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월)
현우는 사무실에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이미 동수에게 전화로 사유를 설명했기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동수야, 토요일에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술집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안 나.”
“어떤 폰이에요?”
동인의 물음은 실명폰인지 명함의 대포폰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응, 내 폰이야.”
“휴우.”
동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에 현우는 어이가 없고 괘씸하게 느꼈다.
“그 폰에 전화는 해봤어?”
“전원이 꺼져 있다고 나오더라. 아마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아. 동수야, 네 폰 좀 줘. 내 새 번호를 찍어줄게.”
현우는 이런 행동이 처음이라 침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게 힘들었다.
“현수 형, 왜 번호까지 바꿨어요? 지인들에게 다시 알려주려면 힘들 텐데요.”
‘구미호 같은 놈.’
동인과의 관계가 적으로 바뀐 이후, 현우는 그의 호의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리라.
“예전 번호가 마음에 안 들고 스팸도 많이 와서 이 기회에 바꾼 거야.”
그는 동수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기의 번호를 재빨리 지우고 새로운 대포폰 번호를 입력했다. 이어 동인의 폰에도 입력했다. 그리고 능청을 떨었다.
“동수야, 전에 내 번호 기억하니? 막상 내 번호는 기억이 안 나더라고.”
“야! 그걸 어떻게 알겠냐? 나도 내 번호를 모르는데 네 것까지 외우냐? 다 이름으로 저장하지.”
동수는 뻔한 걸 왜 묻냐는 투였다.
“동인아, 너는?”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순간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앞자리는 알겠는데… 뒷번호는 모르겠네요.”
이로써 절반 남았던 자신의 실명폰 번호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두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만약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긴다 해도 현우의 대한 추적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번 주부터 상담을 오후로 미루었다. 오전에는 잔고 업체의 암호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서울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비밀번호는 이전과 같은 0248이었다.
“야호!”
동수는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의미이기에 그의 흥분은 이해할 만했다. 입금 은행도 C은행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서울금융의 주거래 은행은 C은행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수표로 입금하기에 같은 비밀번호와 동일한 은행으로 해도 완벽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우리 사무실에서 보낸 잔고증명에 비밀번호와 입금 은행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것은 개인이 의뢰해도 똑같을 확률이 높다.
“서울금융에 대한 정보 분석은 다 끝난 거네.”
“아니, 그래도 개인으로 한두 번 더 시도해 봐야 해. 업자에게 받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니까.”
낙천적인 동수와는 달리 동인은 신중하게 반응했다.
다음으로 대양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비밀번호는 예상대로 0514였다. 그러나 입금 은행은 처음 보는 H은행이었다. 근방에 있는 W, K, J, H 은행을 한 번씩 돌아가며 입금한 것이다.
“우리 작업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장난치듯이 수수료를 챙기는 것 같아. 대양은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냐?”
동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거야.”
동인은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지. 동인아, 저번에 네가 잔고 업체마다 주거래 은행이 있다고 했지? 그래야 VIP 대접을 받아서 일 처리가 수월해진다고.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어떤 규칙에 따라 만들듯이 주거래 은행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가령, 고액의 잔고증명이나 업자보다 안전한 개인 의뢰는 주거래 은행으로 입금할 수 있잖아. 어차피 그 은행에 실적을 쌓아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으니까.”
“맞아! 그럼, 이번에 고액과 개인으로 보내면 답이 나오겠네. 야~ 현수 너 대단하다! 이제 박사가 다 됐네. 동인아, 현수의 말대로 한번 해보자.”
“그럴 수도 있겠네. 오늘 양쪽으로 보내볼게.”
동인이 기뻐할 줄 았았는데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기분이 상한 듯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현우는 앞으로 그가 먼저 의견을 묻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퀵이 고려금융의 봉투를 놓고 나갔다. 아이디는 S946543으로, 주민번호에서 찾을 수 없는 숫자였다. 동인은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금요일에 보낸 의뢰인의 이름은 신성모로, 주민번호는 552401-1662810이었다. S는 그들이 알고 있는 성 SHIN의 첫 글자였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쉽게 풀렸다. 그것은 신성모의 휴대폰 번호 010-9465-4331에서 9로 시작하는 여섯 자리 숫자였다.
물론 이 전화는 사무실에 있는 선불폰이었다.
“와~ 미치겠네. 올 때마다 아이디가 바뀌니 이거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잖아.”
동수가 신경질적으로 소파를 걷어찼다.
“현수 형, 이제 형이 좀 고생해야겠네요.”
“뭘?”
현우는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고려금융에 개인으로 의뢰하는 척 전화하라는 뜻이다. 동인의 목소리는 그쪽과 자주 통화했기에 발각될 위험이 있어서였다. 몇 번의 예행연습을 한 현우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폰을 들었다.
“잔고증명 광고를 보고 전화하는 건데요? 아파트 새시 공사 입찰에 들어가려는데 1억 5천만 원의 잔고증명서가 필요해서요. 모레까지 입찰 서류를 제출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가 공사 관계로 현장에 있어서 사무실을 방문하기가 어렵네요. 준비 서류와 수수료를 보내면 안 될까요? 잔고증명서는 내일 오전 중으로 도착 부탁드릴게요. 또 잔고 통장을 계속 쓸 거니까 비밀번호도 알려주세요.”
같은 내용을 대양과 서울금융에도 반복했다. 그들은 사무실과 개인으로 보낼 6부의 서류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잔고증명서는 평소보다 높은 5억으로 조정했다. 동인은 그 이유를 어차피 이 금액으로 작업할 것이므로 수수료는 아깝지만, 디데이에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수 형, 이 봉투를 사용하면 어떡해! 이 봉투는 사무실에서 보냈던 것과 같은 건데, 또 개인 용도로 쓰면 자폭하자는 거야? 빨리 문구점에 가서 다른 봉투를 사와!”
동인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의 치밀함에 현우는 혀를 내둘렀고, 이전 작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삐리릭 삐리릭.’
동인이 낸 명의대여자 광고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그는 서둘러 나갔다. 밖에서 돌아온 동수가 짜증 난 얼굴로 봉투를 책상 위에 던졌다. 현우는 그의 기분을 달래려고 커피를 타서 건넸다.
오늘 오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동수는 포커 게임에 빠져 탄성을 질렀고, 현우는 그의 단순함이 부러웠다.
금요일에 전화한 손님이 방문했다.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3천만 원이 꼭 필요하다고 간청했다. 그녀의 간절함에 현우가 그 사유를 물었다.
“제 딸은 중학교 3학년인데 학교에 갈 수가 없어 집에서 인터넷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게라도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려고요.”
“왜 학교에 못 나가나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았던 딸이 무릎 통증을 호소한 것은 1년 전이었어요. 근데 병원비가 없어서 미루기만 했죠. 그러다 걸음걸이가 불편해져서야 병원에 데려갔어요.”
병명은 ‘만성 신부전증’이라고 했다. 체내 독소를 걸러 주어야 할 신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독소가 다리에 영향을 미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제때 병원에 갔더라면…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정말 잘 키우려 했는데….”
여자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10년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약해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양품점을 운영하며 남매를 키워왔다고 했다. 새벽에 장을 보며 악착같이 일해 작은 가게가 딸린 집도 마련했지만,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점점 생활비를 벌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물건을 들여놓고 홍보도 했지만, 빚만 늘어났습니다.”
은행 대출과 사채 이자가 불어나면서 평생을 바쳐 마련한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새출발을 하려던 차에, 딸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했다.
“병원에 다니느라 가게를 닫는 날이 많아지니, 그나마 있던 손님도 끊기더군요. 다행히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되어 약값과 병원비는 조금 지원받고 있지만, 빚은 계속 쌓이고 있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신장 이식을 위한 조직 적합성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완전한 조직의 일치 판정!’
부모와 자식 간에도 1,000분의 1의 확률로 극히 드문 경우라고 한다. 딸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에 그녀는 큰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비 3천만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기적을 믿지 않았는데 검사를 받고 희망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 한 줄기 빛이 돈이 없는 부모 때문에 절망으로 바뀌고….”
여자는 힘없이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우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출이 잘될 거예요.’
이 말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힘겹게 일어나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명의대여자를 만나러 간 동인이 밝은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대화가 잘 되었고, 이제 한 명만 더 구하면 된다고 하며 싱글벙글거렸다. 여자 4명이 10억 원씩을 찾으려는 계획인 듯했다.
현우는 이 점에서 동인과 생각이 달랐다. 그러나 지난번 동인의 무뚝뚝한 반응을 떠올리며 말을 아꼈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선 시간은 저녁 7시가 넘었다. 횡단보도에서 헤어진 현우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류 준비하셨다면서요? 마침 이 근처를 지나다가 보니 수혜 씨 집과 가까워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바쁘신데 내일 사무실에 오실 필요 없이 제가 받아 가려고요. 대신 다음에 커피를 사셔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사실 현우는 그녀에게 미리 전화해 오늘 사무실에 올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수혜는 내일 들르겠다고 했다. 만약 그녀가 방문하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막아야 했다.
수혜가 이들과 대면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아군을 적에게 노출하는 것은 작전에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쳤다.
내일부터는 현우가 낸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문의 전화가 올 것이다. 퇴근 후에는 독자적인 업무가 다시 시작된다. 이제 남은 시간은 열흘도 안 남았다.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고층 빌딩 옥상에 설치된 광고 조명판에 ‘디데이 9일’이라는 문구가 반짝였다. 물론 그것은 오직 현우의 눈에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