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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에서 사랑으로 - 2

by 이인철

12월 19일 (수요일)


“제가 해야 할 일이 뭔가요?”

“통장이 몇 개 있으세요?”

“서너 개 있어요.”

“그중 3개는 사용할 수 있죠?”

“네. 가능해요.”

현우가 통장 개수를 묻는 이유가 있다.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명의 대여자의 기존 통장 3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택에 있어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신규 통장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기존 통장을 이용하는 것이 은행의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 치밀한 동인은 이 점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저희가 그 통장으로 입금할 테니 수고비를 제하고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만나서 각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이제 여자는 수고비를 떼일 걱정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할 것이다. 또한, 형식적으로 각서를 받아야 음흉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각서는 잔고 업체의 것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여자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제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도 하면 안 될까요? 저보다 똑똑해서 이런 일을 잘할 거예요. 친구도 많이 힘들어해서 함께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현우는 이를 거절할 까닭이 전혀 없다. 돈봉투를 손에 쥔 여자는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커피숍을 나섰다.

“휴우.”

그는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혔다. 어렵게 여겼던 포섭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나의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7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올랐을까?

아마도 그건 거짓말쟁이로서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커피숍에서 사무실까지는 버스로 무려 열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였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난 것은 혹시라도 부근에서 마주칠 수 있어서였다.

어느 음반 가게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보니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았다. 오늘부터 하루하루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공사장 옆의 빈터에 놓인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 안에서 다정하게 술을 마시는 연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허기를 느낀 그는 우동과 소주를 주문했다. 첫 잔을 마신 후에는 내일의 계획을 세웠고, 두 번째 잔을 들이킨 뒤에는 모레의 일정을 고민했다. 셋째 잔을 비우고 나서는글피에 할 일을 점검했다. 마지막 잔 속에는 고독한 사슴의 눈동자를 닮은 수혜의 눈망울이 담겨 있었다.

현우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앞산의 등선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이 연상되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서 어딘지 모를 처연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제 그녀와의 만남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수혜 씨, 강 실장입니다.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전히 다소곳한 목소리였다.

흰색 반코트에 분홍색 털목도리를 두른 그녀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마치 백설 공주 같았다.

“마지막 타임 원생의 어머니를 기다리다 늦어졌어요. 저 때문에 수고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수고는요.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그는 받은 서류를 훑어보는 척했다.

“식사하셨어요?”

“집에 가서 엄마와 동생과 먹으면 돼요.”

커피숍의 벽시계는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수혜가 계산하려는 순간, 그는 재빠르게 돈을 냈다.

“저한테 차 한 잔 빚진 거 잊지 마세요.”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현우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이 저쪽이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사랑은 마음의 나침반이라서 한 곳만 가리키거든요."

"네?"

"수혜 씨가 언제 등장할지 눈이 빠지게 기다렸죠. 1박 2일 동안 그렇게 바라보았는데, 그쪽에서 선녀가 오고 있었어요. 제가 집까지 보디가드를 해드릴게요. 만약 저의 호의를 거절하신다면 대출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그는 이 멘트를 날리기 위해 여러 번 연습했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려니 몸이 오글거렸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뻔히 사탕발림인 줄 알면서도 치켜세우면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수혜 씨,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요?”

“네?”

현우는 곧바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한 할머니가 생애 마지막 날이 다가오자 조용히 남편을 부르더니, ‘영감, 내가 죽기 전에 고백할 게 있어요’라고 했대요. 그리고 콩 세 알과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놓았대요. 할아버지가 그 콩이 뭐냐고 묻자, '그동안 당신 몰래 바람을 피울 때마다 하나씩 모은 거예요.'라는 대답에, 할아버지가 '인생을 살다 보면 세 번 정도야 실수할 수 있지. 괜찮아’라고 하며 만 원짜리는 뭐냐고 물었대. 그러자 할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모은 콩을 팔아서 번 돈이에요.”

수혜는 두 뺨이 붉어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만개한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 미리 유머를 외웠다.

“실장님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아세요? 겉보기에는 그런 분 같지 않은데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1,000개나 알고 있어요. 수혜 씨를 만날 때마다 하나씩 해드릴게요.”

“정말요?”

은연중 경계하던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사기꾼과 피아노 교사.’

누가 봐도 어색한 조합이다. 그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을 꾼다고 상상해 봐. 고단한 삶 속에서 꿈은 잠시라도 행복을 느끼게 해주니까.’

현우는 이 말을 곱씹으며 잠들곤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 되고 운명이 될 수 있다.

지금이 기회다 싶은 현우는 재빨리 입을 놀렸다.

“하나 더 이야기해 줄게요. 어떤 남자가 완전히 벗은 채로 잠을 자다가 급한 전화를 받고는 급히 뛰쳐나가 택시를 탔대요. 근데 그 택시의 기사가 여자였대요. 기사가 운전하면서 남자의 몸을 자꾸 훑어보며 히죽히죽 웃는 거예요. 남자가 참다못해 ‘너 남자를 처음 봤냐? 미친년, 차나 잘 몰아!’라고 했더니,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인마! 너 택시 요금을 어디서 꺼낼까 궁금해서 쳐다봤어. 왜?”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보조개가 싱그러웠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어요. 오면서 재밌는 얘기를 해 주셔서 즐거웠어요.”

“수혜 씨, 파란 장미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나중에 한 번 찾아보세요.”

현우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꽃말은 ‘기적’, ‘불가능은 없다’라는 의미였다.

‘하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지.’

그 또한 수혜와의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술을 한 병 더 주문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인장은 자신의 애창곡인지 볼륨을 높였다. 그 노래는 나훈아의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라는 곡이었다. 가사 구절마다 수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가슴이 저려왔다. 이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온몸을 태울 정도로 뜨거웠다.

현우는 ‘인연이라는 만남’에서 수혜를 떠올렸고, ‘숙명이라는 이별’에서 희현과 시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빠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 같아요”라고 했던 희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그 말을 수혜에게 속삭이고 있어서였다.

‘그리움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는 사랑아!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나요?’

그는 비틀거리며 포장마차를 나왔다.

'수혜의 개인 사정이란 무엇일까?'

현우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 오늘 받은 서류를 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사랑의 1일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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