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철 Aug 29. 2024

아군에서 사랑으로 - 2

 12월 19일 (수)


 “제가 할 일은 뭔가요?”

 “혹시 사용하는 통장이 몇 개 있어요?”

 “서너 개요.”

 “3개는 되지요?”

 “네.”

 현우가 통장 개수를 물어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작업을 하려면 명의대여자의 기존 통장 3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에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신규 통장을 이용해도 되지만 기존 통장을 쓰는 것이 은행의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치밀한 동인도 이 점에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저희가 그 통장으로 입금할 테니 수고비를 제하고 주면 됩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서 각서를 써야 하고요. 일요일 내로 연락드리죠.”

 이제 여자는 수고비를 떼일 염려가 없다며 안심할 것이다. 또 형식적으로 각서를 받아야 음흉한 생각을 못 한다. 이 각서는 잔고업체 것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여자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제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도 하면 안 될까요? 저보다 똑똑해서 이런 일을 잘할 거예요. 친구도 많이 힘들어서 함께 하면 보탬이 될 것 같아요.”

 현우는 마다할 까닭이 전혀 없다. 이거야 일석이조가 아닌가! 돈 봉투를 손에 쥔 여자는 희망찬 얼굴로 커피숍을 나갔다.

 “휴우.”

 그는 조마조마했던 호흡을 편안히 내쉬었다. 어렵게 여기던 포섭 작업을 멋지게 성공했다.

 ‘하나의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7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올랐을까?

 아마도 그건 거짓말쟁이로서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커피숍에서 사무실까지는 버스로 무려 열 정거장 거리였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에서 만났다. 혹시나 부근에서 마주칠 수도 있어서다. 

 어느 음반 가게에서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 보니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았다. 오늘부터 하루하루가 카운트다운이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공사장 빈 공터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천막 안에서 다정하게 술을 마시는 연인의 실루엣이 비쳤다. 

 허기를 느낀 그는 우동과 소주를 시켰다. 첫 잔을 마시고는 내일 할 일을 계획했다. 둘째 잔을 들이켜고는 모레 할 일을 세웠다. 셋째 잔을 털어 넣고는 글피에 할 일을 검토했다. 마지막 잔 속에는 고독한 사슴의 눈동자를 닮은 수혜의 눈망울이 담겨 있었다. 

 현우는 처음 그녀를 본 순간 앞산 등선에 걸려 있는 보름달을 연상했다. 살포시 웃는 미소에서 어딘지 모를 처연함을 보았다. 그리고 어제 그녀를 만났던 기억을 아스라이 떠올렸다.

 

 “수혜 씨, 박 실장입니다.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전히 다소곳한 목소리다. 

 흰색 반코트에 분홍색 털목도리를 목에 감고 커피숍에 들어서는 그녀는 백설공주였다.

 “마지막 타임 원생의 어머니를 기다리다 오는 바람에… 일부러 저 때문에 수고하시는데 죄송해요. 늦은 벌로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수고는 뭘요. 어차피 지나는 길이었어요.”

 그는 받은 서류를 훑어보는 척했다.

 “식사하셨어요?”

 “집에 가서 엄마랑 동생하고 먹으면 돼요.”     

 커피숍 벽시계는 7시를 지나고 있었다. 계산을 하려던 수혜에 앞서 그가 잽싸게 돈을 냈다.

 “저한테 차 한 잔 빚진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현우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이 저쪽 방향이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수혜 씨가 언제 등장하나 눈 빠지게 바라보았죠. 1박 2일 동안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쪽에서 선녀가 오고 있었어요. 집까지 제가 백기사가 되어 보디가드를 해드리지요. 만약 저의 호의를 거절하시면 대출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그는 이 멘트를 날리기 위해 몇 번이나 연습했다. 안 하던 행동을 하려니 몸이 오글거렸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고 하지 않는가!’

 뻔히 사탕발림인 줄 알면서도 치켜세우면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수혜 씨, 재밌는 얘기를 해 드릴까요?”

 “네?”

 현우는 바로 말을 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가 조용히 남편을 불렀대요. 그리고는 ‘영감, 내가 죽기 전에 고백할 게 있어요’라고 했대요. 그러면서 콩 세 알과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놓았대요. 할아버지가 이 콩이 뭐냐고 묻자, 그동안 당신 모르게 바람피울 때마다 하나씩 모은 거라고 했대요. 할아버지가 ‘한평생 살다 보면 세 번 정도야 실수할 수 있지. 괜찮아’라고 말하며 만 원짜리는 뭐냐고 물었대요. 근데 할머니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모은 콩을 판 돈이에요.”

 수혜는 두 뺨에 홍조를 띠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활짝 핀 꽃잎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그녀의 호감을 사려 미리 유머를 외웠다.

 “실장님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겉으로 봐서는 안 그럴 분 같거든요.”

 “저는 이런 야그를 1,000개나 알아요. 수혜 씨를 만날 때마다 해 드릴게요.”

 “정말요?”

 은연중 경계하던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사기꾼과 피아노 교사.’ 

 누가 봐도 어색한 조합이다. 그도 한때 인정했다.

 ‘꿈을 꾼다고 상상해. 고단한 삶에서 꿈은 잠깐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해 주니까.’

 현우는 이 말을 곱씹으며 잠들곤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 되고 운명이 될 수 있다.

 지금이 기회다 싶은 현우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하나 해 드릴게요. 어떤 남자가 홀딱 벗은 채로 잠을 자다가 급한 전화를 받고 그냥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대요. 타고 보니 여자 기사였대요. 그런데 기사가 운전하면서 남자의 위아래를 자꾸 훑어보며 히죽히죽 웃는 거예요. 참다못한 그가 ‘너 남자를 첨 봤냐? 미친년. 차나 잘 몰아!’라고 하자 여자가 뭐랬는지 아세요?”

 “글쎄요?”

 “인마! 너 이따가 택시 요금을 어디서 꺼낼까 궁금해서 쳐다봤다. 왜?”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보조개가 싱그러웠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어요. 오면서 재밌는 얘기를 해 주셔서 즐거웠어요.”

 “수혜 씨, 파란 장미 꽃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현우가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었다. 그 꽃말은 ‘기적’, ‘불가능은 없다’이다.

 ‘하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지.’

 그 또한 수혜와의 인연을 필연으로 엮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술을 한 병 더 주문할까 갈등하고 있을 때,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인장은 자기의 애창곡인지 볼륨을 높였다. 그 노래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나훈아의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란 곡이었다. 가사 구절마다 수혜와 연관되었다. 그녀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가슴이 저려 왔다. 이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온몸을 산화시킬 정도로 뜨거웠다.

 현우는 ‘인연이라는 만남’에서 수혜를 떠올렸고 ‘숙명이라는 이별’에서 희현과 시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빠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 같아요”라던 희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그 말을 수혜에게 속삭이고 있어서다.

 ‘그리움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는 사랑아!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얻을 수 있나요.’

 그는 비틀거리며 포장마차를 나왔다.

 "수혜의 개인 사정이란 무엇일까?"

 현우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 어제 받은 서류를 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사랑의 디데이가 시작될 것이다.

이전 28화 아군에서 사랑으로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