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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6. 2024

적과의 동침

 12월 17일 (월)


 현우는 1시간 정도 늦게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이미 동수에게 전화하여 그 사유를 말했기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동수야, 토요일에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술집에서 나올 때 분명히 있었는데 그 후로는 기억이 없네.”

 “무슨 폰이에요?”

 동인의 이 물음은 실명폰인지 명함의 대포폰인지를 말한다.

 “응, 내 폰.”

 “휴우.”

 동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에 현우는 어이가 없어 괘씸했다.

 “그 폰에 전화는 걸어 봤어?”

 “전원이 꺼져 있는 걸로 나오더라고. 아마도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아. 동수야, 네 폰 좀 줘 봐. 내 바뀐 번호를 찍어 줄게.”

 현우는 이런 작업이 처음이다 보니 침이 힘겹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현수 형, 왜 번호까지 바꿨어요? 지인들에게 다시 알리려면 힘들 텐데요.”

 ‘구미호 같은 놈.’

 동지에서 적으로 바뀐 후부터 현우는 그의 호의가 가식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리라.

 “저번 번호는 맘에 안 들고 스팸이 엄청와서 이 기회에 바꾼 거야.”

 그는 동수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기 번호를 잽싸게 지우고 새로운 대포폰 번호를 입력했다. 이어 동인의 폰에도 똑같이 했다. 그리고 능청을 떨었다.

 “동수야, 전에 내 폰 번호 기억하니? 나도 막상 내 번호는 기억이 안 나더라고.”

 “야! 그걸 어떻게 아냐? 나도 내 번호를 모르는데 네 것까지 암기하냐? 다 이름으로 걸지.”

 동수는 뻔한 걸 왜 묻냐는 투다.

 “동인아, 너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스치듯이 물었다. 순간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앞자리는 알겠는데… 뒤 번호는 모르겠네요.”

 이로써 절반 남았던 자기 실명폰 번호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두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완벽하게 끊어졌다.  

 만일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긴다 해도 현우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번 주부터는 상담을 오후로 미루었다. 오전에는 잔고업체에서 내려온 암호를 파악하는 작업에 주력하기로 했다.

 서울금융 봉투가 도착하였다. 비번은 저번과 같은 0248이었다.

 “야호!”

 동수는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번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입금 은행도 마찬가지로 C은행이다. 그러면 서울금융의 주거래 은행은 C은행으로 봐도 무난하다. 수표로 입금하기에 동일 비번과 같은 은행을 해도 완전무결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업자가 보낸 잔고증명에 비번과 입금 은행을 바꾸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으로 의뢰해도 똑같을 확률이 높다.

 “서울금융의 정보 파악은 다 끝난 거네.”

 “아니야, 그래도 개인으로 한두 번 더 보내 봐야지. 업자에게 받는 것과 다를 수 있잖아.”

 낙천적인 동수와 달리 동인은 신중하게 반응했다.

 

 다음으로 대양금융 봉투가 왔다. 비번은 예상대로 0514였다. 그런데 입금 은행은 처음 보는 H은행이다. 근방에 있는 W, K, J, H 은행을 한 번씩 돌아가며 입금한 것이다.

 “벌써 우리 작업을 훤히 꿰뚫은 게 아닐까? 마치 갖고 놀면서 꼬박꼬박 수수료를 챙기는 것 같아. 대양은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냐?”

 동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야.”

 동인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동인아, 저번에 네가 잔고업체마다 주거래 은행이 있다고 했지? 그래야 VIP 대접을 받아서 일처리가 편하다고. 아이디나 비번을 어떤 규칙에 근거해 만들듯이 주거래 은행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가령 고액의 잔고증명이나 업자보다 안전한 개인의 의뢰는 주거래 은행으로 몰 수도 있잖아. 어차피 그 은행에 실적을 쌓아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으니까.”

 “맞아! 그럼 이번에 고액과 개인으로 보내면 답이 나오겠네. 야~ 현수 너 대단하다! 이제 박사가 다 됐네. 동인아, 현수 말대로 그렇게 한번 해보자.”

 “그럴 수도 있겠네. 오늘 양쪽으로 보내볼게.”

 기뻐할 줄 알았던 동인이 시큰둥하게 나왔다. 미처 자기가 캐치 못 한 것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벌레 씹은 표정이 그것을 나타냈다. 현우는 앞으로 그가 먼저 의견을 구하기 전에는 나서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퀵이 고려금융 봉투를 놓고 갔다. 아이디는 S946543으로 주민번호에서 찾을 수 없는 숫자였다. 동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금요일에 보낸 의뢰인의 이름은 신성모로 주민번호가 552401-1662810이었다. S는 알고 있는 성 SHIN의 첫 알파벳이다. 처음에 그들은 당황했으나 간단히 풀었다. 그것은 신성모의 휴대폰 번호 010-9465-4331에서 9로 시작하여 여섯 자리까지 숫자였다.

 물론 이 폰은 사무실에 있는 선불폰이다.

 “와~ 미치겠네. 올 때마다 아이디가 바뀌니 이거 종잡을 수가 없잖아.”

 동수가 신경질적으로 소파를 걷어찼다.

 “현수 형, 이제 형이 좀 고생해야겠네요.”

 “뭘?”

 현우는 알면서 시침을 뗐다. 고려금융에 개인으로 의뢰하는 양 전화하라는 뜻이다. 동인의 목소리는 그쪽과 자주 통화를 했기에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예행연습을 한 현우가 헛기침을 하고는 선불폰을 들었다.

 “잔고증명 광고를 보고 전화하는 건데요? 아파트 새시 공사 입찰에 들어가려는데 1억 5천만 원의 잔고증명이 필요해서요. 모레까지 입찰 서류를 넣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가 공사 관계로 현장에 있어서 사무실을 방문하기가 어렵네요. 준비 서류와 수수료를 보내면 안 될까요? 잔고증명 확인서는 내일 오전 중으로 도착 부탁드릴게요. 또 그 잔고 통장을 계속 쓸 거니까 비밀번호도 알려 주시고요.”

 같은 내용의 통화를 대양과 서울금융에도 했다. 그들은 사무실과 개인으로 보낼 6부의 서류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잔고증명은 평소보다 높은 5억으로 했다. 동인의 이유인즉, 어차피 이 금액으로 작업할 거라 수수료는 아깝지만 디데이에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수 형, 이 봉투를 사용하면 어떡해! 이 봉투는 사무실에서 보냈던 것과 같은데 또 개인에 쓰면 자폭하자는 거야? 빨리 문구점 가서 다른 봉투를 사 와!”

 동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그의 치밀함에 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전의 작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삐리릭 삐리릭.’

 동인이 낸 명의대여자 광고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그는 서둘러 나갔다. 밖에서 돌아온 동수가 짜증 난 얼굴로 봉투를 책상 위로 팽개쳤다. 현우는 그의 기분을 달래려 커피를 타서 건넸다.

 오늘 오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혼란하게 지나갔다. 어느새 동수는 포커게임에 빠져 탄성을 질렀다. 현우는 그의 단순함이 부러웠다.

 

 금요일에 전화한 손님이 방문했다.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3천만 원이 꼭 필요하다며 사정했다. 그녀의 간곡함에 현우가 그 이유를 물었다.

 “제 딸은 중학교 3학년인데 학교에 갈 수가 없어 집에서 인터넷으로 학습하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친구들과 함께 졸업을 하려고요.”

 “왜 학교를 못 나가나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았던 딸이 무릎 통증을 호소한 것은 1년 전이었어요. 하지만 병원비가 없어서 계속 미루기만 했지요. 그러다 걸음걸이가 불편해서야 병원에 데려갔어요.”

 병명은 ‘만성 신부전증’이라고 했다. 체내 독소를 걸러 주어야 할 신장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서 독소가 다리를 침범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제때에 병원만 찾았어도…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정말 잘 키우려 했는데….”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10년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단다. 그녀는 약해질 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양품점을 하며 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새벽 장을 보며 악착같이 일해서 가게가 딸린 조그만 집도 장만했으나 어느 날부터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갈수록 생활비조차 벌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요. 그래서 여기저기 돈을 끌어와 물건을 들이고 홍보도 했지만 빚만 늘어났어요.”

 은행 대출과 사채 이자가 불어나는 바람에 평생을 바쳐 마련한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새 출발을 꿈꿀 무렵 딸이 자리에 누웠다고 한다.

 “병원을 오가느라 가게 닫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그나마 있던 손님도 뚝 끊기더군요. 다행히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되어 조금 공제받는 약값과 병원비를 제외하고는 빚만 쌓이고 있어요.”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 없었던 그녀는 딸을 살릴 방도를 찾느라 신장 이식을 위한 조직 적합성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완전한 조직의 일치 판정!’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1,000분의 1 확률도 안 될 정도의 극히 드문 경우라고 한다. 딸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로 자신은 큰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비 3천만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기적이란 거 믿지 않았는데 검사를 받고 희망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 한 가닥 희망이 돈 없는 부모 때문에 절망으로….”

 여자는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맥없이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우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렸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출이 잘 될 거예요’ 

 이 말만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는 걸 알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여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은행을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명의대여자를 만나러 갔던 동인이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얘기가 잘 되었고 이제 한 명만 더 구하면 된다며 싱글벙글거렸다. 여자 4명이 각기 10억씩을 찾으려는 계획인 것 같았다. 

 현우는 이 점에서도 그와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저번에 동인의 무뚝뚝한 반응을 상기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선 시간은 저녁 7시가 지나서였다. 횡단보도에서 헤어진 현우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류 준비하셨다면서요? 마침 볼일이 있어 이 근처를 지나다 보니 수혜 씨 집과 가깝네요. 바쁘신데 내일 사무실로 오실 필요 없이 제가 받아가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대신 다음에 커피를 사셔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말을 일부러 강조했다.

 사실 현우는 그녀에게 미리 전화해서 오늘 사무실에 올 수 있겠냐며 물어보았다. 수혜는 내일 들르겠다고 했다. 만약 그녀가 방문하겠다고 했으면 필히 막아야 한다.

 수혜가 이들과 대면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 아군을 적에게 노출시켜서는 작전에 치명적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내일부터는 현우가 낸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문의 전화가 온다. 퇴근 후에는 독자적인 업무가 다시 시작된다. 이제 시간은 열흘도 남지 않았다.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바뀔 것이다. 

 고층 빌딩 옥상에 설치된 광고 조명판에 ‘디데이 9일’이라는 문구가 반짝였다. 물론 그것은 현우의 눈에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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