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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8. 2024

아군에서 사랑으로 - 1

 12월 19일 (수)


 고려금융 봉투가 도착했다. 긴장된 가운데 동인이 통장을 꺼내 겉면을 넘겼다. 순간 현우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이디는 S428055, 비번은 1218이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송영수의 주민번호 550824-1842920으로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아이디는 주민번호 앞자리를 뒤에서부터 나열한 숫자이다. 역시 일주일 간격으로 돌린 것이다. 현우의 예측이 딱 들어맞았다. 동인은 적잖이 놀라며 자못 기분이 들떴다. 포기했던 10억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동수가 고려에 개인으로 보냈던 봉투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통장의 아이디도 마찬가지였다. 월요일은 주민번호 앞자리를, 화요일은 그 숫자를 뒤에서부터, 수요일은 뒷자리를, 목요일은 그 번호를 반대로, 금요일은 전화번호로 만들었다. 결국 고려는 헷갈림과 분실을 방지하면서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고도의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이걸로 고려의 정보 파악은 끝났네. 야호! 이제 돈만 챙기면 되겠네.”

 동수가 환호성을 지르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때 중년 부부가 들어왔다. 남자는 쭈뼛거렸고 여자가 얘기를 주도했다.

 “저희는 청소 대행 프랜차이즈에 가입하여 일을 하고 싶은데 창업비용이 부족해서 왔어요.”

필요한 대출금은 가맹비, 장비 구입비, 차량 등 3천만 원으로 무점포로도 가능하다고 했다. 잠자코 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얼마 전까지 자동차 부품업체 공장을 운영했지요. 그런데 납품했던 거래처가 부도나는 바람에 거기서 받은 어음들이 휴지 조각이 되었어요. 문제는 그 어음을 제가 이서하여 하청업체에 준 거죠. 부도낸 사장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하청업자들은 저에게 책임을 물어왔지요. 그래서 죽어라 일하며 마련한 집과 차까지 팔아서 빚잔치를 하고 보니 돈이 없네요.”

 눈물을 훔친 아내가 가만히 남편의 손을 쥐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듯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한 팔다리가 있으니 감사하죠. 아내가 먼저 이 일을 하자고 했어요. 한때 모든 걸 포기한 저를 묵묵히 참아 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마워요. 이제 어떤 일이라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해야지요.”

 현우는 쭈글쭈글한 주름살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남자의 마음고생을 알 것 같았다. 손을 꼭 잡고 나가는 부부의 뒷모습에서 언뜻 밀레의 ‘만종’ 그림이 겹쳐졌다.

 “제일 골치였던 고려의 아이디도 풀렸고 대양, 서울은 문제없고 수일금융은 바지만 구하면 땡이네. 동인아, 그동안 미스터리 해결하느라 모두 고생했는데, 오늘 한잔 어때?”

 “그 모두에 동수 형은 빠져야 되는 거 아냐? 은근히 무임승차 하네.”

 “그래, 그래. 알았어. 자식이 까칠하긴.”

 “현수 형도 괜찮죠?”

 “난 힘들겠는데. 누나가 상의할 일이 있다며 오늘 집에 들르라고 해서.”

 동수가 몇 번을 회유하였지만 그의 단호함에 두 손을 들었다.     


 사무실을 나왔을 때 밖은 어두웠다. 요즘은 오후 5시가 넘으면 땅거미가 드리운다. 현우는 유턴하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집기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가 있다. 그는 창고에 있던 쇼핑백에서 선불폰 4개와 잠바를 꺼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2개 폰은 희현, 시영과 통화한 폰이고 다른 폰에는 수혜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나머지 폰은 명의대여자들과 통화하는 폰이다. 희현, 시영과는 이틀에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군들과 평소 친밀감을 쌓아야만 유사시에 전우애를 발휘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현우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휴대폰과 잠바를 창고에 감춰 두었다. 무례한 동수가 호기심으로 불시에 쇼핑백을 열어 볼 수 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면 여러 개의 휴대폰을 소지한 합당한 이유를 대기가 무척 어렵다.

 "친구가 집에 두고 간 것을 돌려주려고 갖고 있던 거야."

 한 개라면 이 말이 통하겠지만 4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이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냈다. 도수가 없는 두꺼운 밤색 뿔테 안경은 노점상에게 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안경을 쓰고 거울 앞에 서니 학구파처럼 보였다. 

 평상시 현우는 짧은 머리에 가르마를 타고 무스를 발라 단정한 차림이었다. 귀를 반쯤 덮고 이마까지 내려오는 가발을 뒤집어썼다. 털모자를 쓴 듯 머리가 따뜻해 좋았지만 좀 답답했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에 깜짝 놀랐다. 단지 안경과 가발만으로 이렇게 변신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넥타이를 풀고 코트를 벗고서 잠바를 걸쳤다. 이로써 제3의 인물이 완벽하게 탄생했다. 마치 자신이 비밀 첩보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을 향해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명의대여자를 만나려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커피숍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중년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낡은 파카와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파마기가 풀린 머릿결과 외투가 어려운 현실을 대변했다. 여자는 흰 피부와 통통한 얼굴에 몸집이 컸다. 머리를 손질하고 옷차림을 잘 갖추면 복부인처럼 보여 큰돈을 찾아도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주민증과 등본을 내놓았다. 이 준비물은 통화하면서 미리 말했다. 등본에는 남편과 딸 둘이 등재되었고 주소도 말소된 적이 없어 일단 신원은 정상으로 보였다. 전입신고 날짜가 10여 년이 넘었다. 주거가 안정하다는 의미기에 돈을 갖고 도망갈 가능성은 적다. 만약 전입신고일이 최근이면 전출입 사항이 기재된 초본을 요구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명의대여에 대해 아세요?”

 “아니요. 저는 고소득을 보장한다기에 나온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하고 싶어요. 사실 요즘 무척 힘들고 급한 사정이 있어서….”

 여자는 애처로운 음성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직 경계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우는 상대방이 이 일을 하려는 이유에 관해 일절 묻지 않기로 했다. 대화가 길어질뿐더러 감정의 동요는 선택에 차질을 주기 때문이다. 이성과 냉철함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저희는 비자금 세탁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예들 들면 나이트클럽 수익금이나 큰손들의 자금을 세탁하는 거죠. 한 사람의 명의로 거액을 찾으면 금융기관에서 자금 추적을 할 수 있거든요. 한마디로 세금을 아낀다고 보시면 돼요. 만일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실소유자가 세금을 납부하면 되니까 여사님은 전혀 피해가 없어요. 단지 수고비를 조금 받고 통장을 빌려 줬다고 하면 돼요.”

 어느새 동인에게 배운 멘트에 양념을 더하여 모방하고 있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래! 걸려들었어.’

 여자가 미끼를 물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보통 주부는 현우 말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신도 처음에 그럴듯하여 그들에게 속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여자는 당장 돈을 구하는 것에 온 정신이 팔렸으니 더욱 그렇다.

 “첫날은 3억 5천만 원을 여사님 통장으로 입금시킬 거예요. 그 돈을 현금으로 찾아주시면 끝나요. 수고비는 1억당 50만 원을 드릴게요. 그러니 첫날은 200만 원 정도를 버는 거죠.”

 “정말 그렇게 많이 주신다고요?”

 여자는 일당 50만 원도 감지덕지했는데 200만 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형편으로는 엄청 매력적인 수고비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일은 일주일에 서너 번 있고 여사님께서 잘하면 또 할 수도 있어요.”

 “일이 계속 있다고요?”

 순간 여자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잘만 하면 한 달에 천만 원 이상을 벌 수 있어. 이제부터 행복 시작 고생 끝이야.’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꼭 명심할 것은 외부에 발설하지 말아야 하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셔야 해요. 약속 지킬 수 있죠?”

 "네. 그럴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든가 싶더니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표정에 두려움이 나타났다.

 “저, 혹시 위험한 일은 아닌가요?”

 현우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일은 어렵지 않아서 서로 하려고 해요. 다만 여사님의 사정이 딱하여 도움을 드리려 했는데... 그럼, 없던 일로 하고 다른 분을 쓰죠.”

 “아, 아니에요.”

 역시 흔들리는 심리를 결심하게 만드는 데는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최고다. 여자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일은 언제부터 있나요?”

 “12월 27일예요. 저희는 아무에게나 일을 맡기지 않아요. 여사님께서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요.

 현우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 착수금 결정에도 적잖이 고민을 했었다. 처음에 3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신뢰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동인을 따라 한 면도 있다.

 “50만 원입니다. 이 돈으로 옷 한 벌을 장만하세요. 큰돈을 찾는데 멋지게 꾸미면 보기에도 좋을 거 같네요. 이 돈은 그날 받을 수고비와는 별개예요.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하면 이 돈은 돌려주어야 해요.”

 마지막 말은 그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졌다.

 “아니에요. 그리 힘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할게요.”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밑밥의 효과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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