. 그래서 이후로 연락한 적이 없어.”

 분명 김 이사는 자기를 현수라고 불렀다. 이로써 한 고비는 넘겼다.

 “그럼 고 부장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명함이 있던 지갑을 분실해서요.”

 “나도 모르는데 어쩌지…?”

 “고 부장의 연락처를 아는 직원은 없을까요?”

 “아마 그럴 거야. 자네도 알지만 이 계통 사람들은 자주 그만두잖아.”

 “다음에 한번 들를게요.”

 겉치레로 인사한 현우는 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현수로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네.”

 수사가 개시되면 동수와 동인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그와의 만남 동기를 추궁받을 것이다. 당연히 미래금융 얘기가 나올 거고 현우와 선배의 관계도 밝혀진다. 그러기에 선배의 소재 파악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유는 그가 현우의 실명폰 번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우는 선불폰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결번이나 외부인이 받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네. 고성진입니다.”

 실망스럽게도 선배의 목소리였다.

 “선배, 저 현우예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오랜만에 본명을 말하니 기분이 야릇했다.

 “야, 오랜만이다. 이 무심한 놈아, 이제야 전화하냐?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려 연락할 수가 없었어. 거기에 지인들 연락처가 다 저장되어 있었거든. 이 폰은 새로 장만한 건데 번호는 전에 것을 그대로 쓰고 있어. 이 번호가 내 밥줄이잖아.”

 선배는 무척 반가운지 그대로 두면 몇 시간이라도 통화할 것 같았다.

 “현우야, 앞으로 이 번호로 전화하면 되냐? 조만간 만나서 맘껏 회포를 풀자구나. 잘 지내!”

 이로써 현우는 자기 실명폰 번호 유출의 절반은 막았다. 선배의 휴대폰 분실이라는 우연성이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는 선배에게 우리의 관계를 침묵해 달라고 부탁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일 뿐이다. 동인처럼 말이다. 또한 선배가 끝까지 입을 다문다는 보장도 없다. 수사기관에서 회유와 설득을 할 것은 뻔한 일이다. 억울한 피해자가 당신이라면… 등의 정의사회 구현을 들먹이면서.

 선배도 사채업에서 일하기에 사채업자의 편을 들거나 동조할 수 있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 아닌가! 지금껏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이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일 이 사건의 진실이 폭로된다면 서로의 사이는 깨질 수도 있다. 고로 이 작업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걱정과 불안이 선배와의 통화로 말끔히 정리되었다. 

 이제 절반 남은 숙제는 동수와 동인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기의 실명폰 번호를 삭제하는 일이다. 이미 작전을 세웠기에 큰 근심은 되지 않았다.

이전 23화 우정에 금이 가다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