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토)
그때, 휴대폰을 가지고 온 퀵서비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우는 5번 출구에서 오토바이를 탄 퀵을 즉시 알아보았다. 작은 박스를 열어 휴대폰과 메모지를 확인한 후, 돈을 건넸다. 메모지에는 휴대폰 번호, 명의자의 이름, 주민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문할 때 명의자의 인적 사항이 없으면 물건값을 지급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는 지역 정보지 담당자에게 방금 받은 선불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이 번호는 명의대여자 광고에 실릴 예정이다. 이어 이동통신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전원이 꺼져도 수신 번호가 자동으로 저장되는 부가서비스를 신청하고 싶습니다.”
콜센터 상담원은 명의자 본인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번호와 이름, 주민번호를 물었다. 이 신청을 하려고 판매업체에 인적 사항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명의대여자 광고로 오는 전화는 이 폰에 저장될 것이다. 현우는 오늘 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마치 전장에서 고지의 8부 능선까지 점령한 군인처럼 느껴졌다.
‘이쯤 되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건가?’
그는 자신에게 물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세상은 누가 누굴 키워 주는 법은 없어. 스스로 커야 하는 거지.”
배가 고파졌다. 시간이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밖에 나가기가 귀찮아 도시락을 주문했다. 찰기가 잃은 밥알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밥알을 주우려다 캘린더 메모지에 적힌 '최수혜'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수화기를 들었다.
“최수혜 씨죠? 어제 대출 문제로 저의 사무실에 전화하셨죠? 통화한 강 실장입니다. 오늘 제가 근무 중이라 연락드린 겁니다. 평일에는 시간이 힘들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현우의 말투에는 상대방을 배려해 일부러 연락했으니 그 고마움을 알아달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사무실 위치를 물어보더니 곧 출발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구두 소리가 복도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똑,똑,똑!’
규칙적인 간격으로 적당한 크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깨 아래로 늘어진 생머리에 흰색 반코트를 입은 그녀가 들어왔다. 현우는 얼른 커피를 타서 내주었다. 엷은 쌍꺼풀과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는 청순하고 가련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느다란 눈썹은 초생달을 연상시켰고, 살짝 파인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순간 그는 심장이 두근거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오뚝한 자세로 현우를 바라보는 모습이 꽤 진지해 보였다.
“담배를 좀 피워도 될까요?”
긴장을 풀기에는 담배만 한 것이 없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피우세요.”
“서류는 준비하셨나요?”
“등본은 예전에 발급받은 것이 있어서 가져왔는데, 인감증명서는 주민센터가 휴무라서 못 떼왔어요. 화요일까지 드리면 안 될까요?”
등본에는 어머니와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등재되어 있었다.
“원하시는 대출액은 얼마인가요?”
“3천만 원을 받고 싶어요.”
“거래하는 은행에 문의해 보니 두세 곳에서 가능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작고 얇은 입술이 가냘프게 떨렸다.
“대출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갚으실 계획인가요? 저희도 책임이 있어서….”
어느새 동수의 멘트를 따라하고 있었다. 이 의도적인 질문은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였다.
“저는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근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종일 레슨하는 게 힘들어요. 그러다 마침 제가 원하던 피아노 교습소가 나왔는데, 돈이 부족해 대출을 받으려고 해요. 다행히 동네 학부모님들을 많이 알아서 원생 모집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요.”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불안감이 그녀의 표정에 스쳤다.
“개인적인 사정이란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꼭 말해야 하나요? 대출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 아니에요. 말씀하시기 어려우시면 괜찮습니다.”
현우는 손사래를 치며 머쓱해졌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분명 과한 행동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대출 이자와 상환 방법에 대해 세심하게 물었다. 현우는 급히 둘러대느라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세 개의 은행 이름을 언급했을 때,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중 한 곳은 힘들 것 같아요. 전에 그 은행에서 대출 보증을 선 적이 있는데, 다 갚지 못했거든요.”
“그럼 다른 은행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는 하셨나요?”
“네?”
현우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식사라는 핑계를 대며 그녀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커피 잘 마셨습니다.”
“수혜 씨! 다음 주에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라일락 향기도 함께 사라졌다. 오직 탁자에 놓인 분홍색 립스틱 자국 종이컵만이 그녀의 흔적을 남겼다. 오직 탁자 위에 남은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그녀의 흔적을 남겼다. 현우는 여분의 선불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며 자신의 통찰력에 감격했다. 그녀의 주민등록등본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최수혜는 이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상담한 적이 없는 인물로, 오로지 현우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수혜! 그녀는 나의 영원한 아군이 될 거야.”
이때만도 현우는 그녀와의 인연이 운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2월 16일 (일)
“희현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직 가게에 나가려면 시간이 좀 남았죠? 오늘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요.”
그는 통화 후 다른 선불폰을 집어들었다.
“시영 씨, 나 수현 오빠야. 컨디션은 괜찮아? 어제 인사도 못 하고 나와서 미안해. 조만간 밥 살게.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해.”
현우는 이제부터 아군이 필요했다. 이 작업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희현, 시영, 수혜는 아군으로서 확고한 협력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작업이 끝난 후에도 자신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해야 한다. 수혜와의 통화 기록은 사무실 유선전화에 단 두 번만 남아 있다.
하루 평균 30건 이상의 상담 전화가 걸려 온다. 이렇게 되면 디데이까지 약 500통의 전화번호가 쌓이게 된다. 수사기관은 모든 통화 내역을 조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 일이 식은 죽 먹기와 같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천 대의 차량과 수만 명의 지문을 조회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며 사명이다. 물론 나름의 수사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또한 500여 건의 통화 중 여러 번 통화한 사람을 의심하여 그 번호를 선별해 단서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두 번 통화한 번호는 단순한 상담 전화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손님이 처음 전화를 걸고 현우가 예상 대출 금액을 알려주기 위해 다시 연락했기에 두 번의 통화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혜도 포함된다.
만약 경찰이 수혜를 조사하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녀는 현우에 대한 정보가 없고, 선불폰으로 통화해서였다. 이 작업이 끝나면 어차피 그녀들과의 연락이 끊길 것이다. 단지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은, 그녀들에게 첫인상 그대로 남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작업에 이용하려는 그녀들 중 수혜가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그는 동인과 싸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수가 고수를, 초짜가 달인을, 아마추어가 프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월요일부터 적과 동침하면서 전투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과 희현, 시영, 수혜. 상대는 동인, 동수, 그리고 사채 사무실 네 곳이다. 4대 6의 혈투가 시작된다. 아니, 4대 7이다. 하나는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그의 아군은 모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연약한 여자들이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현우는 심사숙고하고 작전을 세워야 한다.
이제 디데이가 11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물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에게 생명수가 아닌 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