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수요일)
고려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긴장한 동인이 통장을 꺼내어 겉면을 넘겼다. 그 순간, 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이디는 S428055, 비밀번호는 1218이었다. 그들의 동시에 화이트보드에 적힌 송영수의 주민번호 550824-1842920을 주목했다. 아이디는 주민번호의 앞자리를 뒤에서부터 나열한 숫자였다. 역시 일주일 간격으로 순서를 바꾼 것이었다. 현우의 예측이 정확하게 적중했다. 동인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포기했던 10억 원을 되찾았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동수가 고려에 개인적으로 보냈던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이 통장의 아이디도 마찬가지였다. 월요일은 주민번호의 앞자리를, 화요일은 그 숫자를 뒤에서부터, 수요일은 뒷자리를, 목요일은 그 번호를 반대로, 금요일은 전화번호로 변환했다. 결국 고려는 혼란과 분실을 방지하면서 상대방을 교란하는 고도의 전략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걸로 고려의 정보 파악은 끝났네. 야호! 이제 돈만 챙기면 되겠어.”
동수가 환호하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때 중년 부부가 들어왔다. 남자는 쭈뼛거렸고, 여자가 대화를 주도했다.
“저희는 청소 대행 프랜차이즈에 가입하고 싶은데, 창업 비용이 부족해서 왔어요.”
필요한 대출금은 가맹비, 장비 구입비, 차량 등 3천만 원으로, 무점포로도 가능하다고 했다. 잠자코 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얼마 전까지 자동차 부품업체 공장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납품하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받은 어음들이 휴지 조각이 되었죠. 문제는 그 어음을 제가 이서하여 하청 업체에 준 것이에요. 부도낸 사장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하청 업체들은 저에게 책임을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죽어라 일하며 마련한 집과 차까지 팔아서 빚잔치를 하고 보니 돈이 없네요.”
눈물을 훔친 아내가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용기를 얻은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아직 건강한 팔다리가 있으니 감사하게 생각해요. 아내가 먼저 이 일을 하자고 했죠. 한때 모든 것을 포기했던 저를 묵묵히 지켜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어떤 일이든 가족을 위해 열심히 해야겠어요.”
현우는 주름이 깊게 팬 남자의 마음고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꼭 잡고 나가는 부부의 뒷모습에서 밀레의 ‘만종’ 그림이 떠올랐다.
“가장 골치 아팠던 고려의 아이디도 해결됐고, 대양과 서울은 문제없고, 수일금융은 바지만 구하면 끝이네. 동인아, 그동안 미스터리 해결하느라 모두 고생했는데, 오늘 한잔 어때?”
“그 모두에 동수 형은 빠져야 하지 않나? 은근히 무임승차하고 있네.”
“그래, 알겠어. 자식이 까칠하긴.”
“현수 형도 괜찮죠?”
“나는 힘들 것 같아. 누나가 상의할 일이 있다며 오늘 집에 들르라고 해서.”
동수가 몇 번이나 회유했지만 그의 단호함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사무실을 나섰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웠다. 요즘은 오후 5시가 넘으면 땅거미가 드리운다. 현우는 유턴하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집기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가 있다. 그는 창고에 있던 쇼핑백에서 선불폰 4개와 잠바를 꺼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2개의 폰은 희현, 시영과 통화한 것이고, 다른 폰에는 수혜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나머지 폰은 명의 대여자들과 통화하는 용도다. 희현과 시영과는 이틀에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군들과의 친밀감을 쌓아야만 유사시에 전우애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우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휴대폰과 잠바를 창고에 숨겨두었다. 무례한 동수가 호기심으로 불시에 쇼핑백을 열어볼 수 있어서였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면 여러 개의 휴대폰을 소지한 이유를 대기가 매우 어렵다.
“친구가 집에 두고 간 것을 돌려주려고 갖고 있던 거야.”
하나라면 이 말이 통할 수 있지만, 4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이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냈다. 도수가 없는 두꺼운 밤색 뿔테 안경은 노점상에게 만 원에 구입했다. 안경을 쓰고 거울 앞에 서니 학구파처럼 보였다.
평소 현우는 짧은 머리에 가르마를 타고 무스를 발라 단정한 모습이었다. 귀를 반쯤 덮고 이마까지 내려오는 가발을 썼다. 털모자를 쓴 듯 머리가 따뜻해 좋았지만, 조금 답답한 느낌도 들었다. 거울 속 자기의 외모에 깜짝 놀란 그는 단지 안경과 가발만으로 이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넥타이를 풀고 코트를 벗은 후 잠바를 걸쳤다.
이제 제3의 인물이 완벽하게 탄생했다. 마치 비밀 첩보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을 향해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명의 대여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커피숍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중년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낡은 파카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파마가 풀린 머리와 외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반영했다. 여자는 흰 피부와 뚱뚱한 몸매였다. 머리를 손질하고 옷차림을 잘 갖추면 복부인처럼 보여 큰돈을 찾아도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주민증과 등본을 내놓았다. 등본에는 남편과 두 딸이 등재되어 있었고, 주소도 말소된 적이 없어 신원은 정상으로 보였다. 전입신고 날짜가 10년이 넘었기에 주거가 안정적이라는 의미로, 돈을 가지고 도망칠 가능성은 낮았다. 만약 전입 신고일이 최근이었다면 전출입 사항이 기재된 초본을 요구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명의대여에 대해 아세요?”
“아니요. 저는 고소득을 보장한다기에 나온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하고 싶어요. 사실 요즘 무척 힘들고 급한 사정이 있어서….”
여자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우는 상대방이 이 일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감정의 동요가 선택에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과 냉철함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본격적인 협상에 나섰다.
“저희는 비자금을 세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의 수익금이나 큰손들의 자금을 세탁하는 것이죠. 한 사람의 명의로 거액을 찾으면 금융기관에서 자금 추적을 할 수 있거든요. 쉽게 말해 세금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만일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실소유자가 세금을 납부하면 되니, 아주머니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아요. 단지 수고비를 조금 받고 통장을 빌려주었다고 하면 돼요.”
어느새 동인에게 배운 멘트에 양념을 더하여 모방하고 있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래! 걸려들었어.’
여자가 미끼를 물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일반 주부는 현우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물며 자신도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들려 동인에게 속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여자는 당장 돈을 구하는 것에 온 정신이 팔렸으니 더욱 그렇다.
“첫날에는 3억 5천만 원을 아주머니 통장으로 입금할 거예요. 그 돈을 현금으로 찾으시면 끝납니다. 수고비는 1억당 50만 원을 드릴 테니, 200만 원 정도를 벌게 되는 거죠.”
“정말 그렇게 많이 주신다고요?”
여자는 일당 50만 원도 감사하게 여겼는데, 200만 원이라는 금액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형편으로는 매우 매력적인 수고비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이 일은 일주일에 서너 번 있고, 아주머니가 잘하면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일이 계속 있다고요?”
순간 여자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숫자들을 굴려가며 계산을 마쳤다.
‘잘만 하면 한 달에 천만 원 이상을 벌 수 있어. 이제부터 행복 시작 고생은 끝이야.’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셔야 한다는 점이에요. 약속 지킬 수 있죠?”
“네, 그럴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표정에 두려움이 스쳤다.
“저, 혹시 위험한 일은 아닌가요?”
현우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서로 하려고 해요. 다만 아주머니의 상황이 안타까워서 도움을 드리려 했는데... 그럼,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다른 분을 찾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갈등하는 마음을 확고히 만드는 데는 경쟁이 가장 효과적이다. 여자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일은 언제부터 시작되나요?”
“12월 27일입니다. 저희는 아무에게나 일을 맡기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운이 좋으신 편이에요.”
현우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착수금 결정에도 적잖은 고민을 했었다. 처음에는 30만 원을 생각했다가 50만 원으로 올렸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신뢰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사실 동인의 사례를 참고한 면도 있다.
“50만 원입니다. 이 돈으로 옷 한 벌을 마련하세요. 큰돈을 찾는 데 멋지게 차려입으면 좋을 것 같네요. 이 돈은 그날 받을 수고비와는 별개입니다. 만약 사정이 어려워져 일을 못 하게 되면 이 돈은 돌려주셔야 합니다.”
마지막 말은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던진 것이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 것 같으니 할게요.”
역시나, 밑밥의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