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토)
술을 섞어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머리가 아팠다. 현우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생소한 방 안을 서성거리며 겨우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술집 앞에서 헤어졌고, 시영의 부축을 받아 포장마차에서 한 잔 더 했다. 소주를 앞에 두고 내일 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했던 것 같다. 그녀는 현우의 기분을 맞추려 연신 조잘거렸고, 자연스럽게 모텔로 향했다. 지금 시영은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했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졌다.
‘시영 씨,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니 이해해 줘요. 조만간에 밥 살게요.’
메모지의 마지막 문장에 굵게 밑줄을 그었다.
모텔을 나서니 시간은 11시가 지나 있었다. 하늘은 한바탕 눈이 내릴 듯 짙게 흐렸다. 현우는 사무실까지 걸어갔다. 주말에 출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부터 설계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야 한다. 저용량의 386 컴퓨터가 고성능 펜티엄을 능가해야만 했다.
먼저 지난번 판매업자에게 선불폰 세 개와 대포폰 한 개를 주문했다.
첫 번째 선불폰은 희현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용도다. 새로운 선불폰 하나는 시영과 통화할 예정이다. 물론 명함에 적힌 대포폰을 이용해도 되지만, 나중에 통화 기록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다. 다른 선불폰은 명의 대여자를 구하는 광고에 사용할 폰이다. 마지막 선불폰은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 여분으로 두었다. 대포폰은 동지에서 적으로 바뀐 이들과의 연결고리를 영원히 끊어 줄 것이다.
월요일 오전 9시면 두 사람은 출근해 있다. 이때 밖에서 전화를 걸어 실명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폰을 구입하려고 매장에 들렀으니 조금 늦을 거라고 말한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그들의 실명폰에 이 대포폰 번호를 입력하는 과제가 남았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당연히 시험을 하겠지만, 한 명이라도 자신의 실명폰 번호를 기억한다면 이들과 끝까지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
현우는 선불폰 대신 가격이 더 비싼 대포폰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010 번호는 동일하지만, 94**-****, 98**-**** 등 9로 시작하는 번호는 선불폰으로, 이는 동인에게 배운 사실이다. 만일 선불폰 번호를 알려주면, 그의 예리한 눈썰미에 포착되는 건 순식간이다. 실명폰을 선불폰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불폰은 통화량에 비해 요금이 비싸고, 충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 정보지에 게재할 광고는 동인이 작성한 ‘명의대여자 구함’ 광고를 참고했다. 단, ‘40세 이상 남·여’에서 남자를 제외한 점이 다르다. 그는 이 광고를 어느 지역에 게재할지 고민에 빠졌다. 사무실 지역에 내는 것을 전제로 장단점을 비교해 보았다. 장점은 퇴근 후 명의대여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광고가 드물기에 이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사무실에 출근한 후에는 광고 전화를 받을 수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마련해 두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지역에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더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는 독자 노선을 선언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기. 둘째,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셋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이다.
현재는 첫 번째 상황에 해당한다. 작업이 끝난 후 수사가 시작되면 이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은 조사 대상이 된다. 현우가 낸 명의대여자 광고를 통해 돈을 찾은 여자들은 신문을 받게 된다. 그녀들은 이 지역의 정보지를 보고 연락했다고 진술할 것이다. 곧이어 그가 독자적으로 광고를 내어 인출책을 모집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면 두 사람은 중간에서 돈을 가로챈 사람이 현우라고 단정할 것이다. 그에게 명의대여자가 필요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복수심에 불타 서로의 입을 맞추어 현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며 그를 주범으로 몰아갈 것이다. 다수의 진술이 신뢰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더욱이 그가 손님들을 상담했기에 외적으로는 가장 많이 개입한 인물이다. 바로 현우의 고뇌가 여기에 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비밀을 간직한 채 웃으며 돌아서야 한다. 만약 그들이 이 내막을 알게 된다면, 훗날에 큰 후환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 현우는 자신을 악인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40억에서 4억, 20억 중 2억이라는 터무니없는 분배가 어떻게 상식적일 수 있는가!
배신의 원인은 그들이다. 두 사람은 작업한 돈을 모두 유흥비나 도박으로 탕진하여 결국 무일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원점으로 돌아갈 이들에게 동정할 이유는 없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도 현우가 이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동수는 K은행에서 낯선 사내가 도망갈 수 있다며 감시하라고 했다. 그때는 비자금을 세탁하는 줄 알았기에 죄의식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 일에 직접 관여한 것도 아니고 단지 망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역할도 범죄의 공범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속인 것이다. 다행히 미수로 그치고 잔고 업자가 사건을 무마해 운 좋게 넘어간 것뿐이다. 그리고 그 작업이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잘 됐으면 형 몫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연 이 몫은 얼마였을까? 아마 천만 원 정도를 주면서 더없이 생색을 내고 자신은 감지덕지하며 받았을 것이다. 고작 그 금액에 5억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엮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전의 작업 방식이 너무 무모했다는 점이다. 현우는 CCTV에 찍히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몰랐다. 그는 K은행 2층 복도 천장에 설치된 CCTV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잠실 K은행은 말할 것이 없다. 수많은 CCTV를 의식하지 않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다녔다. 각도별로 촬영된 영상이 무수히 저장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채 사무실에 시디를 교환하러 간 것도 마찬가지다. 동인의 무모함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진다. 혹시 자신만 노출되지 않으면 괜찮다는 속셈이었을까? 그렇다면 친형인 동수는? 그리고 나는? 그 부분까지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또한, 슈킹 당한 잔고 업자가 결코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성격과 추구하는 목적은 각기 다르다. 아마도 돈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은 사채업자일 것이다. 잔고증명이 불법이라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할까? 사실 잔고증명은 어떤 면에서 카드깡과 유사하다.
공통점은 엄청난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이자는 연 49%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이를 위반하면 ‘대부업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그런데 이 처벌은 금액과 상습에 따라 다르지만 몇백만 원의 벌금에 그친다.
쌍방이 고액의 수수료를 인정한 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반면 잔고증명에는 사기죄가 추가된다. 원칙적으로 자기 돈으로 해야 하는데, 남의 돈을 이용해 상대방을 기망하여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경우다. 그래서 의뢰인은 잔고 업자와 사기죄의 공범이 된다. 비록 이들이 사기라는 법을 위반했지만, 일방적인 피해자가 없어 처벌 수위가 높지 않다.
현우는 이 실체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관련 법을 공부하고 변호사에게 질문하여 돌아온 답변이었다. 동인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전주와의 관계도 존재한다. 잔고 업자가 전주로부터 무능력자로 취급받기에 신고를 꺼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추측일 뿐이다. 잔고 업자는 자신의 자금으로 거래할 수 있으며, 전주를 보호하기 위해 본인의 돈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법원 판례를 살펴보니, 의뢰인과 잔고 업자는 대개 벌금형을 부과했다. 수사기관이 이 사건의 피해자인 잔고 업자를 괴롭힐 이유는 없다. 잔고증명은 경미한 범죄로 간주하지만, 돈을 슈킹한 행위는 계획적인 사기로 중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사건 이후 잔고 업자의 대응이다. 동인은 잔고증명이 불법이라서 절대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이 점에서도 생각이 달랐다. 억대의 돈을 손해보고도 몇백만 원의 벌금이 아까워 고소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이전에 두 번의 작업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사건화가 되어 수사가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확인할 방법은 언론 외에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경찰서나 검찰청에 가서 자신의 지명수배나 기소중지를 조회할 수도 없다.
결국 이들은 현우가 세운 세 가지 철칙 중 ‘객관적으로 볼 것’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간과한 것이다.
사실 현우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조사한 것은 그들이 아군에서 적군으로 바뀌면서부터이다. 이제 독자 노선을 선언한 이상, 사소한 허점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야만 완전범죄를 이룰 수 있다. 그는 이 작업이 끝나자마자 잔고 업자의 신고를 전제로 설계하고 있다. 그것도 무려 40억 원 규모의 사기 사건으로, 4곳의 잔고 업체가 동시에 고소하는 상황에서...
고민 끝에 현우는 ‘명의대여자 구함’ 광고를 다른 지역의 정보지에 내기로 결정했다.
사무실 팩스를 이용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문구점에서 광고 문안을 보냈다. 그런 후 문안에 빈 전화번호는 조금 후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로써 정보지 회사에는 문구점의 전화번호가 인쇄된 팩스 용지만 증거로 남을 것이다. 담당자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광고가 게재된다고 말했다.
현우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걸었다.
“거기 미래금융이죠? 실례지만, 전에 근무했던 고성진 부장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김정민 이사님 좀 바꿔 주실래요?”
“네, 김 이사입니다.”
“김 이사님, 저 박현수입니다. 기억하시나요?”
현우는 그가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현수라고 말했다.
“누구였더라….”
“고성진 부장 후배로, 1년 전에 그 사무실에서 두어 달 일한 적이 있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네. 근데 자네가 웬일이야?”
“혹시 고 부장이 지금 어디서 근무하는지 아세요?”
“글쎄, 현수도 알다시피 난 고 부장과 좀 안 좋았잖아. 그래서 그 이후로 연락한 적이 없어.”
김 이사가 분명히 자신을 현수라고 불렀다. 이로써 한고비는 넘겼다.
“그럼, 고 부장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명함이 있던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나도 모르겠는데…?”
“고 부장의 연락처를 아는 직원은 없을까요?”
“아마 그럴 거야. 자네도 알겠지만, 이 업계 사람들은 자주 그만두잖아.”
“다음에 한 번 들르겠습니다.”
형식적으로 인사한 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현수로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네.”
수사가 개시되면 동수와 동인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그들이 만난 동기를 추궁받을 것이다. 당연히 미래금융 이름이 나올 것이고, 현우와 선배의 관계도 드러난다. 그래서 선배의 소재 파악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가 현우의 실명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였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선불폰을 눌렀다. 결번이거나 외부인이 받기를 은근히 바랐다.
“네. 고성진입니다.”
실망스럽게도 선배의 목소리였다.
“선배, 저 현우예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오랜만에 본명을 말하니 기분이 묘했다.
“야, 오랜만이다. 이 무심한 놈아, 이제야 전화하냐?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 거기에 지인들 연락처가 다 저장되어 있었거든. 이 폰은 새로 산 건데 번호는 예전 것 그대로 쓰고 있어. 이 번호가 내 밥줄이잖아.”
선배는 무척 반가운 듯 그대로 두면 몇 시간이라도 통화할 것 같았다.
“현우야,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냐? 조만간 만나서 마음껏 회포를 풀자. 잘 지내!”
이렇게 현우는 자신의 실명폰 번호 유출을 절반은 막을 수 있었다. 선배의 휴대폰 분실이라는 우연한 상황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선배에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다물어 달라고 부탁할까도 고민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일 뿐이었다. 동인처럼 말이다. 또한 선배가 끝까지 비밀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수사기관에서 회유와 설득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억울한 피해자가 당신이라면…” 같은 정의 사회 구현을 언급하며...
선배도 사채업에서 일하기에 사채업자의 편을 들거나 동조할 수 있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 아닌가! 만일 이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다면 서로의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작업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걱정과 불안은 선배와의 통화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동수와 동인의 휴대폰에 자신의 실명 전화번호를 삭제하는 것이다. 이 계획을 이미 세워 놨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