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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7. 2024

아군을 모집하다

 12월 18일 (화)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사무실에서 받을 3개의 봉투와 개인으로 보낸 3개의 봉투를 밖에서 가지고 와야 해서다. 벌써 동수는 봉투 수령을 하려고 허위 장소로 출발했다. 한 사무실에서 전부 받으면 도착 지가 같아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먼저 온 서울금융 봉투를 뜯었다. 역시나 비번은 0248에 입금 은행도 C은행이다. 

 다음은 대양의 봉투였다. 통장을 꺼내는 동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통장은 W은행으로 5억이 찍혔고 잔액은 0원이었다. 수수료만도 무려 150만 원이다. W은행은 처음 보냈을 때의 은행이다. 다섯 번째 만에 같은 은행이 겹쳤다. 그러나 아직 W은행이 주거래 은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잠시 후 동수가 갖고 올 통장을 보면 윤곽이 잡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금융 봉투가 도착했다. 아이디 K560302, 비번은 1217이었다. 문제는 아이디이다. 어제 의뢰한 김두영의 주민번호는 560302-1324530, 휴대폰 번호는 010-9808-3503이다. 아이디는 주민번호 앞자리를 순서대로 썼다. 이로써 고려의 다섯 개 아이디는 모두 불규칙하다. 이러면 디데이에 각기 다른 아이디로 다섯 번을 넣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것도 단언할 수 없다. 여섯 번째는 어떤 아이디가 내려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우는 머리가 띵했다. 동인도 어이가 없는지 연신 담배를 내뿜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수 형, 고려 작업은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때요? 아무래도 수수료만 낭비하는 꼴이네요.”

 현우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수가 봉투 3개를 갖고 들어왔다. 동인이 급히 대양의 봉투를 낚아챘다. 그들의 온 신경은 입금 은행에 쏠렸다. 통장은 W은행이었다.

 “대양은 이제 됐어요. 주거래 은행이 W은행인 게 확실해요.”

 동인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이어 부연 설명이 따라왔다.

 “개인이 의뢰한 경우는 업자보다 안전하다고 여겨 작은 잔고증명이라도 주거래 은행으로 입금한 거지요. 업자 것은 고액일 때만 그 은행으로 실적을 쌓아 준 거예요. 대양 나름대로 규칙을 정해 은행을 돌린 거죠. 결국 현수 형의 논리가 맞았어요.”

 그는 현우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서울금융 봉투를 뜯었다. 통장은 C은행이고 비번도 0248이다. 순간 서로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어 고려의 봉투를 열었다. 통장을 쥔 동인의 손에 힘이 없다. 아이디는 P601210, 비번은 1217이었다. P601210은 성 PARK에서 P와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이다. 사무실에서 보낸 것과 똑같은 구조로 아이디를 만들었다. 이로써 동일한 규칙은 하나도 없다. 

 동인은 속내를 감추려 했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마음은 당연하다. 지금껏 들어간 수수료가 얼마이며, 무엇보다 10억의 거금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냉기가 감돌았다. 현우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고려에다 한 번만 더 보내면 안 될까? 사무실과 개인으로 하나씩.”

 “형, 가능하겠어요?”

 “장담은 못 하지만 내일 오는 아이디를 보고 진행 여부를 판단하면 해서.”

 “음… 그럼 그렇게 하지요.”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동인이 순순히 나왔다. 그만큼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현우가 이렇게 제의한 데는 나름 추론이 있어서다. 고려가 비번을 날짜에 맞춘 듯 아이디도 일주일 간격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껏 아이디가 다섯 번 바뀌었다. 그러면 내일은 일주일 전에 사용한 앞자리 주민번호를 거꾸로 나열한 아이디가 다시 내려올 확률이 높다. 그래야만 그들도 기억이 안 나거나 헷갈릴 때를 대비할 수 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섰지만 말을 삼켰다. 

 처음에는 경험자인 동인에게 선의의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에게서 감정의 역전현상이 나타나서다. 

 대양 작업은 하루 이틀 쉬었다 고액의 잔고증명을 의뢰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서울금융도 재확인 차 하나만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설령 고려, 대양, 서울의 정보를 완전히 파악했더라도 디데이를 앞당길 수는 없다. 아직 수일금융 작업에 필요한 바지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후 상담은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중년 남자와 그의 친구였다. 남자는 유난히 말의 악센트가 강해 기억하기쉬웠다. 서류를 건넨 그는 곁의 친구에게 빨리 꺼내라며 옆구리를 툭툭 쳤다. 현우는 이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대화로 미루어 친구인데 주종관계로 보여서다. 남자는 회사 사주의 갑질 횡포와 노사 문제를 들먹였다. 또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않고는 복지국가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현우는 그의 현실적인 안목과 비판에 마치 유명 연사의 강의를 듣는 듯했다.

 “요즘은 사납금 채우기도 버거워요. 중·고등학생인 두 아이 뒷바라지에 등이 휠 정도지요.”

 자기의 수입으로는 가족의 생계만 겨우 책임질 뿐 아내가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식당을 나간다고 했다.

 “회사 택시를 몰아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요. 근데 다행히 개인택시를 인수할 기회가 생겼지요. 친지들에게 손을 벌리고서도 번호판값에서 4천만 원이 부족하여 대출을 받으러 왔어요.”

 남자는 이제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또 자기처럼 밑바닥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도 운전을 하는데 비슷한 처지로서 함께 대출을 받으러 왔다고 덧붙였다.  

 처음에 현우는 남자가 친구를 무시하는 것 같아 안 좋게 보았다. 그런데 서로 대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우정이 깊은 듯했다

 “뭐 해? 어서 은행에 갔다 와야지.”

 벌떡 일어난 남자가 친구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문으로 향했다. 친구는 사형장의 죄수처럼 질질 끌려 나가더니 어느새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현우는 적과 동침하고 있는 자신과 두 사람을 비교하고는 부러움을 느꼈다.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했다고요?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지요. 1번 출구 쪽으로 나오면 커피숍이 있어요. 거기서 보죠.”

 동인은 몇 가지 서류를 가방에 넣고는 부리나케 나갔다. 

 현우는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가 많이 오는 것에 내심 놀랐다. 오히려 동인이 그들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데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서 현우도 모집에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는 옷걸이에 걸린 어깨걸이 가방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저 안의 휴대폰에 자기 광고를 본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다. 궁금증이 폭발 직전이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현장을 들켜서는 절대 안 된다. 한순간 억제하지 못한 감정으로 지금껏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아니, 자신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돌아온 동인은 돈을 인출할 여자가 믿음이 안 간다며 투덜댔다. 현우는 그의 불평을 들으며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더구나 그는 명의대여자와 대면이나 대화한 적이 없다. 잘못하면 불상사가 발생할 여지도 있다. 침착하고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대방이 여자라는 것과 본인의 명의를 빌려줄 만큼 생활이 궁핍한 약자라는 거다.     

 

 현우는 퇴근하면서 그들이 길 건너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의 잠금장치를 누르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인터넷 바둑게임 사이트에 접속해 어느 대국 장면에 고정시켰다. 혹시 그들이 사무실로 되돌아왔을 때 문이 잠긴 상태에서 현우가 있다면 수상하게 여길 수 있다. 분명 눈치 빠른 동인에게 의심의 빌미를 줄 것이다. 사무실에 작업에 필요한 모든 서류와 정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실수가 나중에 무서운 후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그 후폭풍이란 작업에 작업을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을.

 "너희와 헤어지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 이 부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아서 바둑을 관전하며 기다리던 중이야."

 이렇게 둘러대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다섯 번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심호흡을 길게 내뱉고 첫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다.

 “명의대여자 광고 보고 전화하신 분이세요?”

 “네. 근데 명의대여자가 뭐예요?”

 “그건 저희 회사가 사정이 있어 전화 거신 분 명의의 통장을 잠깐 이용하는 거죠.”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듯싶네요.”

 “하나만 더요. 광고에 고수익 보장이라고 적혀 있던데 얼마나 주는데요?”

 순간 현우는 금액에 대해 고심했다. 만약 상대방이 경찰의 함정 수사라면 제시하는 금액이 터무니없이 높을 경우 의심하여 내사할 수 있다. 일반인이라도 너무 크면 불법이나 위험한 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작으면 흥미를 못 느낀다. 적당히 말해야 한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하루 50만 원 정도요. 물론 수고비는 당일 현찰로 지급되지요. 또 일은 꾸준히 있고요.”

 사실 그는 최고 100만 원과 최저 30만 원 사이에서 갈등했다. 100만 원은 고액이고 30만 원은 조금 부족한 듯했다. 그래서 50만 원을 적정가로 보았고 일이 계속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상대방은 며칠만 일해도 몇백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찰 것이다. 역시나 예상이 적중했다. 그녀는 진짜냐고 거듭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제가 낮에는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힘드네요. 저녁이나 주말은 어떤가요?”

 “저는 언제든지 괜찮아요. 꼭 연락 주세요.”

 일부러 현우는 돈 찾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고는 지갑 속에 넣었다. 휴대폰에 저장해도 되지만 분실을 대비하기 위한 이중 장치였다.

 두 번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다가 소리샘 멘트가 나왔다. 사정은 모르나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 번호를 삭제했다. 나머지 여자들은 현우가 제시한 호조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그는 4명의 예비 명의대여자를 확보했다. 최종 선택은 미팅 후 결정하겠지만.     


 현우는 명함을 찍기 위해 서둘러 을지로로 향했다. 굳이 명함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둘째, 작업이 끝난 후 이 여자들은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다. 그때 이들에게 준 명함이 경찰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상담했던 손님들과 다른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힌 두 개의 명함이 나온다. 게다가 곳에서의 용의자 인상착의가 전혀 다른 인물이 나타난다. 계획은 이미 세워났다. 경찰은 혼란에 빠지속에 동인과 동수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모두는 제3의 범인이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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